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컵라면 물 올리고 떠난 아버지는 돌아오지 못했다"

      2019.06.16 12:59   수정 : 2019.06.16 12:59기사원문

"우리 가족은 아직도 2018년 11월 8일에 살고 있습니다"
서울 금천구의 한 오피스텔 기계식 주차장에서 사망한 故박영태씨의 아들 성현씨(31)는 사건 기록을 들춰보며 이렇게 말했다.

지난해 11월 8일. 그날 서울에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아들은 아버지의 비보를 듣고 황급히 차를 몰았지만 폭우 속에 차는 올림픽 대로에서 멈춰섰다.

아들은 차에서 아버지가 깨어나길 기도 했지만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고객 닦달에 주차장 들어갔다 참변
16일 수사 당국에 따르면 사건은 오피스텔의 기계식 주차장이 고장 나면서 발생했다.
지난해 11월 8일 오후 7시께 컵라면에 물을 붓고 있던 아버지 박씨는 고장 소식을 듣고 동료인 김모씨와 함께 승강기로 향했다.

한 손님의 '닦달'이 문제였다. 사우나 이용고객이었던 한 주차고객은 경비원들에게 "빨리 차량을 뺄 수 있게 해달라"고 독촉했다. 이에 박씨는 A/S기사를 불렀으나 폭우 탓에 차가 밀린다는 답변을 들었다. 결국 박씨와 김씨는 A/S기사에게 방법을 물어 밑이 뚫린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승강기 점검이 끝나고 먼저 빠져 나간 김씨를 따라 나가던 박씨는 닫히는 문에 머리를 부딪치고 지하 3층으로 떨어졌다. 그는 끝내 컵라면을 먹지 못했다.

경찰의 수사가 시작되자 A/S기사는 자신에게 책임이 없다고 항변했다. 그는 경찰 수사에서 "주차장 내부에 들어가지 말라고 만류했으나 박씨가 내부에 들어갔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동료의 주장은 이와 다르다. 김씨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박씨가 손님이 재촉한다고 하자 A/S기사가 친절하게 들어가는 방법을 모두 알려줬다"며 "박씨의 휴대폰이 부서지는 바람에 전화 녹취본을 구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사건 발생 이후 안전 교육도 수사 선상에 올랐다. 경찰은 오피스텔 관리업체가 경비원들에게 제대로 안전 교육을 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단순히 구두로 안전 교육을 진행하는 탓에 사고가 났다는 것이다. 결국 관리소장인 A씨는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주의 의무했다"vs."메뉴얼 없어"
유족과 관리업체는 책임소재를 두고 갈등을 빚고 있다. 유족에 따르면 관리업체는 "박씨의 귀책사유로 사건이 발생했다"며 배상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후 경찰이 관리소장을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로 검찰에 송치하자 업체는 도의적 책임을 지겠다는 의미에서 3000만원의 합의금을 제안했다. 유족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관리업체는 지난 3일 재차 3500만원의 합의금을 제안했다.

아들 성현씨는 "어떻게든 아버지의 과실로 만들려는 관리업체가 이해가 안 된다"며 "재판에 넘겨지자 위자료를 적게 주려고 머리 쓰는 게 보여 용서할 수 없다"고 토로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그의 차남은 정신 질환으로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지난 11일 서울남부지법 형사11단독에서 첫 공판기일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관리소장 A씨는 "관리 소홀에 주의 의무를 다했다"며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그러나 유족은 "오피스텔에 비상 메뉴얼 조차 마련되지 않았다. 끔찍한 사건으로 정신적 피해가 크다"며 1억원의 위자료 청구를 재판부에 신청했다.

관리업체는 도의적인 책임을 다하겠다는 입장이다. 관리업체 대표는 "관리업체를 운영하면서 경비원들 책상이나 주차장 앞에 들어가지 말라는 스티커를 붙여놨다"며 "매일 구두로 주차장의 위험성에 대해 교육했다"고 해명했다.


대표는 "합의금에 대해서는 앞으로 조율해 나갈 문제"라며 "유족과 대화를 통해 합의점을 찾아 나가겠다"고 말했다.

beruf@fnnews.com 이진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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