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개처럼 다시 깨달은 사명… 오늘도 춤추는 예순의 발레리나
2020.06.22 18:10
수정 : 2020.06.22 18:10기사원문
요가 스튜디오 창문으로 빛이 비쳤다. 나는 매트 위에 조심스럽게 선 채로 중심을 잡으려고 애쓰며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집중하며. 차분하게. 그러나 인생에서 이보다 더 두려웠던 적은 없었다.
"다시 춤을 출 수 있을까?" 나는 물었다. '꽃의 왈츠' 때, 선두를 맡아 핫핑크 튀튀를 입고 턴을 하는데, 왼쪽 골반에서 뭔가 찌릿한 느낌이 있었다. 그 순간부터 매 동작이 고문이었다. 발끝으로 설 때는 이를 악물었다. 공연을 계속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 의심이 밀려왔다. "발레는 젊은 사람들이 하는 건데, 넌 예순이잖아."
나는 평생 발레리나로 살아왔다. 내가 다섯 살 때, 엄마가 말괄량이 소녀인 나를 여기 웨스트버지니아주 헌팅턴에 있는 클래스에 등록시켰다. 6년이 지나도록 나는 춤과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엔 헌팅턴의 한 발레단에서 춤추며 솔리스트가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후 뉴욕으로 이사를 가면서, 시간을 발레와 나의 또 다른 사랑인 연극을 위해 나누어 썼다. 나는 아메리칸 발레시어터와 뉴욕대 예술학부에서 공부하며, 그곳에서 여러 대가들의 가르침을 받았다. 55번가에서 스텔라 애들러의 연기 수업이 끝나면, 아메리칸 발레시어터에서 패트리샤 와일드의 댄스 수업을 듣기 위해 61번가까지 올라갔다. 학교를 떠나 가장 처음 가진 직업은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의 전국 순회 공연단 무용단원이 된 것이었다.
1970년대 초반의 뉴욕 생활은 스릴이 넘쳤다. 그러나 그 스릴은 갈채와 기립박수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발레리나를 괴롭히는 전형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종아리 근육 경련, 발가락 출혈, 좌골신경통도 생겼다. 고통은 수그러들지 않았고, 만성적이었다. 그러나 나는 밀고 나갔다.
발레를 무척 사랑했지만, 스물세 살이 되면서 발레슈즈를 벗기로 결심했다. 대부분의 친구들도 그때쯤 발레를 그만두었다. 나는 무대에서 나보다 훨씬 연장자인 사람을 보지 못했다. 발레는 마치 나도 한때 속했던, 젊은 사람들만의 열정 같았다. 고린도서에서 바울의 말처럼, 이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릴' 때였다.
20년 동안 뉴욕 아파트에 살고 나니, 영화제작자 겸 작가인 남편과 나는 우리집이 갖고 싶어졌다. 우리는 고향인 헌팅턴으로 돌아갔고, 그곳에서 나는 YMCA에 가입했다. 하루는 YMCA 체육관에서 엉덩이에서 다리 아래까지 쭉 퍼지는 어떤 긴장감을 느꼈다. 음악이 쾅쾅 요란하게 울렸다. 내 앞쪽의 텔레비전에서는 계속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런 모든 소음 중에서 어떤 속삭임을 들었다.
"나는 너를 다른 일을 위해 만들었단다, 데보라." 하나님의 목소리임을 알 수 있었다. '무슨 뜻이지?'하고 생각했다. 웨이트 트레이닝 기계를 쳐다봤다. 마음속에서 어떤 생각이 형태를 이루기 시작했다. 한때 기쁨에 뛰어오르고, 터닝을 하던 소녀의 이미지. 발레리나였다. 운동기계로 다가가 그것을 발레 바처럼 써서, 한 손으로 잡고, 한쪽 다리를 올렸다 펴보았다. 내 나이 마흔여덟이었다.
발레리나로의 복귀가 쉽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더 이상 발레슈즈와 옷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는 타이즈와 포인트 슈즈를 주문했다.
나는 헌팅턴에서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같은 반 동료들은 고등학생과 중학생이었다. 그들은 매우 유쾌했다. 선생님은 70대였다. 내가 '난 이걸 할 수 없어. 너무 늙었어'라고 변명이라도 한다면, 선생님은 나를 넌지시 쳐다볼 것이다. '어디 한번 해봐, 데보라'라고 말하듯이. 그의 춤은 나이가 발레에 장벽이 될 수 없음을 일깨워줬다.
선생님이 몸이 안 좋아 스튜디오를 잠시 닫아야 했을 때, 나는 찰스턴 발레단으로 수업을 옮겼다. 나 다음으로 나이가 많은 학생이 스물다섯 살이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춤에 온 힘을 쏟아부었다. 점프하고, 뛰어오르고, 회전하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신 목적이다!
어느날 예술감독이 나를 한쪽으로 데리고 갔다. "우리 무용단과 함께 일해 보시겠어요?" "무조건이요!" 나를 위해 춤추는 것도 좋았지만, 발레 공연을 다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설레었다.
물론 고통은 여전했다. 그러나 통증이 느껴질 때마다, 만성통증을 겪어냈을 또 다른 예술가를 기억했다.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르누아르는 말년에 관절염으로 거의 집에 갇혀 지냈다. 그러나 그는 계속 그림을 그렸다. 28년 후배인 화가 앙리 마티스가 그를 종종 방문했다.
"이런 극도의 고통 중에도 그림을 계속 그리는 이유가 뭡니까?" 마티스가 그에게 묻자 르누아르는 이렇게 대답했다. "고통은 지나가 버리지만, 아름다움은 영원하잖아."
이 말은 내가 기도처럼 외는 만트라(진언)가 되었다. 좌골통이 갑자기 심해지면, 폼롤러 위에서 몸을 부드럽게 흔들며 척추를 달래어 다시 정렬시켰다. 요가를 연습하며, 마음과 신경을 안정시키고 고통을 넘어서는 것에 집중하기 위해 호흡을 했다. 나는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고통은 지나가 버리지만, 아름다움은 영원히 남는다."
그러다 '호두까기 인형' 공연 중에 고관절이 틀어진 것이다. 이후로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폼롤러도, 스트레칭도, 요가 호흡법도. 나는 매트에 풀썩 쓰러져, 눈을 감고 항복했다.
"제가 춤추는 걸 그만두길 바라신다면, 주님, 제게 확실히 말씀해 주소서.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하겠다고 약속하겠습니다."
그때, 우레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춤!"
눈이 번쩍 뜨였다. 하나님께서 보신 나의 길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바로, 한 친구가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에 있는 정형외과 전문의와 연결시켜 주었다. 내 엑스레이를 보더니 의사는 내가 고관절에 연골이 정말 하나도 없이, 뼈만 붙은 상태로 춤을 춘 것이라고 말했다. 의사는 "고관절 치환술이 필요하다"고 했다.
수술 후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데 간호사가 내 방으로 들어오더니 말했다. "우리 이제 걸어 볼까요." 이제 깨어난지 겨우 한 시간 되었는데. "아, 아니요, 걸을 수 없어요." 그는 침대에서 나를 굴려서 보행기의 도움을 받아 일어설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했다.
한 걸음을 옮겼다. '아니, 이럴 수가!' 충격이었다. 통증이 없었다. 마냥 행복했다. 기운이 났다. 새로 생긴 고관절의 운동 범위는 믿을 수 없었다. 간호사는 웃다가 거의 넘어질 뻔했다.
"주님, 제가 갈 길을 확실히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순간 나는 발레리나로 돌아갈 것을 알았다. 그리고 불과 4개월 후, 순조로운 재활 기간을 거친 후, 나는 스완 레이크 무용단에서 백조 군무들과 빙그르르 회전하며 춤추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글·사진=가이드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