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춘추서 풍자만화 그리던 곱슬머리 ‘봉’선배…그때도 운동권"

      2020.02.12 05:00   수정 : 2020.02.12 22:08기사원문
봉준호 감독. © 뉴스1


춘추만평(연세춘추 관계자 제공). © 뉴스1


춘추만평(연세춘추 관계자 제공). © 뉴스1


봉준호 감독이 그린 자화상(아카데미시상식 공식 인스타그램 )© 뉴스1

(서울=뉴스1) 온다예 기자 = 오스카 4관왕을 휩쓸며 단번에 세계적인 거장 반열에 오른 봉준호 감독(51). 그러나 대학시절 후배들에게 봉 감독은 여전히 친근한 ' 복학생 형'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20대 학창시절 대학 학보사에서 봉 감독을 처음 만났다는 고모씨(48·91학번)는 11일 뉴스1과 인터뷰에서 "27년이 지났어도 곱슬곱슬한 머리와 저음의 묵직한 목소리는 20대 때와 똑같다"며 허허 웃었다.

고씨는 "당시에는 군 전역 후 막 복학했을 때라 날씬했고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을 즐겼던 것으로 기억한다"며 "봉 감독은 귀여운 복학생 형이었고 엄숙한 목소리로 사람 웃기는 선배였다"고 회상했다.



학보사에서 함께 활동했던 허모씨(48·91학번) 역시 "후배들을 매우 잘 챙겨주는 좋은 동네 형 같았다"며 젊은 시절의 봉 감독을 추억했다.

봉준호 감독은 연세대 사회학과 88학번 출신이다.
중학교 때부터 영화 감독이 꿈이었던 그는 대학 시절 연합 영화 동아리 '노란 문'을 만들어 활동했고 교내언론 '연세춘추'에서 한 컷 풍자 카툰인 '춘추만평' 과 네 컷 만화 '연돌이와 세순이'를 그렸다.

봉 감독이 연세춘추에서 만화를 연재한 건 복학 이후인 1993년이었다. 1학기에 연재를 시작해 한 학기만에 연재를 그만뒀지만 그 기간 봉 감독과 함께 했던 고씨와 허씨는 봉 감독의 대학시절을 또렷이 기억했다. 당시 허씨는 연세춘추의 편집국장, 고씨는 문화부장 겸 사진부장이었다.

봉 감독이 연세춘추에서 만화를 그리게 된 건 허씨 덕분이었다. 1992년 2학기 기존에 연재를 하던 작가가 사정이 생겨 연재를 중단하게 되자 허씨는 그림을 잘 그리기로 소문난 봉 감독을 새 작가로 추천했다.

허씨는 "봉 선배가 그림을 잘 그리는 걸로 워낙 유명했다. 그림을 잘 그리는 걸 아니까 자연스럽게 준호 형에게 연재하겠느냐 물어봤고 형도 흔쾌히 승낙했다"고 말했다.

봉 감독은 매주 금요일 편집실에 와서 학생들과 그 주의 주제를 함께 의논하고 그 자리에 앉아 곧바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허씨는 "춘추만평은 주로 사회적 문제를, 연돌이와 세순이는 학내 주요사안을 다뤘는데 민감한 주제도 위트있고 기발하게 잘 그려내 학생들의 호응이 좋았다"고 평했다.

그때부터 봉준호 감독 특유의 사회 비판 의식이 돋보였던 것으로 보인다.

허씨는 "선배의 영화를 보면 자본주의, 계급갈등 등 사회의식이 잘 드러나는데 예전부터 만화에서도 그러한 생각을 잘 포착할 수 있었다"며 "노사분규 등 예민할 수 있는 사회문제를 자주 다뤘다"고 말했다.

고씨는 봉 감독을 '최루탄을 그리워하는 옛날 운동권'이라고도 표현했다. 1993년은 학생운동 침체기에 접어들었던 시기인데, 어느 금요일 오후 편집실 밖에서 최루탄이 터지는 소리가 나자 봉 감독은 갑자기 밖으로 뛰쳐나갔다.

고씨는 "봉 선배가 한참 뒤에 돌아오더니 아~ 최루탄 냄새 좋다' 이러더라. 독한 냄새가 뭐가 좋냐고 했더니 '나는 구수해, 좋다'라고 답했다. 그때 나는 봉 선배가 이성보다는 감성적인 운동권 선배구나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너무나 조용했던 그 학기가 복학생으로서는 실망스러웠고 지루했던 모양"이라며 "화염병을 던질 때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불덩이와 그에 오버랩되는 최루탄 연기 자욱한 장면을 그분은 그리워했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봉 감독의 영화 '괴물'에서도 화염병이 등장하는데 이를 두고 고씨는 "봉 선배가 좋아하는 것이라 편집해 넣었겠다 속으로 생각하며 웃었다"고 말했다.

봉 감독은 연세춘추에서 단 한 학기 만에 연재를 그만둔다. 봉 감독은 지난 1월 발간된 연세동문회보와 인터뷰에서 "평은 좋았는데 매주 두 개의 만화를 그리느라 마감 공포에 시달리다 한 학기 만에 접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연세춘추의 만화 연재는 짧게 끝났지만 봉 감독의 만화사랑은 이후 영화제작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봉 감독은 연출뿐 아니라 직접 각본을 쓰고 콘티를 그리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각본의 각 장면을 시나리오 속 인물과 배경, 카메라 앵글이나 움직임을 그림으로 구현한다. 디테일한 연출로 '봉테일(봉준호+디테일)'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도 바로 이러한 세밀함 때문이다.

연세대를 졸업한 뒤 봉 감독은 한국영화아카데미에 진학했다. 이후 장편 데뷔작인 플란다스의 개(2000)를 비롯해 살인의 추억(2003), 괴물(2006), 마더(2009), 설국열차(2013), 옥자(2017) 등 굵직한 작품을 쏟아냈고 7번째 장편 영화인 '기생충'으로 한국 영화사의 큰 획을 그었다.

기생충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고 권위인 작품상을 비롯해 감독상과 각본상, 국제극영화상을 싹쓸이했다. 지난해 5월 칸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데 이어 아카데미 시상식까지 점령하면서 봉 감독과 그의 모교인 연세대는 겹경사를 누리게 됐다.

대학시절을 함께한 후배들도 봉 감독이 세계적인 거장이 될 줄은 몰랐다며 놀라워했다. 허씨는 "당시엔 다들 어렸으니 감독으로서 이렇게까지 크게 성공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뒤 동문들은 '자랑스럽다'며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고 말했다.

봉 감독은 여전히 대학시절을 함께 했던 동기들과 종종 만남을 가지며 우정을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허씨는 "항상 소소하고 털털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정말 인간적인 사람"이라며 그의 앞날을 응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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