⑩두 차례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분단의 길로
2020.03.08 06:01
수정 : 2020.03.09 20:24기사원문
해방정국 3년의 역사적 경험은 오늘날 한반도가 당면한 문제를 풀어나가는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 과거의 실패를 성찰해야 현재의 과제를 파악할 수 있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의식으로 광복 75주년을 맞아 새롭게 발굴된 사진과 문서를 중심으로 해방 직후 격동의 3년간을 매주 재조명해 본다.
9. 미소공동위원회 앞두고 좌·우익 갈려
1946년 3월 20일 뜨거운 관심 속에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서울에서 개최됐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조선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과 이에 협력하는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 조직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연합국의 합의로 ‘통일정부’를 구성할 수 있는 기회였다. 미국 아치발드 아놀드(Archibald V. Arnold) 소장과 소련 테렌티 스티코프(Terenti F. Stykov) 중장이 양측 수석대표를 맡았다.
그러나 1월 16일부터 2월 5일까지 예비회담을 거쳐 개막된 제1차 미소공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난관에 부딪쳤다. 3월 20일 개회식부터 회의 절차와 의제 선정까지는 그런대로 순항했다. 개회식에서 한 미소 양국 수석대표의 연설은 라디오로 중계됐다.
암초는 미소공위가 협의할 정당과 단체 선정에서 발생했다. 미소공위는 임시정부와 지방행정구의 조직과 원칙을 마련하기 위해 ‘민주주의 정당과 사회단체’와 협의한다는 방침을 세웠는데, 협의 대상을 둘러싸고 미국과 소련 측의 입장 차이가 뚜렷했다.
미국 측은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중심으로 임시정부를 구성하자고 주장했고, 소련 측은 반탁투쟁을 한 정당·사회단체를 협의대상에서 제외하자고 제안했다.
미국은 내심 이승만(李承晩) 민주의원 의장을 임시정부의 수반으로 김구(金九), 김규식(金奎植) 민주의원 부의장 등이 참가하는 우파 중심 정부안을 구상했고, 소련은 여운형(呂運亨) 인민당 당수를 수상으로 박헌영(朴憲永) 조선공산당 당수와 김규식을 부수상으로 하는 임시정부안을 마련했다. 미소 양측 모두 수용하기 어려운 주장이었다.
미소공위는 4월 중순 협의대상이 될 정당과 단체는 모스크바 3상회의 협정에 대한 지지를 약속하는 선언서에 서명해야 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타협안을 발표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미소공동위원회 ‘공동성명 제5호’이다.
김규식 민주의원 부의장은 5호 성명을 지지해 우선 임시정부를 세운 다음 신탁통치를 반대하자고 민주의원 의원들을 설득했지만 김구 부의장 등은 반탁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이 ‘공동성명 5호’에 서명하더라도 반탁 의견 발표를 보장하겠다는 특별성명을 내면서 민주의원과 비상국민회의 등 우파단체의 지지를 이끌어내지만 소련 측은 ‘공동성명 5호’에 서명하면 반탁 의사 표명을 포기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단기간에 입장 차이를 좁힐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결국 미소공위는 5월 6일 무기휴회에 들어갔다.
-1947년 서울, 평양 오가며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1947년 5월 21일 서울에서 1년만에 미소공위가 다시 열렸다. 미국 수석대표는 아놀드 소장에서 앨버트 브라운(Albert E. Brown)소장으로 교체됐다.
미소공위가 속개되자 국내 각 정치세력도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좌익계와 중간파는 미소공위에 적극 참여하겠다는 뜻을 보였고, 우익계도 “통일정부 수립을 위하여 공동위원회 참가는 불가피하게 되었으며, 신탁문제는 임정수립 뒤 민족총의로 반대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미소공위 참가를 결정했다.
단정운동을 벌이던 한국민주당도 참가의사를 표명했다. 반탁운동을 주도하던 김구의 한국독립당에서도 일부가 이탈하여 미소공위 참가를 표명하여, 이승만과 김구의 직계세력을 제외한 거의 모든 정당·사회단체가 미소공위 참가 청원서를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6월 25일까지 미소공위에 청원서를 제출한 남한의 정당·사회단체 수는 425개, 북한의 정당·사회단체 수는 36개였다. 그러나 남북한 총 461개 정당·사회단체의 회원 수는 7000만 명이나 되어 당시 인구의 두 배나 되는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미소공위는 6월 25일 예정대로 남한의 정당 및 사회단체와 합동회의를 서울에서 가졌고, 이어 미소공위 대표들이 평양에 가서 6월 30일부터 며칠간 본회의를 개최하고, 7월 1일 북한의 정당 및 사회단체와 합동회의를 가졌다.
그러나 제1차 때와 마찬가지로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협의할 정당, 사회단체 선정 문제는 입장 차이가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 미국 측은 좌우합작을 통해 새로 결집한 중간 세력뿐만 아니라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단체도 포함시키고자 했고, 소련 측은 반탁투쟁위원회에 소속된 단체의 참여를 반대했다.
대립이 계속되자 미국은 한국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자는 대안을 내놓았고, 이에 맞서 소련은 미소 양군을 철수하고 조선 인민에 의한 자주적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제안을 했다.
9월 21일 유엔총회에서 미국안이 가결되고, 10월 18일 개최된 미소공위 제62차 본회의에서 미국 수석대표 브라운 소장이 국제연합에서 한국문제 토론이 끝날 때까지 공동위원회 업무를 중단하자고 제의하자 소련 대표단은 서울 철수를 발표했다.
10월 21일 미소공위 소련 대표단이 평양으로 출발함으로써 제2차 미소공위는 5개월간의 우여곡절 끝에 아무런 성과도 없이 막을 내렸다.
이로써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에 따라 임시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2년간에 걸쳐 개최된 미소공위는 아무런 결실 없이 끝나고, 한국 임시정부 수립문제는 유엔으로 넘어갔다. 미소 합의의 결렬은 사실상 남북이 분단 정부 수립의 길로 들어선 것을 의미했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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