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파일럿' 꿈 위해 청춘 다 바쳤는데…카톡 해고라니

      2020.05.22 06:55   수정 : 2020.05.22 10:57기사원문
© News1 김일환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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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세계적인 '감염병 대유행'을 몰고 온 코로나19는 일상은 물론 산업 구조까지 뒤바꿔놨다. 이름도 생소했던 '언택트'(비대면)는 단숨에 시장을 주름잡는 화두가 됐고, 오프라인 유통채널은 위기를 맞았다. 사상 최악의 '고용절벽'은 계약직부터 덮쳤다.

'무인로봇'이 단순노동을 대체하자 직장인들은 앞다퉈 IT 공부를 시작했다. 정부는 비대면과 디지털을 앞세운 '한국판 뉴딜'을 새 지평으로 선언했다.
코로나가 바꿔놓은 보통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봤다.

(서울=뉴스1) 최동현 기자 = "1년이든 2년이든 상관없어요. 노가다 뛰어도 좋으니까, 복직만 약속해줬으면 하는 심정이에요"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던 어느 5월 아침, 이진우씨(가명)는 일찍부터 걸려온 대리운전 호출을 받고 집을 나섰다. 남의 차 키를 받아 낯선 운전대를 잡았다. 두 달 전만 하더라도 비행기 조종간을 잡았던 손이었다.

같은 날 김성현씨(가명)는 새벽 일찍 차를 몰고 쿠팡 물류센터로 향했다. 택배를 시작한 지 갓 보름이 지났지만, 택배 상하차부터 코드 분류까지 제법 능숙해졌다.

경기도의 한 대형마트에서 일하는 '마트 아줌마' 박미영씨(가명)은 요즘 한 시간 일찍 일어난다. 일주일 뒤 점포가 문을 닫으면 6월부터는 1시간은 더 먼 곳으로 출근을 해야 한다.

지난 20일 세 사람을 만났다. 항공사 부기장, 면세점 판매원, 대형마트 직원으로 살아가던 이들은 4월 나란히 거리로 내몰렸다. 사상 최대의 '고용절벽'을 몰고 온 코로나19는 '계약직'의 삶부터 덮쳤다.

◇7년 만에 이룬 '파일럿의 꿈'…'카톡 해고'에 산산조각

"7년 걸렸어요. 청춘을 다 바쳤죠. 이제 두 달 뒤면 정식 부기장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씨는 항공사의 '수습 부기장'이었다. 그는 "평생 하늘을 날면서 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의 동료 중에는 회계사, 공무원, 대기업 직장인도 있었다. '고액 연봉'을 바랐다면 애초부터 직장을 박차고 나오지도 않았을 터다. 다들 그렇게 '늦깎이 파일럿(조종사) 준비생'이 된다.

고시도 길어야 5년이라는데, 이씨는 7년이 걸려서야 국내 저비용항공사(LCC)인 A항공에 합격했다. 항공학교에 다니고 비행시간을 채우는데 쓴 돈만 1억5000만원이 넘었다. '30대의 반을 거리에서 보냈다'는 말에 이씨는 "그래도 좋았다"고 수줍게 웃었다.

항공사에 합격했다고 곧바로 비행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약 10개월에 걸친 '수습 시험'을 통과해야 진짜 파일럿이 된다. 낙오하거나 성적이 낮으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는 '지옥 훈련'이다. 이씨는 마지막 교육까지 무사히 통과했다. 두 달 뒤면 정규직 전환이 된다는 생각에 무급 휴직 기간 택배를 뛰면서도 행복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꿈에 다다랐을 무렵, 카카오톡 메시지 하나가 떴다. '해고 통보'였다.

해고는 지난 3월 말 무급휴직 기간을 틈타 순식간에 진행됐다. A항공은 지난해부터 수습 교육을 받는 직원들에게 몇 달간 '무급휴직'을 쓰도록 했다. 회사가 어렵다는 이유에서였다. 공교롭게도 수습 부기장 80명 전원이 무급 휴직 도중 해고당했다. 그 후에는 객실 승무원이, 일반 지상직이 차례로 잘려 나갔다. 문자나 전화, 이메일 한 통조차 없었다.

이씨는 심정을 묻는 말에 내내 꺼질듯한 한숨만 몰아쉬었다. 그는 "혹시 안 나가고 버티면, 나중에 다시 불러주지 않을까 봐 퇴직원에 서명했다"고 고백했다. 부당한 퇴사의 순간에도 희망을 놓지 못해 회사의 눈치를 볼 만큼, 그렇게나 간절했다.

거리에 나온 중장년들이 갈 곳은 마땅치 않았다. 누군가는 차를 팔았고, 누군가는 택배를 뛰러 갔다. 일용직이 돼 공사장으로 갔다는 동기도 있었다. 이씨도 대리운전 기사가 됐다. 최근에는 주말 과외도 시작했다. 그는 "30살이 훌쩍 넘은 나이에 경력도 없는데 어딜 갈 수 있겠냐"며 쓰게 웃었다.

A항공은 '나중에 형편이 좋아지면 서류전형을 면제해 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곧 주인이 바뀔 회사의 기약 없는 소리로 들렸다. 설령 진짜여도 정규직 전환을 목전 앞에 둔 사람에게 '서류 면제'는 가당치 않은 조건이었다.

이씨는 "어차피 무급휴직이었지 않느냐"고 거듭 강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무급 휴직이 1년이든 2년이든 상관없어요. 기다릴 수 있으니까, 복직 하나만 약속해 줬으면 하는 심정이죠"

◇"휴직할래, 사직서 쓸래"…면세점 직원은 택배기사가 됐다

"무급휴직할래, 권고사직서 쓸래 묻더라고요. 언제까지 쉬냐고 하니까 '무기한'이라네요"

코로나19에 할퀸 삶이 이씨뿐일까. 1999년 외환위기(IMF) 이래 '최악의 고용절벽'을 몰고 온 코로나19는 전 산업군을 집어삼켰다.

국내 한 대기업 면세점에서 일하던 김성현씨도 '고용 쇼크'에서 비껴가지 못했다. 협력업체 계약직이었던 그는 지난 4월 쫓겨나듯 직장을 나왔다. 그의 상사는 '무급휴직과 권고사직 중에 선택하라'고 으름장을 놨다.

김씨는 "무급휴직은 언제까지냐고 물으니까 '무기한이다'라고 하더라"며 "한 달이 될지 석 달이 될지 모르는데, 그냥 나가라는 소리 아니겠냐"고 헛헛하게 웃었다.

쫓기듯 나온 거리는 혹독했다. 코로나19가 확산한 이후 단 4개월 만에 200만명이 넘는 실업자가 쏟아졌다. 통계 집계 이래 최대 규모다. 김씨는 "설마 '아르바이트라도 못하겠냐'고 아내를 다독였는데, 정말 편의점 일자리도 없었다"며 막막했던 퇴사 첫주를 떠올렸다.

김씨는 4월 말부터 '쿠팡 플렉서'가 됐다. 트렁크가 넉넉한 중고차를 사서 새벽 배송을 다닌다. 저녁 늦게 캠프(물류센터)에 도착해 이튿날 오전 10시까지 택배를 돌린다.

밤새 택배를 뛰어도 쉴 시간은 3~4시간이 고작이다. 김씨는 "배송 단가는 계속 떨어지고 미배정을 받을 때도 잦다"며 "하루 60~70개씩 택배를 돌려도 남는 건 몇 푼 안 된다"고 토로했다. 김씨는 "차라리 주간 택배로 돌리고 대리운전을 뛰어야 할 것 같다"고 말끝을 흐렸다.

◇왕복 5시간 멀리 '인사 발령'…'마트 아줌마'는 울었다

"나가라는 얘기죠. 집 앞에서 다니던 사람한테 '다음 달부터 50㎞ 먼 곳으로 출퇴근하세요'라고 하면, 다닐 수 있나요?"

'실직'은 피했지만 생계의 갈림길에 선 이들도 있다. 경기도의 한 대형마트에 근무하던 박미영씨는 최근 본사로부터 이상한 '발령'을 받았다. 오는 5월31일부로 점포를 폐점할 테니 6월1일부터 40㎞ 거리에 있는 다른 점포로 출근하라고 했다.

유통업계와 마트산업노동조합 등에 따르면 국내 유통 대기업 B그룹은 지난달 내부 공지를 통해 박씨가 일하는 C점포의 폐점 계획을 통보했다. 정규직 30여명과 무기계약직 40여명에게는 이직 희망 점포를 3순위까지 써내라고 했다.

문제는 B그룹이 제시한 '희망 점포' 명단이다. 가장 짧은 점포도 30㎞가 훌쩍 넘었다. 가장 먼 곳은 53㎞가 넘는 다른 도시에 있었다. 출근 시간만 2시간30분, 왕복 5시간이 넘는 오지였다. C점포와 가까운 인근 3개 점포는 아예 '지원 불가 점포'로 분류됐다. 인력을 배치할 자리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박씨와 같은 '마트 아줌마'가 원거리 인사 발령을 받는 경우는 이례적이다. 정규직 사원은 '전국 발령'이 원칙이지만 사택 지원이나 교통지원금 등의 보상을 받는다. 무기계약직은 기껏해야 '점포 내 부서이동'만 있을 뿐 거주지 인근 점포로 출퇴근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실제로 박씨를 비롯한 44명의 '마트 아줌마' 중 11명은 인사 발령 공고가 나기도 전에 사직서를 냈다. 마트노조는 B그룹의 인사발령을 '인력감축 구조조정'으로 규정했다.

노조 관계자는 "무기계약직 사원에게 원거리 점포 발령은 처음 있는 일"이라며 "무기계약직에 왕복 4~5시간을 출퇴근하라는 말은 구조조정을 빌미로 한 '해고 통보'와 같다"고 지적했다.
이어 "코로나19 확산으로 오프라인 점포의 폐점 속도는 더 빨라질 것"이라며 "그때마다 무기계약직을 이런 방식으로 내몰 것이냐"고 성토했다.

박씨는 남기로 했다.
그는 "계산을 해보니 왕복시간이 3시간이 조금 안 된다"며 "당장 애들 학교를 보내야 하는데 어쩌겠냐"고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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