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만 알아도 잊으련만"…덧없이 흐른 31년
2019.06.14 07:00
수정 : 2019.08.01 17:07기사원문
(서울=뉴스1) 심언기 기자 =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가슴에 안고 죽어야 하는데 사람 목숨이라는 게 죽지도 않고. 그렇다고 또 잊히지도 않아요. 데려간 사람에게 현상금 1000만원이라도 내줄테니 생사만이라도 알았으면 좋겠어. 이제와서 다른 건 다 필요 없지 뭘."
1988년 4월23일, 3남1녀 중 셋째인 김태희군은 14살의 나이에 홀연히 사라졌다. 토요일 점심 즈음 하교해 방에서 단잠에 빠진 아들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보건소 간호사인 어머니가 김군의 할머니를 모시고 치과에 다녀온 사이 벌어진 일이다.
당시 체신부 공무원으로 근무했던 김홍문씨(85)와 간호사이던 김군 어머니(80)는 어느새 팔순을 넘겼다. 만삭의 몸을 이끌고 근무하던 중 출산한 어머니는 병원의 초기 미흡한 대처로 김군이 지적장애를 앓게 된 게 늘 미안했다. 그래서 부부는 더욱 사랑과 관심을 기울였다.
김군은 장애가 있었지만 자신의 이름과 집 전화번호는 또렷이 기억했다. 특히 아버지를 유난히 잘 따랐다고 한다. 김씨는 "퇴근시간이 되면 집 대문 앞에 나와서 기다리다가 매달리고, 밤에 잘 때도 옆에 꼭 붙어서 자던 착한 아이였다"고 회상했다.
김군이 사라진 뒤 모든 일상이 달라졌다. 남은 세 아이와 노모를 부양해야 했던 김씨 부부는 일을 놓지는 못했지만, 퇴근 후에는 전단지를 들고 거리로 나섰다. 주말에는 전국의 보호기관·시설과 경찰서를 전전했다.
김군을 찾을 수 있다는 한줄기 희망이 비치기도 했다. 실종 3개월여가 지난 시점 김군 사연이 방송 전파를 타자 전국에서 제보가 들어왔다. 대부분은 장난전화이거나 신상이 맞지 않았지만, 경기 군포에서 수족관을 운영하던 A씨의 제보는 김군의 인상착의와 행동이 일치했다.
A씨는 김군으로 추정되는 아이를 발견하고 방범대원에게 인계했다고 전했다. 실낱같은 단서를 잡은 김씨 부부는 당시 방범대원을 찾아갔지만 군포읍사무소 당직실에 인계했다는 답변만 받았다. 군포읍사무소에서는 인수한 아이가 없다고 했다. 엇갈린 주장에 김씨 부부의 가슴은 또 한번 새카맣게 타 들어갔다.
김씨 부부는 경찰에 진정서를 넣고 검찰에도 도움을 요청했지만 모두 손사래를 쳤다. 당시 경기도경찰국은 '업무처리를 태만히 한 비위가 인정돼 징계위원회에 회부했다'면서도 '이상의 조사결과 회신 외에 다른 사실을 알려드릴 수 없다'고 알려왔다고 했다. 손에 잡힐 듯하던 아들은 그렇게 또 부모 품에서 멀어졌다. 그리고 31년의 세월이 덧없이 흘렀다.
김군의 빈자리는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다. 자식 잃은 슬픔 속에 기력이 쇠한 어머니는 치매와 합병증으로 앓아누웠다. 김씨는 월 1000만원이 넘는 아내의 치료·병원비로 힘겨운 생활고를 버텨내면서도 오늘도 아들을 찾아 신발끈을 조여맨다.
김씨는 "기가 막히지. 자식 잃어버린 부모가 어디다 하소연을 하겠어. 벌써 세월이 30년이 넘으니까 전단지를 돌려도 소용 없고 시설에 가서 찾아봐도 찾을 수 없고. 아주 막연하지"라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서 "죽었는지 살았는지만 알아도, 내가 그 사람을 만나 그걸(유괴) 지금 나한테 얘기해주면 해롭게 안 할거야. 생사만, 생사만 알게돼 마음속에 지워만 버려도 내 마음이 편할 거 같아."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