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정규직 女쿠팡맨' 35세女 반전, 前 직업이..
2019.10.22 07:00
수정 : 2019.10.22 10:48기사원문
(서울=뉴스1) 정혜민 기자 = '배송 기사'라고 하면 보통 무거운 짐을 잔뜩 들고 계단을 오르는 남성의 모습을 떠올린다. 신체적으로 고된 배송 기사의 일은 금녀의 영역으로 여겨졌다. 요즘 남성도 힘들다는 배송일에 도전하는 여성이 속속 나타나고 있다.
정준희씨(35)는 쿠팡의 배송 기사, 쿠팡맨이다. 전체 쿠팡맨 5200명 중 정 씨 같은 여성은 극소수다. 그는 배송일을 생업으로 삼고 있다. 지난 10일 쿠팡 남양주1 캠프에서 정 씨를 만났다.
쿠팡맨이라서 신체 조건이 좀 더 특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 씨는 다소 작은 키에 나이보다 앳된 얼굴을 하고 나타났다. 그는 다소 쌀쌀한 날씨에도 반바지 유니폼을 고수하며 "배송 일을 하면 덥다"고 설명했다.
정 씨는 4년제 대학교에서 태권도를 전공하고 미국에서 5년 동안 태권도 사범으로 활동한 '엘리트 체육인'이다. 정 씨의 부모님은 그런 딸을 내심 자랑스러워 했다. 그런데 정 씨는 돌연 그간의 경력을 버리고 쿠팡맨이 되겠다고 부모님에게 선언했다.
"부모님도 처음에는 계속 '다시 운동해야지. 언제까지 그 일 할 거니'라고 물어보셨어요. 하지만 저의 비전을 이야기하고 설득하니까 이제는 가장 열심히 응원해주세요. 저를 계기로 더 많은 여성 쿠팡맨이 나타났으면 좋겠습니다" 정 씨가 입을 열었다.
◇33세 여성 태권도 사범이 '쿠팡맨'이 되기까지
"'여자'가 버틸 수 있을까. 솔직히 이런 고민을 많이 했죠. 결론은 '여자라고 못할 것은 없다'입니다"
정 씨가 쿠팡맨의 길을 걷게 된 이유는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2008년부터 약 5년 동안 미국에서 태권도를 가르치며 경력을 쌓았다. 그런데 귀국을 하고 보니 국내 체육계의 근로환경이 너무나 열악했다.
한국에서는 태권도 사범이 200만원 미만의 월급을 받았다. 정 씨는 "그런 근무 조건에서는 아이들을 잘 가르칠 자신이 없었다"고 회상했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는 방법도 고려했지만 개인적인 사유로 좌절됐다.
정 씨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30대 여성을 채용하는 곳은 많지 않았다. 정 씨는 "한국 기업에서는 30대 여성을 '파트타임 주부 사원'으로 뽑고 있다. 공사장에서 일할 생각도 했지만 여성을 채용하지는 않더라"고 회상했다.
그때 쿠팡이 사회로 돌아갈 길을 터줬다. '블라인드 채용'을 하는 쿠팡은 그에게 '성별'과 '나이'를 묻지 않았다. 수습 쿠팡맨으로 50대 중반이 입사한 사례도 있다. 물론 화상 면접과 팔굽혀펴기·오래달리기·운전 등 직무 평가를 통과해야 쿠팡맨이 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택배사와 달리 쿠팡은 배송 기사가 차를 사지(지입) 않고 회사차(쿠팡카)를 운전하기 때문에 경제적 부담이 적다는 점도 정 씨가 쿠팡을 택한 이유다.
정 씨는 "백수 생활을 하면서 소속될 곳이 없어 힘들었는데 쿠팡이라는 울타리가 생기면서 많이 의지가 됐다"며 "쿠팡 사내 여자축구 동호회에서 가입해 동료들과 친해지고 싶다"고 밝혔다.
쿠팡맨을 꿈꾸는 여성들에게 조언을 부탁하자 정 씨는 "'여자라서 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보다는 '주변 동료들이 도와줄 것이고 나도 맡은 일을 성실하게 하다 보면 역량이 늘어날 것'이라고 믿고 입사한다면 충분히 잘할 것"이라고 전했다.
◇"한국 사회의 다른 부모님도 딸의 도전에 응원해주셨으면"
운수업에서는 자잘한 사고가 잦지만 정 씨는 입사 후 여태 '무사고' 기록을 잘 유지하고 있다. 정 씨는 부모님을 생각하며 특히 안전운전에 신경쓴다고 했다
정 씨는 "19살에 운전면허를 따자마자 아버지께서 차 키를 주시고 운전을 가르쳐주셨다. 그때 아버지가 '안전운전'을 세뇌했다"며 웃으며 말했다. 남다른 딸에게는 남다른 아버지가 있었던 셈이다.
정 씨가 여자로서는 드물게 운동을 업으로 삼고 또 이후 쿠팡맨에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의 응원 덕분이었다. 그는 "부모님이 저를 많이 지지해 주셨다"며 "그렇지 않았다면 (태권도와 쿠팡맨 일을 하기가) 어려웠을 것 같다"고 회상했다.
그는 "제가 태권도를 할 때까지만 해도 체육을 전공하는 여자는 드물었다. 아버지는 학생 때 야구선수였는데 딸에게는 운동을 안 시키려 하셨다. 그런데 유전적인 게 있는 것 같다. 제가 운동을 너무 좋아하니 부모님은 저를 응원해주시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정 씨는 "쿠팡맨을 할 때도 부모님은 '그만두라'고 말하시지는 않았다. 대신 날씨가 나쁠 때면 '비 조심하고 운전 조심하라'며 전화를 주신다. 부모님을 생각하며 더 안전운전을 하려고 한다"고 웃었다.
그는 "부모님께 감사하다"며 "한국 사회의 다른 부모님들도 딸들에게 그렇게 해주셨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부모님의 지지와 사랑을 듬뿍 받은 정 씨는 수줍어하면서도 인터뷰 내내 밝고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최초 정규직 여성 쿠팡맨 정 씨가 꿈꾸는 미래
"저를 정규직으로 전환시켜주시면 첫 번째 여성 정규직 쿠팡맨을 뽑으시는 겁니다"
올해 8월. 근속 2년에게 주어지는 정규직 전환 심사 면접에서 정 씨는 당당히 말했다. 그리고 진짜로 '최초 정규직 여성 쿠팡맨'의 타이틀을 달았다.
정 씨는 "1호 정규직 여성 쿠팡맨이 됐다고 하니 부모님도 너무 좋아하시고 친구들도 모두 '리스펙'(존경한다는 힙합식 용어)한다고 말했다"면서도 "1호라서 사내에서 주목하기 때문에 '더 잘해야겠다'는 부담도 있다"고 소회를 전했다.
딱 1년만 해보려 시작한 일이지만 장 씨는 이제 쿠팡 안에서 미래를 개척하고 있다. 지난 7월에는 1종 대형면허를 땄다. 대형 간선 차량을 운전해 물류창고에서 각 캠프로 물건을 전달해 주는 새로운 업무에 도전하기 위해서다. 최근 정 씨는 제 몸집보다 훨씬 큰 5톤 트럭을 모는 일을 맡았다.
정 씨는 "더 나아가서는 쿠팡맨에서 관리자로 승진하거나 쿠팡 본사로 발령 날 기회가 열려있다. 저에게도 그런 기회가 있다면 도전해 보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쿠팡맨에게도 고충은 있다. 정 씨는 "아직도 배송하는 사람을 낮게 보시는 분들이 존재하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런 분들이 줄어들고 쿠팡맨이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면 고객 서비스도 더 좋아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삶의 목표에 대해 묻자 정 씨는 "앞으로도 계속 행복하고 싶다"고 답했다. 그는 "사람마다 '성공'의 의미가 다른 것 같다. 누군가에게는 사업, 돈, 꿈을 뜻할 수 있다. 저에게 성공은 '행복'이다. 5분의 휴식, 한 끼의 식사가 행복이 될 수 있다. 지금까지 나름 행복하니까 성공한 것 같다"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