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원 한 명도 '논의하자' 제안 없어··· 수술실CCTV 법안 폐기 전말 [김기자의 토요일]
2020.05.30 16:00
수정 : 2020.05.30 15:59기사원문
보건복지위가 소속 의원 등으로부터 회기 내 처리가 필요한 안건 등에 대한 의견을 접수했으나 이 법안을 언급한 의원실은 단 한 곳도 없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한 차례 논의 없이 폐기··· 책임은 누가?
30일 국회에 따르면 지난해 5월 안규백 의원(더불어민주당)이 대표발의한 수술실CCTV 설치법 자동 폐기를 앞두고 보건복지위 소속 의원실 가운데 의견을 낸 곳이 한 곳도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입법 당시 공동발의한 의원들의 입장 번복으로 한 차례 좌절되는 등 어렵게 발의됐으나, 보건복지위에서 단 한 차례도 논의되지 못하는 등 철저히 소외된 끝에 폐기를 맞게 됐다.
이와 관련해 법을 발의한 안 의원실 관계자는 “법 통과야 그렇다 치더라도 왜 한 차례도 논의가 안 됐는지는 모르겠다”며 “21대에 다시 발의할 생각은 하고 있다”고 말했다.
보건복지위에선 왜 이 법안을 논의하지 않은 걸까. 보건복지위 소속 의원실 수 곳에 연락을 돌렸으나 법안을 논의하지 않은 이유를 정확히 말해주는 의원실은 한 곳도 없었다. 보건복지위 소속 한 의원실 관계자는 “법안에 대해서는 인지하고 있지만 정확히 어떤 이유로 논의가 안 됐는지는 모른다”며 “의원실 별로 임기 내 처리하고 싶은 법안을 위원회에 전달한 경우가 있는 걸로 아니 그쪽에 알아보라”고 화살을 돌렸다.
이에 보건복지위에 문의했지만 “의원실로부터 그 법(수술실CCTV 설치법)에 대한 의견이 들어온 적은 없다”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었다.
결국 수술실CCTV 설치법은 소관 상임위인 보건복지위의 철저한 무관심 속에서 20대 국회가 막을 내린 29일을 기점으로 폐기됐다.
이와 관련해 수술실CCTV 설치법 공론화에 앞장서온 고 권대희씨 어머니 이나금씨(60·여)가 보건복지위 여당 간사인 기동민 의원실에 수차례 면담을 요청했으나 답을 듣지 못한 것으로 파악됐다. 이씨는 “몇차례 전화를 해서 의견을 전달하고 싶다고 했지만 답이 오지 않았다”며 “이미 유령수술과 공장식 수술이 여러 번 보고되고 우리 대희(2016년 사망)처럼 아까운 목숨들이 지고 있는데, 왜 국민 대표란 사람들이 논의조차 안 했는지 모르겠다”고 개탄했다.
신사역 인근 한 성형외과에서 공장식 수술로 아들을 잃은 이씨는 지난 2018년 겨울 수술실CCTV 입법을 촉구하며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진행했다. 이씨는 이밖에도 수술실CCTV 공론화에 앞장서 이 법에 ‘권대희법’이란 별칭이 붙기도 했다. <본지 2019년 5월 11일. ‘아들이 죽고 3년, 어미는 아직 싸운다 [김성호의 매직스피커]’ 참조>
■법안 발의자에 보건복지위 소속 의원 無
일각에선 법안 폐기가 예고된 수순이란 분석도 나온다. 수술실CCTV 설치법 대표발의자인 안규백 의원을 비롯해 공동발의한 의원 15명 전원이 보건복지위 소속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관 상임위 소속 의원 가운데 누구도 이름을 올리지 않은 법안을 주도해 이끈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어 처음부터 형식적인 발의가 아니었냐는 비판도 새어나온다.
이와 관련해 안 의원실에 발의 당시 보건복지위 소속 의원들에게 동의를 구했느냐고 문의하자 “당시 상황이 촉박했다”는 말과 함께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는 답이 돌아왔다.
보건복지위 소속 의원들이 이 법안에 소극적인 건 의사협회 등 관계 단체들이 적극 반대하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들은 법 발의 이후 국회에 ‘법이 통과돼 수술실에 CCTV가 설치되면 의사들이 의료행위에 소극적으로 나서 환자의 권리가 침해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취지의 반대입장을 전달한 바 있다.
다만 이재명 지사 주도로 도내 공공병원에 수술실CCTV를 도입한 경기도 사례는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약 1년 반 동안 공공병원 6곳에서 운영한 수술실CCTV 제도가 환자 및 보호자들에게 좋은 평가를 얻자 도는 지난 25일부터 수술실CCTV를 민간병원까지 확대하기 위한 공모절차에 돌입한 상태다.
경기도가 제도 운영에 앞서 만19세 이상 경기도민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선 ‘경기도의료원 수술실CCTV 설치·운영’에 91%, ‘수술실CCTV 민간병원 확대’에는 87%가 찬성의견을 냈다.
■경악 사건 속출에 '필요악' 주장 설득력
안 의원이 대표발의한 의료법 개정안은 의료기관 수술실 내에 CCTV를 설치해 환자가 동의할 경우 수술 등 의료행위가 이뤄지는 장면을 촬영하도록 강제한다.
이 법안은 수술 등 의료과정에서 사망한 피해 유족 등을 중심으로 필요성이 제기돼 왔다. 의료진 전체의 명예를 땅에 떨어뜨리는 부적절한 행위가 속출하며 입법요구가 들끓었으나 의사협회 등의 반발로 입법이 쉽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지부진하던 입법에 결정적 계기가 된 건 분당 차병원 신생아 사망 사건이었다. 지난해 경기도 성남시 분당 차병원에서 의료진 과실로 신생아가 사망한 사건으로, 의사들이 이를 조직적으로 은폐한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됐다.
앞서 지난 2016년 발생한 ‘권대희 사건’에서도 수술실CCTV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신사역 인근 한 성형외과에서 안면윤곽 수술을 받다 중태에 빠져 사망한 고 권대희씨 유족이 수술실CCTV를 분석해 의료진의 잘못을 고스란히 잡아낸 것이다.
당시 “수술을 끝까지 책임진다”던 집도의는 다른 수술을 위해 수술실을 나가고 사전에 고지되지 않은 20대 신입의사가 이를 이어받는 등 ‘공장식 수술’ 실태가 영상 속에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현재 진행 중인 형사공판에서 의료진은 과실마저 부인하고 있지만, 민사재판에서 80% 책임판결을 얻어낸 데는 이 CCTV의 존재가 결정적이었다.
이밖에도 지난해 서울아산병원 산부인과 인턴이 수술을 위해 마취된 환자를 성추행하고 엽기발언을 하는 등 수술실CCTV가 환자 인권보호를 위한 ‘필요악’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 역시 지난 3월 환자나 보호자의 동의가 있다면 수술장면을 CCTV로 촬영해야 한다고 결정하고, 이 의견을 국회에 전달한 바 있다.
단 한 차례 논의도 없이 법안이 폐기되도록 만든 20대 국회 보건복지위 소속 의원들의 태만에 비판의 시선이 쏟아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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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n@fnnews.com 김성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