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와 불이 만나 펼치는 오크통의 마법.. 초콜릿 향과 바닐라향까지

      2019.10.03 13:03   수정 : 2019.10.03 13:39기사원문


[파이낸셜뉴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꽃이 만발한 정원을 한가롭게 거닌다. 아득한 기억 속에서 달콤한 미소를 짓는 소녀를 떠올리며 싹을 틔우기 시작한 푸른 이파리의 향기와 비 갠후 발밑에서 피어오르는 흙냄새에 취해…."
10여년 전 우리나라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던 일본의 아기 타다시가 그린 와인만화 '신의 물방울'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등장인물인 토마스 잇세는 제4사도인 프랑스 포므롤 지역의 명품와인 '샤또 라플뢰르'의 느낌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제가 은사처럼 생각하는 한 교수님은 늘 와인을 접할때마다 "입안에서 보석을 굴린다"는 표현을 씁니다. 와인 잔을 기울이는 순간 그 '보석'이 미각의 돌기를 하나하나 일으켜 세우고 수만개의 후각세포를 깨운다고 합니다.

와인을 마시는 사람들은 왜 이처럼 현학적이고 복잡한 표현을 쓰는 것일까요. 와인은 향기로 마시는 술이기 때문입니다. 와인을 오랫동안 접해 본 마니아들은 어떤 와인을 접할때마다 과일 향과 꽃 향, 풀 향, 나무 향은 물론이고 태운 향, 동물 향, 향신료 향, 달콤한 향, 미네랄 향 등 냄새를 표현하는 온갖 표현을 다 동원합니다.

와인의 향은 아로마, 부케로 구분됩니다.
아로마는 포도의 품종에 따라 구별되는 특유의 맛과 포도나무가 땅에서 뽑아올린 영양분이 포도알에 축적돼 나타나는 자체의 맛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과일 향, 꽃 향, 풀 향, 나무 향, 미네랄 향 등이 해당됩니다.

태운 향, 동물 향, 향신료 향, 달콤한 향 등은 바로 부케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다발을 의미하는 부케는 와인이 오크에서 숙성이 이뤄지고 저장되는 과정에서 생기는 향기입니다. 아로마는 포도 품종과 그 땅이 가진 특징이 그대로 표현되는 아로마와 달리 생산자의 취향이 반영된 인위적인 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부케 향은 어떻게 왔을까요.



■오크통이 와인의 신세계 열어
8000여년 전 그루지아에서는 와인을 빚은 후 흙으로 구워 만든 큰 저장용기인 '크베브리'에 담아 보관했으며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도 작은 토기그릇인 암포라라는 작고 길죽한 용기에 저장했습니다.

당시에는 와인을 해를 넘겨 마신다는 것을 상상도 못했습니다. 밀폐력에 한계가 있어 와인이 오래되지 않아 상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와인은 산소와 접촉하게 되면 산화가 일어나 식초로 변하게 됩니다. 따라서 고대인들은 당시 와인을 저장할때 "어떻게 해야 공기의 접촉을 막을까" 하는게 가장 큰 숙제였습니다. 그래서 토기에 와인을 담고 그 위에 올리브 기름을 부어 와인이 공기중에 노출되지 않게 했습니다. 또 그리스에서는 아예 송진으로 입구를 밀봉하는 등 온갖 방법이 동원되기도 했습니다.



토기 말고도 지역에 따라서는 염소가죽으로 만든 주머니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와인을 다 먹고 난 후에는 다시 사용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와인이 발효될때 탄산가스가 나오는데 이게 염소가죽의 약한 부분을 뚫어버려 종종 와인이 새는 경우가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라"라는 말이 유래된 기원입니다.

그러던 중 기원전 1세기 경 오크통이 발명되면서 와인이 획기적으로 진화하기 시작합니다. 갈리아 지방, 지금의 프랑스 지역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오크통은 나무로 제작돼 암포라에 비해 훨씬 가볍고 편평한 곳에서는 굴릴 수도 있어 이동시키기도 편리했습니다.

토기로 만든 저장용기는 아무리 오래 저장해도 와인의 맛이나 향에 변화를 주지 못했지만 오크통은 와인에 색소와 향취, 타닌을 더해줘 지금처럼 와인이 복합적인 맛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와인이 오크통을 구성하고 있는 나무 세포와 만나면 와인 특유의 색소인 안토시아닌이 더 진해지고 오래가게 됩니다. 또 오크통을 만들때 생성되는 여러가지 향이 와인에 입혀져 오늘날처럼 부케 향의 옷을 입게 됩니다. 나무에도 타닌이 있는데 포도 과즙속의 타닌과 만나 더 큰 타닌을 지니게 됩니다. 바야흐로 신세계가 시작된 것입니다.



■오크통은 나무와 불이 만드는 마법
오크통의 나무는 불과 만나 와인의 맛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킵니다. 오크통은 밀폐력을 높이기 위해 곡선 형태의 모양을 갖추게 되는데 이때 곡선을 만들기 위해 내부 표면을 불에 굽습니다. 오크통을 짤때 생기는 부산물인 오크 조각으로 불을 지피는데 여기서 마법이 일어납니다.

불에 그을리는 정도에 따라 와인의 맛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예를들어 오크 통을 많이 구우면 와인에서 커피, 정향, 계피 등 훈연된 향취가 느껴지게 됩니다. 중간 정도로 덜 구우면 바닐라나 캐러멜 등 달치근한 향취가 와인에 우러납니다. 아예 훨씬 덜 굽게 되면 불로 인한 풍미가 나오지 않지만 대신 나무 특유의 향취와 타닌이 와인에 스며들게 됩니다.

또 오크통의 크기에 따라 오크 향의 영향을 조절할 수 있습니다. 가장 작은 크기인 프랑스 산 바릭의 경우 225리터로 작아 와인에 부케향을 많이 가미할 수 있지만 반대로 용량이 수만리터에 달하는 오크통을 사용할 경우 부케향이 거의 묻어나지 않게 됩니다. 포도의 신선한 맛을 중요시해 오크통에서 나오는 맛과 향을 꺼리는 생산자나 화이트 와인의 경우는 아예 스테인레스 스틸통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오크통도 무조건 새 것만 사용하기보다는 새 것과 이미 사용한 헌 오크통을 적절히 이용해야 와인이 균형잡힌 맛과 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오크통을 만드는 오크나무, 아카시아 나무, 밤나무, 체리나무 등 여러 가지가 사용되지만 전통적인 오크나무(quercus)가 가장 고품질을 자랑합니다. 오크나무는 프랑스, 스페인, 슬라보니아, 러시아, 미국에도 많이 분포돼 있지만 유럽산 오크나무를 최고로 칩니다. 그 중에서도 프랑스 중부에서 생산되는 오크가 최고로 평가받습니다. 유럽의 나무들은 천천히 자라 나무결이 타이트하며 향도 강하고 타닌과 페놀도 많이 함유돼 있지만 미국의 오크는 기후가 좋아 빨리 자라 나무 결이 넓고 타닌 성분도 적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크통의 가격도 완전히 다릅니다. 프랑스 산 오크통은 바릭(225리터)을 기준으로 100만원 이상의 가격을 보입니다. 반면 헝가리산 오크통은 70만원선, 미국산 오크통은 40만원 선입니다.

신의 물방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와인을 한 모금 마신후에 그 와인에 대한 느낌을 표현합니다. 주말 저녁 와인 코르크를 연다면 와인을 입에 머금고 그 '보석'을 입속에서 5초 정도 굴려보세요. 그동안 생각지도 않고 지나쳤던 맛과 향기가 입속에서 휘몰아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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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은 '와인산업의 혁명적 사건-코르크와 유리병'이 이어집니다.

kwkim@fnnews.com 김관웅 부동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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