"티 한장에 오천원… 없는게 없어요" 서문시장서 찾은 소확행
2019.05.26 16:52
수정 : 2019.06.05 09:30기사원문
"난 번잡한 거 싫은데 왜 자꾸 이리로 오냐." "어머니, 여기가 물건 값도 싸고 먹거리도 좋아요." 지난 20일 오전 11시쯤 대구 중구 서문시장으로 향하는 동3문으로 들어서자마자 옆을 지나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대화가 제일 먼저 인상깊게 들려왔다. 채 서른 살이 안 돼보이는 앳된 모습의 며느리는 연신 내켜하지 않는 시어머니의 팔짱을 꼭 낀 채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장 안에 들어서니 오가는 사람이 너무 많아 한자리에 멈춰 서 있기가 힘들다.
3대 장터였던 서문시장, 점포수만 4622개
서문시장은 조선 중기에 형성된 시장으로 옛 이름은 대구장이다. 평양장, 강경장과 함께 전국 3대 장터였다. 1920년대 대구 시가지가 확장되면서 서남쪽에 있던 천황당지를 매립해 다시 장을 옮긴게 지금의 서문시장이다. 대구읍성 서쪽에 자리잡아 서문시장으로 불리게 됐다. 서문시장은 대지면적 3만4944㎡, 건물연면적 9만3070㎡ 규모로 점포 수가 무려 4622개에 달한다. 이곳에서 생계를 꾸리는 상인만 1만2000명을 넘는다. 웬만한 대기업 직원 수보다도 많은 셈이다. 워낙 규모가 크고 취급하는 물건이 없는 게 없다보니 '삼남 제일의 큰 장'이라는 문구를 사용하고 있다. 정확한 표현이다. 서문시장에서 일어나는 연간 매출액은 현금장사가 많은 특성상 공식 집계를 할 수 없지만 시장상인연합회 측은 1조원을 훨씬 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남녀노소 빼곡한 인파… 평일 오전부터 북적
외지인이 서문시장에 들어서면 시장의 엄청난 규모에 놀라고 그 큰 시장을 빼곡하게 메운 인파에 다시 또 놀란다. 동남아시아 유명 관광지의 전통시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사람도 많고 활기차다. 시장을 오가는 사람도 나이든 노인보다는 중년층이 많다. 아이를 안고 다니는 젊은 주부나 부부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서문시장은 4개 지구, 4개 전문상가 등으로 구성됐다. 예전에 유명했던 섬유도시의 전통시장답게 원단부터 각종 의류는 물론 모피까지 각종 섬유제품에서 모든 구색을 다 갖추고 있다. 이 밖에도 건해물, 그릇을 비롯한 잡화도 그득하다.
"티 하나 오천원 주고 샀다." "잘 샀네. 이쁘네." "바지도 두 개나 샀다. 고무줄바지." "많이도 샀네. 근데 다 좋아 보이네." "좋아보이나? 내가 두어개 사줄게. 얼마 안한다. 밥먹고 같이 가보자." 오래된 식당에 들어가 앉으니 옆 테이블에 친구 사이로 보이는 초로의 여인들이 가방에서 주섬주섬 옷가지를 꺼내며 나누는 대화가 즐겁다.
식당에서 식사 중인 대만에서 왔다는 자매 관광객은 "오래된 시장이라고 꼭 가봐야 하는 곳이라 왔는데 진짜 한국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며 "비좁기는 하지만 오래된 시장 음식을 사 먹을 수 있어 재밌는 경험이 됐다"고 말했다.
서문시장을 둘러보면 볼거리가 많지만 먹거리도 좋다. 골목 중간중간에 순대와 머릿고기를 내는 노점상들이 있지만 아무래도 가장 특색 있는 먹거리는 칼국수다. 시장에 일렬로 죽 들어선 노점은 손님들에게 국수를 말아내느라 정신이 없다. 손님들이 간이의자에 어깨를 닿을 듯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먹는 칼국수는 나름 재미가 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국수를 파는 집이 많은 것일까. 시장 상인에게 물었다. "여기가 삼성이 일어선 동네입니다. 여기서 조금만 올라가면 삼성상회가 자리를 잡고 장사를 시작한 데가 있는데 거기서 국수를 팔았습니다. 그래서 서문시장에 국숫집이 많은 겁니다"라고 설명했다.
'삼성의 시작' 삼성상회 터가 바로 옆에
시장을 빠져나와 삼성상회 옛 터를 향했다. 불과 200m나 걸었을까, 글로벌 기업 '삼성'의 모태가 된 삼성상회가 창업한 곳이 눈에 들어온다. '삼성상회의 풍경'이라고 쓴 소개글에서는 '전화기 한 대와 40여명의 종업원으로 출발한 삼성상회는 대구 근교의 청과물과 동해안의 건어물 등을 모아 만주와 베이징 등지로 수출했다. 또 제분기와 제면기를 갖추고 국수제조업도 병행했는데 당시 생산한 별표국수는 워낙 인기가 좋아 전국 각지에서 도소매상들이 끌고 온 소달구지와 짐 자전거가 북새통을 이뤘다'고 설명하고 있다.
즐비한 칼국수집… 갈비찜도 소문난 먹거리
서문시장의 또 이름난 먹거리는 갈비찜이다. 여느 도시나 있는 음식이지만 서문시장의 갈비찜은 마늘을 활용해 좀 특별하다. 서문시장 한쪽 갈비골목으로 불리는 곳에 들어서면 음식점이 연달아 위치해 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식당은 '삼미갈비찜' 집이다. 1977년부터 영업을 한 이곳의 터줏대감이다.
양념이 시꺼멓게 눌어붙은 찌그러진 양은냄비에 내는 갈비찜은 알싸한 마늘 향이 일품이다. 다소 간이 센 편이지만 마늘 향을 가득 머금은 고기는 자꾸 숟가락을 끌어당긴다. 양푼에 담겨 나오는 밥에 양념만 떠서 쓱쓱 비벼 먹어도 좋다. 비결을 물으니 간장을 만들 때, 고기를 재울 때, 고기를 조리할 때 마늘을 3번이나 넣는다고 설명한다. 청국장도 함께 나오는데 콩을 으깨지 않고 통째로 넣었다. 냄새도 덜하고 입속에서 퍼지는 고유의 향이 좋다.
이 집 주인장은 "이 식당은 1977년부터 장인의 고모가 운영하던 것을 장모가 이어받았고, 5년전부터 사위인 자신이 경영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니까 지금이 3대째인 셈이다. 이곳은 처음 문을 열었을 때는 연탄을 지펴서 고기를 굽던 상인들을 대상으로 한 선술집이었다. 그러나 연기가 많이 나고 화재위험도 있어 양은냄비에 고기를 볶아내는 곳으로 바뀌고, 이후에 고기를 갈비로 바꾸게 됐다. 이 집 주인장은 "외지 방문객도 많지만 일본, 대만, 동남아 등 해외에서 오는 방문객들도 아주 많다"며 "특히 일본 관광객들이 하루에 10팀 이상 오는데 갈비와 청국장을 그렇게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볼 때 너무 기분이 좋다"고 설명했다.
대구의 밤 밝힌다 방천 夜시장 투어
서문시장은 워낙 넓고 다양해 볼거리, 즐길거리가 많지만 저녁이 가까워오는 시간이라면 이곳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방천시장으로 발길을 옮기는 것도 좋다. 대구 중구 대봉동에 위치한 방천시장은 광복 이후 만주와 일본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 신천변에 난전을 내기 시작하며 생겨난 시장이다.
방천시장은 야시장으로 특히 유명하다. 요즘 대구에서 가장 유명세를 타고 있는 '김광석거리'와 같이 붙어있어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김광석의 노랫말 등을 테마로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골목 사잇길에는 어김없이 휴대폰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방문객들을 볼 수 있다. 저녁이 가까워질수록 김광석거리는 오가는 사람이 훨씬 많아졌다. 일부는 서문시장에서 봤던 외국인 관광객도 더러 있다.
방천시장의 한 상인은 "방천시장을 찾는 사람들은 야시장이 열리기 전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해 김광석거리에서 놀다가 야시장이 열리면 저녁과 술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며 "대구를 찾는 사람들의 관광코스처럼 자리잡은 것 같다"고 설명했다.
방천시장 야시장은 저렴하고 맛있는 안주와 술값으로 대구는 물론 이 일대 젊은이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수도권 지역까지 입소문이 나면서 이 문화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많이 온다고 한다.
방천시장은 전통시장치고는 상당히 젊은 느낌을 준다. 야시장으로 유명세를 타면서 오래된 상점들이 하나둘씩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공간으로 바뀌고 있어서다.
장사 준비를 하고 있는 한 방천시장 야시장 상인은 "아마도 방천시장이 몇 년 지나면 더 젊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며 "야시장 때문인지 저녁에 문을 여는 전통시장 상인들도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kwkim@fnnews.com 김관웅 부동산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