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픈 건 다 하는 '본 투 비' DJ

      2019.06.15 08:59   수정 : 2019.06.15 08:59기사원문
첫 놀이터를 기억하는가. 나는 나의 첫 놀이터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막 이사 간 아파트 단지 놀이터, 낯선 얼굴로 가득한 그곳에서 아이들은 떠들며 놀고 있었다. 아버지는 친구들과 어울리라 했지만, 거기 어디 내 친구가 있느냔 말이지. 그때까지 골목길에서 구슬치기며 팽이치기만 했던 게 전부였던 나는 낯선 놀이기구들 앞에서 한참을 어색하게 서 있었더랬다.



놀아봐야 놀 줄 안다. 꿈도 마찬가지, 꿔본 사람이 멋진 꿈을 꾸는 법이다.
오래 간직한 순정이 대접받는 시대는 진즉에 지났다. 마음이 가는 대로 놀고 저만의 방식대로 꿈꾸는 세상이 온 것이다. 문제는 첫걸음이다. 놀아본 적 없고 꿈꿔본 적 없는 사람을 새로운 세계로 이끄는 데는 역시 친구만 한 게 없다. 친구 한 명만 있다면 낯선 놀이터도 더는 낯선 곳만이 아닐 테니까.

여기 모두 어우러져 제 식대로 노는 놀이터를 꿈꾸는 사람들이 있다. 모든 작가를 지원하는 창작집단 이상공작소를 꾸려가는 젊은 청춘들이 바로 그들이다. 8년차 방송인 안지예씨(31)는 이상공작소에서 기획이사란 직함으로 1년째 활동하고 있다.

나는 안씨를 동서식품이 한시적으로 운영하는 팝업스토어 모카라디오에서 처음 만났다. 그녀는 투명하고 깔끔하게 차려진 부스에서 손님들의 사연을 받아 그에 맞는 노래를 틀어주는 DJ(디스크자키)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손님들보다도 저 스스로가 더 즐거워하는 듯 느껴져 눈길을 끌었다. 저토록 즐겁게 일하는 사람이라면 꿈과 매력을 지닌 이를 인터뷰하는 플레이어의 취지와도 딱 맞겠다 싶었다.

■타고난 DJ, 아나운서 되다



안씨는 제주MBC에서 아침 프로그램 ‘굿모닝 FM제주’ 진행을 시작으로, 경인교통방송 ‘굿모닝인천’을 거쳐, 현재는 같은 방송국 메인시간대 방송인 ‘낭만이 있는 곳에’를 진행하는 라디오 전문 방송인이다.

안씨는 스스로를 본 투 비(Born to be) 라디오진행자라고 소개한다.

“예전에 음악다방이 있었을 때 엄마는 부스에서 멘트를 하는 DJ셨고, 아버지는 요즘으로 치면 엔지니어인 판돌이 일을 하셨어요. 그런 탓인지 어릴 때부터 집에 음악과 라디오 소리가 끊어지지 않았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라디오에 친숙해졌고 이 길을 걷게 된 것 같아요.”

아나운서가 좋아 직업을 골랐다기보다는 라디오가 좋아서 관련된 일을 하고 싶었던 그녀다. 하지만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라디오 청취율은 갈수록 떨어지고, 아나운서나 연예인들이 라디오 진행자 자리 대부분을 꿰찼기 때문이다.

“음악을 고르고 방송을 진행하는 DJ 일이 생소한 이유는 이 직업을 연예인 아니면 아나운서가 다 하기 때문이에요. 이 직업군을 채용하는 공지도 아나운서 채용하는 홈페이지에 올라오죠. 그래서 이걸 하려면 아나운서 교육을 받을 수밖에 없었어요.”

아나운서가 되기 위해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했다는 그녀는 프리랜서 아나운서로 활동을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 해소되지 않는 갈증과 마주했다고 했다. 방송의 구성과 음악선곡에서 역할이 제한적인 아나운서가 갑갑하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아나운서는 말만 하면 되는데 피디는 구성이나 (음악) 초이스도 해요. 저는 그런 작업이 하고 싶었어요.”

■해소되지 않는 갈증, 연기자로 나서다



고등학교 시절 열정을 다한 연극부 활동이 촉매가 된 것일까. 제주도에서 방송활동을 하며 안면을 튼 지인으로부터 연기자가 되기 위한 방법까지 알아냈다.

“사실 연기를 갑자기 시작한 건 아니에요. 고등학교 때 동아리 생활이 반이라 해도 될 만큼 열심히 했고, 전국대회에 나가서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어요. 서울로 올라와 대학로에서 프로배우로 데뷔한 게 4년 전쯤인데, 마음 한 구석에 갈증이 심했죠. 어느 정도였느냐면 연극을 보러 가면 마음이 울렁거려서 보지 못할 정도였어요. 그동안 이걸 숨기고 산거죠. 그래서 서울로 올라왔고 오디션을 보고 덜컥 합격한 거예요.”

그녀는 프리랜서 방송활동을 이어가는 한편, 연극 <행오버> <체인징 파트너> 뮤지컬 <리슨> 등에서 크고 작은 역할을 맡았다. 따로 연기수업을 받은 것도 아닌데 본 오디션마다 합격통지를 받아들었다.

“전에 가수 아이비씨가 뮤지컬 합격률이 높다는 이야기를 할 때 풀세팅을 하고 가서 뽑지 않을 수 없었을 거란 이야기를 한 걸 들었어요. 저도 오디션장에 그냥 안 갔죠. 시놉시스를 나름대로 분석해서 캐릭터의 옷차림과 태도를 완전히 갖춰서 갔어요. 나중에 들어보니 이미지가 어울려서 많이들 선택하셨다고 했죠.”

그녀의 활동은 연기에 그치지 않았다. 이상공작소와의 만남은 필연적이었다.

“라디오와 관련된 다른 활동이 어떤 게 있을까 하다 이태원대학교라는 참여형 시민교육 프로젝트 강사로 활동하게 됐어요. 거기서 이상공작소를 꾸려가던 김성태 대표와 만났죠. 팟캐스트를 하고 있다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쉬운 게 많았죠. 내가 들어가면 정말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계속 졸랐고 프로의 입장에서 방송을 업그레이드시켜주겠다고 해서 처음 이상공작소 활동을 하게 됐죠.”

■모든 소소한 삶을 응원한다


이상공작소와 함께 한 1년여의 시간 동안 팟캐스트는 물론 책 출판과 북콘서트까지 안씨의 손을 거쳐 세상과 만난 프로젝트가 여럿이다. 안씨 역시 프리랜서로 방송을 하는 시간 외엔 이상공작소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상공작소에서 그녀가 그리는 꿈은 무엇일까. 꿈을 물었더니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꿈에 매몰된 세상을 넘어, 목표 없이 오늘을 사는 소소한 삶들을 응원하는 게 꿈이라는 답이다.

“저는 꿈쟁이를 싫어해요. 왜 항상 모두가 꿈이 있어야 하고, 목표가 있어야 하나요. 아무런 목표 없이 살면 어때서요. ‘어렸을 때부터 라디오 DJ가 꿈이었는데 이뤄냈어’라고 하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아요. ‘나는 꿈이 없는데 잘못 살고 있는 건가’하고요. 그때 느꼈어요. 목표가 있고 앞으로 가야만 하고 그런 삶 대신, 아무것도 안 되더라도 그냥 사는 일상이 주목받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게 제 꿈이라고요.”

본업인 라디오 DJ부터, 연기와 콘텐츠 기획까지, 닥치는 대로 이것저것 다 하는 그녀에게 수없이 쏟아졌을 시선에 대해서 물었다. 특히 예술분야에 있어 많은 창작자들이 한 길만 걸을 것을 강요하는 시선, 다양한 길을 걷는 이들을 향해 깊이가 없을 것이란 편견과 깊이를 강요하는 목소리가 바로 그것이다. 주요 활동무대인 연기를 넘어 그림을 그리고 영화연출까지 나선 구혜선과 하정우, 노래뿐 아니라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쓰는 조영남과 타블로 등도 이같은 편견과 맞닥뜨려야 했다.

“꿈이나 목표가 직업에 국한되며 발생하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직업에 목숨을 거는 것 같은데, 만약 누가 본업에 그정도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딴 일을 하는 게 되는 거고 가지 많은 나무라며 평가절하되기도 하죠. 사실 어떤 사람은 하나만 하고 싶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은 저처럼 여러 가지가 하고 싶을 수 있는데, 그냥 자연스럽게 봐줬으면 좋겠어요. 작가이면서 배우일 수도 있고 그런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여겨지는 세상이었으면 해요.”

[가끔 상상합니다. 비디오가게 점원 타란티노를, 차고 안의 잡스를, 아를의 반 고흐를 만나는 순간을요. 연습구장에서 땀 흘리는 메시를, 취재에 치이던 트웨인과 헤밍웨이를 만나는 건 또 어떨까요. 상상만으로도 짜릿합니다. 저도 한 때는 예술에 삶을 걸겠다고 맹세했었지요. 어찌나 즐겁고 괴로웠는지, 얼마나 뜨겁고 슬펐던지를 기억합니다. 꼭 한 번이라도 그 시절 나를 만날 수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래서 기획했습니다. 만날 가치가 있는 사람을 만나 들을 가치가 있는 얘기를 듣는 인터뷰 프로젝트를요. '플레이어'라 이름붙인 이 길 위에서 애저녁에 떠나가버린 나와 만나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를 일입니다. 조건은 오로지 셋입니다. 꿈이 있을 것, 꿈을 향해 달리고 있을 것, 매력적일 것. 플레이어가 이름을 얻지 못한다 해도, 필요한 곳에 조그마한 힘이라도 건넬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럼 제 인생의 플레이어일, 제 삶 가운데 투쟁하고 있을 멋쟁이 꿈돌이들에게 이 인터뷰를 바칩니다. 지긋지긋한 이 生을, 어디 한 번 살아내 봅시다.
]

팟캐스트 <김성호의 블랙리스트> <김성호의 플레이어>에서 더 깊은 인터뷰를 만날 수 있습니다.

pen@fnnews.com 김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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