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계 레전드' 이영표 "재능이 없어 노력밖엔 답이 없었다"
2019.08.31 09:00
수정 : 2019.08.31 09:26기사원문
(서울=뉴스1) 정수영 기자,정윤경 기자,성소의 인턴기자 = "2002 월드컵은 저 개인뿐 아니라 한국축구와 우리나라에도 엄청난 터닝포인트였어요."
2002년 한일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으로 평가받는 이영표(42). 이 '레전드 수비수'는 당시 월드컵을 회상하며 "우리 안에 '하나를 이루는 DNA'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계기였다"면서 "스포츠가 한 나라에 이렇게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한일월드컵은 그의 인생에도 분수령 같은 사건이었다. "히딩크 감독님과 좋은 선수들을 만났고, 유럽에 진출하는 기회가 됐으니까요." 월드컵 이후 이영표는 PSV아인트호벤과 토트넘 홋스퍼를 거쳐 밴쿠버 화이트캡스에 이르기까지 세계무대를 치열하게 누볐다. '매직드리블' '한국인 프리미어리거 2호' '대한민국 최고의 윙백'. 호평이 쏟아졌다.
빛나는 성공스토리를 써온 듯 보이지만, 그는 사실 축구계의 '실패부자'다. 문화체육관광부 스포츠혁신위원회 민간위원, 한국컴패션(국제어린이양육기구) 홍보대사 활동 등으로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이영표는 최근 <뉴스1>과의 인터뷰에서 "실패의 기억이 유독 많다"고 말했다.
◇"나는 안 되는구나…노력한 게 억울했다"
축구인생 가운데 가장 절망적인 순간은 1998년 대학교 3학년 때였다. "4학년으로 올라갈 즈음 건국대 축구부 주장이 됐어요. 당시 저희 축구부에 올림픽 국가대표가 6명 있었는데, 5명은 제 친구였고 1명은 후배였죠." 주장임에도 국가대표가 아니었던 이영표는 열등감과 패배감에 마음이 복잡했다고 밝혔다.
그 복잡한 마음은 그해 겨울, 결국 폭발했다. "날씨가 추워지니 개인훈련을 나오는 선수들이 없었어요. 저 혼자 땀 뻘뻘 흘리며 개인운동을 하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죠. '다른 친구들은 따뜻한 숙소에서 쉬고 있겠지? 지난 10년간 내가 했던 노력은 뭐지? 나처럼 재능 없는 사람은 아무리 해도 안 되는구나.' 노력한 시간이 억울해 펑펑 울었어요."
그는 '연습벌레'로 유명했다. 중학생 시절 밤마다 드리블 연습을 하고, 고교 땐 민첩성과 체력을 기르려고 '줄넘기 2단뛰기 1000개' '새벽등산'을 하루도 빼놓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노력을 해도 발전은 더디게만 느껴졌다. '나'만 제자리인 것 같은 불안함, 노력이 발전으로 이어지지 않는 답답함. 1998년 겨울, 그의 마음이 무너져 내린 이유였다.
노력하는 인생엔 역전의 기회가 기다리고 있는 걸까. 그 절망의 시간을 보내고 몇 주 뒤, 올림픽 대표팀의 한 선수가 다치는 바람에 그에게 테스트 기회가 왔다. 결과는 '합격'. 그리고 1999년 6월 이영표는 국가대표팀에 발탁됐다.
◇실패가 성공으로 이어지기 위한 조건
유럽리그에서 뛰는 동안에도 "가뭄에 콩 나듯 이겼고 대부분 실패한 기억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그는 그러나 숱한 실패를 겪고 나니, 실패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했다. "중요한 경기에서 질 때마다 '내 축구인생은 끝났다'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실패가 '끝'이긴커녕 성공으로 이끄는 징검다리가 됐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그는 모든 실패가 다 성공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라고 덧붙였다. "실패가 성공으로 연결되려면 '시간'이 필요해요. 우리는 빨리 결과를 보려고 하는데 조급해선 안 돼요. 노력 즉, '땀의 양'도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고통'도 반드시 있어야 해요. 마지막으로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인내'도요."
◇"재능이 없어 더 전력질주했다"
이영표는 축구 때문에 수차례 절망했지만 단 한 번도 축구를 포기하고 싶은 적은 없었다고 했다.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 고민했고, 노력으로 돌파해갔다. "재능이 없어 노력밖에 답이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
경기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사고가 나 팔이 삐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고, 토트넘에서 뛸 땐 벤치를 지켜야 했던 시간들도 있었다. 그 시간을 견디며 마지막까지 그라운드의 왼쪽 측면을 지켰다. 2013년 10월, 이 '성실한 수비수'의 은퇴전을 기념하기 위해 밴쿠버 화이트캡스가 특별제작한 경기티켓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우리의 전부, 우리의 영광(Our all, Our hon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