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척간두에 선 철의 여인, 캐리 람
2019.08.24 05:59
수정 : 2019.08.24 05:59기사원문
1978년 5월 11일. 홍콩의 식민지 정부청사 앞에 홍콩대학 학생들이 몰려왔다. 이들은 당시 반정부 시위에 참가해 '좌파'로 몰려 퇴학당한 보혈회금희 중학교 학생 4명과 함께 퇴출된 선생들의 복귀를 외치며 행진했다. 당시 행진을 담은 사진에는 두꺼운 뿔테안경을 쓴 20대 대학생이었던 쳉 위엣 응오(캐리 쳉)가 찍혔다.
람은 1957년 5월 13일 홍콩섬 북부 완차이 지역에서 중국 저장성 출신 이주 노동자 가정의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나 올해 한국 나이로 63세가 됐다. 그의 가족은 4~5세대가 함께 사는 공동주택에서 살았고 집세를 아끼기 위해 식구가 일곱인 다른 가족과 집 한 채를 칸막이로 나눠썼다. 람은 훗날 인터뷰에서 할머니가 남매를 보살폈고 어머니가 생계를 위해 집에 일거리를 가져오면 도왔다고 말했다. 그는 "나는 비좁은 환경에서 살았지만 특별히 가난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완차이의 가톨릭 학교에서 중·고교 과정을 마친 람은 딱 1번을 빼고 반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2013년 라디오 방송에서 당시 상황에 대해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왜 내가 1등이 아니지?" 라고 말했다. 람은 고교 생활 중에 중간고사에서 1등자리를 놓치자 집에 돌아와 울었다고 회상했다. 한편 람은 완차이의 여고시절 학생회장을 지내면서 선생에게 어떻게 학생들을 통제하냐고 묻자 "네가 통제하는 게 아니라 격려해야지"라는 대답을 들었다고 말했다.
람은 이후 홍콩대학에 입학해 강성 운동권 학생으로 변신했다. 당시 그와 함께 활동했던 운동권 학생들은 2017년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와 인터뷰에서 람이 조용하고 앞에 나서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수재민을 돕고 캠퍼스에 포스터를 그려 붙이는 등 행동으로 나서던 동지였다고 기억했다. 이 당시 람과 어울렸던 리 윙탓과 신 중카이 같은 운동권 학생들은 훗날 홍콩 민주화 운동의 거물로 성장해 람과 대립하게 된다. 람은 대학생활 동안 사회학 공부를 위해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이용해 베이징 칭화대학을 다녀왔으며, 전공을 사회복지에서 사회과학으로 바꿔 1980년에 대학을 마쳤다.
반골 기질이 다분하던 그의 성향이 돌변한 것은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이후였다. 람은 2016년 인터뷰에서 자신이 대학생 시절 반정부 활동을 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정부에 들어가면서 변화가 시작됐다고 말했다. 그는 "(대학) 당시에는 내게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고 밝혔다.
람은 졸업과 같은해 홍콩 정부에 취직했고 2년 뒤 식민지 정부의 지원으로 영국 본토의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연수를 떠났다. 그는 여기서 영국 국적의 수학자인 남편 람 시우포와 만나 1984년에 결혼했으며 홍콩 관습대로 이름에 남편의 성을 덧붙였다. 현재 부부의 슬하에는 영국 국적의 아들이 2명 있다.
홍콩에 돌아온 람은 주로 재무 부서를 떠돌다가 2000년에 사회복지국장으로 진급한다. 그는 이후 주택 및 토지 개발부, 런던 주재 경제·무역 사무소, 민정사모국 등을 지휘했으며 2007년 6월에 개발국장(장관)에 오르면서 본격적으로 유명세를 탔다. 람은 당시 홍콩섬과 카우룽 반도를 잇는 페리선 부두였던 스타페리 부두와 퀸즈 부두를 철거하면서 '거친 싸움꾼'이라는 명성과 악명을 함께 얻었다. 환경론자들과 시민들은 환경 오염 및 역사적 중요성을 제기하며 반대에 나섰지만 람의 불도저식 행정을 막을 수 없었다. 람은 2011년에 신계 지역에서 불법주택을 단속해 시민들의 지지를 받았고 렁춘잉 당시 행정장관은 이듬해 람을 정부사장(총리)에 임명했다.
람은 2년 뒤인 2014년 9월에 일생일대의 기회를 잡았다. 1997년에 중국에 반환된 홍콩의 행정장관은 홍콩 의회, 중국 정부의 홍콩 대표, 전문직 대표, 노동 및 기타 계층 대표까지 4대 분야의 선거인단이 뽑는 간선제이기 때문에 친중세력이 득세할 수밖에 없다. 2~3대 행정장관을 지냈던 도널드 창은 중국과 협상을 통해 2017년부터 직선제를 도입한다는 약속을 받았으나 정작 중국 정부는 애초에 출마자를 중국의 승인을 받은 후보로 제한하는 안을 내놓아 홍콩 시민들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직선제 도입을 요구하는 시민들은 '우산 혁명'을 일으켜 도시 중심가를 점거했다.
이때 람은 시위를 주도한 학생 대표들과 공개 토론을 벌이며 절대로 협상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지켰다.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람은 최루탄을 동원해 시위를 강제 해산하고 1000여명을 체포했으며 시민들에게 단단히 미운털이 박혔지만 중국 정부에게는 좋은 점수를 받았다. 그는 2017년 1월에 정무사장을 사임하고 같은해 행정장관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는데 범민주파 시민단체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람에 반대하는 응답자 비율은 96.1%에 달했다. 람은 당선 직후 중국 언론과 인터뷰에서 홍콩인들이 '중국인'이라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며 중국사를 중학 필수 과목으로 지정하겠다고 말했고 내각 16명 가운데 15명을 친중 인사로 채웠다.
5년 임기 중 겨우 2년을 채운 람은 올 여름 홍콩을 들썩인 범죄인 인도법(송환법) 시위로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송환법은 홍콩 정부가 중국을 포함해 범죄인 인도조약을 체결하지 않은 국가에 범죄 용의자를 넘겨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지난해 대만에서는 한 홍콩 남성이 여자 친구를 살해하고 홍콩으로 달아났지만 인도 조약이 체결되지 않아 대만으로 송환되지 않은 사건이 일어났다. 람은 대만의 피해자 가족에게서 5통의 편지를 받았다며 송환법을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홍콩 내 민주파들은 송환법이 홍콩 내 정치범들을 본토로 잡아가는 중국 정부의 도구가 될 뿐이라며 반대하고 있다. 관계자들은 뉴욕타임스(NYT)를 통해 송환법 자체는 애초에 람의 생각이었으나 이를 본 중국 정부가 법을 강력하게 지지했다고 밝혔다.
람은 지난 6월 송환법 조례 심의로 불붙은 민심을 우산혁명처럼 다루며 강경 진압에 나섰지만 시민들의 분노는 5년 새 더욱 불어나 있었다. 결국 람은 지난달 중국 정부에 그만두겠다고 했으나 중국 측은 혼란을 책임지라며 이를 거부했다.
사실 람은 이번 사태에서 자신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NYT와 접촉한 홍콩 정부 관계자들은 람이 하루에 3~5시간씩 자고 자정까지 사무실을 지키는 '일중독자'라고 입을 모았다. 그를 알고 지낸 이들은 람이 일단 목표를 정하면 놀라울 정도의 명석함과 과단성을 보여주지만 부하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독단적이며 장관에 오른 뒤 더욱 권위주의에 빠졌다고 평가했다.
람이 시위를 바라보는 시각은 지난 6월 인터뷰에서 확실하게 드러났다. 그는 시위가 거세지자 "자식이 매번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면 단기적으로는 관계가 좋을지 몰라도 자식이 크면 어머니가 그 때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둔 것을 원망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평생 최고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주변에 모든 것을 자기 입맛대로 해야 직성이 풀렸던 그에게 자기 말을 듣지 않는 시위대는 그저 철없는 애들로 보였던 것이다.
람은 이달 시위대가 평화 노선으로 기울어지자 이제야 사회 각계각층과 대화할 수 있는 플랫폼을 마련하겠다고 발표했다. 그가 과연 이번에는 고교 시절 선생의 말처럼 "통제" 대신 "격려"하는 법을 배우게 될 지 의문이다.
pjw@fnnews.com 박종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