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병원들이 사람보다 먼저 생각하는 것 [병원 근무복 세탁 실태점검 4]
2020.01.26 08:30
수정 : 2020.01.26 08:30기사원문
지난 보름여의 취재과정에서 만난 간호사들은 격무에 시달리는 노동자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피 묻은 근무복을 집에 가져가 빠는 간호사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체액과 타액은 물론 소변과 대변이 묻은 근무복을 병원 밖으로 가져가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있다는 증언이 쏟아졌다.
지난 기사들의 댓글란에는 간호사는 물론 다양한 직역의 의료종사자 및 그 가족들의 원성이 빗발쳤다. 일부는 근무복을 직접 빠는 게 당연한 일인 줄 알았다는 고백도 있었다.
의사 가운은 세탁해주면서도 간호사 근무복은 집으로 가져가도록 하는 병원 정책에 적지 않은 간호사들의 자존감이 바닥까지 추락한 듯 보였다. 지난 기사에서 적었던 해외 학술지에서도 의사 가운보다 간호사들이 일상적으로 입는 근무복의 오염도가 더 높다는 보고가 있었다.
가천대학교 길병원(원장 김양우)이 쏘아올린 작은 공은 기자를 한국 의료계의 열악한 현실 가운데로 데려갔다. 백의의 천사는 어디에도 없었다. 열악한 환경에 내몰린 의료노동자만 있을 뿐이었다. 간호사는 화려한 건물,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병원에서 채 몇 년을 버티지 못하고 갈아치워지는 부품처럼도 보였다. 2020년 한국에서 흔하게 마주하는 풍경이었다.
하지만 정말 그래도 괜찮은가.
■담아낸 것과 담지 못한 것
기자는 지난해 사고를 당해 3개월여를 병원 침상 위에서 보냈다. 그때 만난 병원 근무자들은 참으로 고마운 존재였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크게 상한 환자에게 위안을 주었다. 그것이 곧 치료가 됐다. 나는 이번 시리즈를 통해 그때 받은 고마움을 돌려주려 했다. 과연 제대로 전해졌을지 의문이지만.
일선에서 환자를 마주하는 간호사들의 자긍심과 자존감은 고스란히 환자에게 전해지는 법이다. 오늘날 한국 의료계가 이룩한 자랑스러운 무엇이 존재한다면, 오로지 새로운 수술법이나 첨단의 기술·기기·약품의 공적만은 아닐 거라고 믿는 이유다. 취재 중 터져 나온 이국종 아주대학교병원 권역외상센터장 사건도 이와 궤를 같이한다. 존경하는 문재인 대통령께서는 벌써 수 년 전에 ‘사람이 먼저다’라고 하셨다는데, 오늘 한국의 현실은 과연 어떠한지 돌아본다.
설 연휴기간 동안 ‘병원 근무복 세탁 실태점검’이란 제하의 기사를 세 편이나 냈다. 돌아보면 담은 내용보다 담지 못한 내용이 훨씬 더 많다. 다루지 못한 내용은 향후 의료기관 및 보건당국의 대응에 따라 언제든 추가로 보도할 준비가 되어 있다.
본 기자는 파이낸셜뉴스 생활경제부 소속이다. 그 중에서도 식음료 업계에서 벌어지는 일을 주로 다룬다. 한국 언론이 처한 현실 가운데 제 분야를 넘어 취재하고 기사를 낸다는 건 여러모로 피곤한 일이다. 추후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불가피한 걸 제외하면 대부분의 취재를 퇴근 이후에 감행해야 했다는 점도 그렇다. 덕분에 예정된 이사도 보름이나 미뤄졌다.
때로는 피곤함을 넘어서는 일들도 마주할 수 있다. 하지만 써야할 것을 쓰지 못한다면 왜 기자를 하겠는가. 스스로 감당해야 할 문제다.
지난 보름여 동안 취재를 진행하며 많은 놀라운 일들과 마주쳤다. 간호사 탈의실이 엘리베이터 앞 비좁은 공간에 마련되고, 간호사들이 피가 튄 근무복을 집으로 가져와 직접 세탁하는 모습을 보았다. 내로라하는 병원에서 벌어지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기자뿐 아니라 그 병원을 방문하는 누구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고
근무복 세탁 실태를 조사하면서부터는 더욱 이해되지 않는 일과 수없이 마주했다. 어떤 병원과 간호사들은 기자를 적대시했다. 면전에서 “우리 옷을 우리가 빨겠다는데 당신이 무슨 상관이냐”는 소리까지 들었다. 대놓고 “우리 병원 간호사들은 다 만족하고 있으니 관심 꺼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전화나 문자로 연락할 땐 그냥 끊어버린다거나 답변을 주지 않는 이들이 아주 많았다. 병원 근무자를 위한 취재이기도 하다고 생각했는데, 기자를 막아선 건 태반이 병원 근무자였다.
힘이 된 것 역시 그들이었다. 적잖은 수의 근무자들이 기자의 취재에 적극 협력했고 기꺼이 정보를 나누어 주었다. 그런 도움이 없었다면 결코 내지 못할 기사를 낼 수 있었다.
일부 병원 및 병원 관계자는 은근히 명예훼손 등 소송 이야기를 흘리기도 했다. 철저한 취재와 법률적 검토 아래 패소가능성도 없다는 판단을 내렸으나, 혹여 그런 곳이 있다면 기자가 미력하나마 전력을 다하여 해당 병원의 투명하고 발전적인 미래에 기여할 것을 다짐한다.
사람은 본래 자신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한다. 그래서 때로는 바깥의 시각이 필요하다. 지난 기사들에 달린 댓글들을 찬찬히 읽어보면 누구나 느낄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취재를 막아선 사람들조차도 말이다.
또한 놀란 것 하나는 보건당국의 태만한 관리였다. 어떠한 조직과 기관에 연락을 돌려봐도 근무복 세탁 현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일일이 연락을 취하며 얼마나 많은 순간 그만두고 싶었던가. 단 한 곳의 기관, 단 한 개의 언론이라도 비슷한 무엇을 하고 있었다면 나는 그대로 그만뒀을 것이다.
파악하지 않고 있다는 건 관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래도 되는 문제일까. 취재를 하며 목격한 일들도, 관련된 논문도, 일선 의료종사자들의 목소리도, 심지어는 보건복지부(장관 박능후)가 취한 몇몇 정책들도 그래선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취재를 지속했다.
보건복지부는 이미 있는 법률안을 두고도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었다. 입법취지는 명확해 보였고, 그에 근거한 유권해석이나 여러 보완책도 작동이 가능할 듯 보였다. 기자가 연락을 취한 다수의 법률가도 같은 의견이었다. 법이 정한 ‘의료기관세탁물’에 포함돼야 마땅한 오염된 근무복들이 병원 안팎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동안, 보건복지부는 말 그대로 잠자고 있었다.
■바닥까지 떨어진 마음들이 일어서기를
무엇보다 책임이 큰 건 병원이다. 25일 오후 나간 ‘병원 근무복 세탁 실태점검 3’ 기사에서, 기자는 문제의 원인이 ‘작게 보면 법에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 병원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상당수 병원이 병원 차원에서 근무복 세탁을 하지 않는 이유는 명백하다. 비용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일부 취재가 진행됐으나 더는 미룰 수 없는 다른 사건이 많아 이쯤에서 시리즈를 갈무리한다.
다만 주변 반응에 따라 추가 보도도 가능한 일이다. 이번 취재 역시 ‘주차장 탈의실’ 한 편으로 그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만약 어느 누가 다시 한 번 기자를 부당하게 막아선다면, 다음 기사에선 구체적인 정황이 낱낱이 공개될 수 있겠다.
취재의 주 대상이 됐던 길병원은 기자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다. 많은 구성원들이 당면한 문제를 인식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움직임을 자발적으로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기자는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는 앙드레 말로의 문장을 좋아한다. 길병원이 마침내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맞이할 것이라 믿는다. 그 내일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
동네 개인병원도 물론 그렇겠지만 종합병원들은 한국의 여러 기자들이 전담해서 취재하는 곳이다. 그만큼 사회적으로 중요한 기관인 것이다. 간호사는 그 기관을 지탱하는 중추 가운데 하나다. 지금 그 간호사들의 자존감이 바닥에 떨어져 있다. 왜 관련된 깊이 있는 보도를 한 건도 찾을 수 없었나 생각해본다. 반성할 부분이다.
이 글을 보며 누군가는, 특히 일부 기자들은 '이게 일기지 기사냐'고 따질 수 있을 듯하다. 그래서 취재 후기를 보도하는 ‘기자수첩’ 형식을 빌려 기사를 낸다. 변변치 못한 기자는 이런 이야기들을 한꺼번에 담아낼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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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n@fnnews.com 김성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