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더이상 슈퍼맨이 아니다.. 하지만 내곁엔 가족, 그리고 주님이 있다
2020.07.28 16:20
수정 : 2020.07.28 17:51기사원문
나는 플로리다주 셀레브레이션 외곽의 타운하우스에 혼자 살고 있었으며 삶에서 과거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16개월 전인 2006년 6월, 다발성경화증이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모든 게 무너져 내렸다. 매일 육체적인 도움이 필요했다. 더 이상은 어떤 의미로 보나 굳건한 슈퍼맨이 아니었다. 텔레비전 프로듀서로서 일할 수도 없었다. 다발성경화증이 매일 불러일으키는 통증과 피로 때문에 고된 제작일정을 쫓아갈 수 없었다. 수입과 지출의 균형을 맞춰 보려고 주식에 손을 댔지만 예전처럼 가족을 부양할 수 없었다. 다발성경화증 때문에 다리까지 절었다. 굴욕적이었다.
집을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출근하지 않았다. 친구를 만나지 않았다. 오랫동안 습관적으로 1주일에 6일씩 나가던 체육관에도 가지 않았다. 자수성가한 백만장자에서 우울하고 아픈 은둔자로 전락했다. 거기 누워서 천장을 응시했다. "하나님, 제 인생은 끝났나요? 정말 그런가요?"
길을 잃은 사람들과 피폐해진 이들에게 방향을 일러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몸소 겪어서 잘 알고 있었다. 1960~1970년대 브롱크스와 퀸스에서 성장기를 보낸 나는 노상 싸움질을 일삼았다. 처음에는 거리에서 그랬지만 나중에는 아마추어 권투 선수가 되었다. 분노가 가득했고, 언제나 싸움을 걸 준비가 돼 있었다.
열여섯 살에 여자친구가 성경공부 모임에 데려가면서부터 점차 명료하게 깨달았다. "다른 길이 있느니라"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성난 반항아에서 진지한 보디빌더와 체육관을 운영하는 사업가로 변신할 때까지 내 삶을 기꺼이 주님께 맡기지는 않았다.
운동은 내 삶의 양식이 되었다. 마치 기도처럼 운동 덕분에 집중하게 되었다. 텔레비전과 영화 제작으로 변화를 꾀하고 싶었을 때 다시 주님께 의지했다. 열심히 일하고 일류 스포츠 엔터테인먼트 마케팅 회사와 계약을 했다. 그러고 나서는 폭스스포츠와 스포츠 리얼리티 프로그램 2편을 계약했다. 47세가 되었을 무렵, 내가 일궈온 삶이 자랑스러웠다. 세 아이와 빛나는 커리어가 있었다. 건강 상태도 훌륭했다. 청년부 목사로 시간을 보내며 하나님을 찬송했지만, 자존감도 물론 컸다.
2006년 3월의 어느 날, 체육관에서 삼두근 운동의 하나로 케이블 프레스 다운을 하는데 왼쪽 어깨에서 날카롭고 타는 듯한 통증이 폭발했다. '분명 신경이 조여들었겠지'라고 생각했다. 통증은 왼팔과 손가락까지 퍼졌다. 심근경색일 수도 있을까? 그 생각은 마음 한구석에 밀쳐 두었다. 슈퍼맨은 심근경색에 걸리지 않으니까. 하나님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부탁드리고 계속 운동했다. 그 후 몇 달 동안 통증은 두 다리로 번졌는데 마비와 쇠약을 동반했다. 증상을 무시하려고 애썼다. 하루는 막내가 날 수영장 밖으로 끌어내야 했는데, 혼자서는 다리를 들어올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진료받아야 하는지도 몰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타이밍이 더 이상 나쁠 수 없었다. 중요한 캘리포니아 출장이 이미 계획돼 있었다. 의사를 만날 시간이 없었다. 회의가 쉬지 않고 이어졌으며 렌터카를 타고 내리며 내 아이디어를 거듭 홍보했다. 로스앤젤레스 출장 중에도 버티기 힘들었다. 플로리다에 있는 집으로 돌아와서 마침내 현실을 직시했다. 의사와 진료 약속을 잡았다.
의사는 날 자세히 살펴보고 증상을 귀기울여 들었다.
"머리 부상을 입은 적이 있으세요?"
"언제나 싸움꾼이었어요. 링 안에서도, 밖에서도 그랬죠."
의사는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결국 그게 문제가 된 것 같네요."
MRI 촬영일정을 잡았다. 결과가 나오자 의사가 전화로 일러주었다.
"당장 병원으로 가세요."
MRI가 내 뇌의 병변을 보여주었다. 신경과 정밀검사를 빠짐없이 받으려고 입원했다. MRI를 더 찍고 요추 천자(척추 아랫부분에 바늘을 꽂아 골수를 뽑아내는 것)를 했다. 보살핌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싫었고, 환자 취급 당하는 것을 거부했다. 소변줄을 삽입하느니 몸을 끌고 화장실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극심한 공포가 모습을 드러낸 건 그날 밤늦도록 병실에 혼자 있을 때였다.
"하나님, 왜죠?"
기도했다.
"왜 그렇죠? 당신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입원 4일째, 신경과 의사가 검사 결과를 가지고 병실로 왔다.
"제가 보는 바로는 다발성경화증의 모든 증상을 갖고 계시네요."
다발성경화증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신경과 의사는 염증질환이라고 설명했다. 뇌와 척수의 신경세포를 둘러싼 미엘린초(신경을 둘러싼 보호막)가 손상돼 뇌와 신체 사이의 소통을 방해했다. 치료법은 없었다. 통증과 피로는 더 심해질 터였다. 병이 진행될수록 간병인이 필요했다. 매일 나를 도와주는 타인에게 의존해야 했다.
충격을 받았다. 내가 이루려고 애쓰던 삶,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신다고 생각하던 삶은 어떻게 되는 거지?
진단을 받고 거의 1년 반 동안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려고 기도했다. 하지만 내가 알던 일과 삶은 포기해야 했다. 정기적으로 만나는 유일한 이는 내 아이들뿐이었다. 근육이나 힘과 마찬가지로 삶도 쪼그라들었다. 이제 여기 타운하우스에 홀로 남아 침대에 누워 천장을 응시했다. 이렇게 기운 없고 취약하다고 느낀 적이 없는데. "하나님, 제가 뭘 해야 하죠?"라고 애원했다. 마음속으로 그분의 말씀이 들렸다.
"데이비드, 난 널 투사로 만들었느니라. 네가 아는 바로 되돌아가거라."
다음 날 아침 일찍, 억지로 집을 나서 셀레브레이션에 있는 피트니스센터 문을 통과했다. 예전에 운동하던 과격한 체육관과는 다른 종류였다. 아는 사람이 날 보는 건 원하지 않았다. 두려웠다. 진단 후에는 몸을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운동 1회도 제대로 못해 내면 어쩌지? 내 체중을 견디지 못하고 넘어지면 어쩌지? 가볍게 시작하는 게 최선이었다. 두 팔을 옆구리에 붙이고 양손에 2.3㎏의 덤벨을 들었다. 아주 천천히 어깨 쪽으로 들어올렸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뒷걸음쳤다. 이두근이 너무 왜소했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계속 싸워야 해. 네가 아는 바로 돌아가야 해"라고 혼잣말했다. 이틀에 한 번, 아침 일찍 피트니스센터에 갔다. 늘 혼자였다. 어느 아침에 타운하우스 문간에서 노크 소리를 들을 때까지는 그랬다.
"운동할 준비 됐어?"
친구 존이었다. 내가 혼자 운동한다는 소문을 듣고 자기 체육관으로 날 데려가고 싶어했다. 가고 싶지도, 난처해지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존은 크고 건장한 사내였다. 원한다면 날 들어서 차에 태울 수 있었다. 체육관 매니저 대런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런과 존은 내가 확실히 지속할 수 있도록 운동계획을 세웠다. 수년간 내 체육관을 책임지고 운영했는데, 마치 초보자처럼 두 사람을 따라서 그들이 날 가르치게 내버려 두었다.
"넌 할 수 있어. 넌 보디빌더에 싸움꾼이고 앞으로도 언제나 그럴 거야.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운동하면 병을 이겨낼 수 있어."
내가 고군분투할 때마다 존이 말해주었다.
자존심, 최고와 최강이 되고 싶은 소망은 단념해야 할 때가 됐다. 그저 그날 운동을 해내고 회복하는 일이 필요했다. 어떤 운동은 다른 것보다 나았지만, 꾸준히 훈련했다. 운동 덕분에 체력, 신체 기능, 가동성을 되찾았다. 2년 후에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제작으로 복귀했다. 멋지고 독실한 켄드라라는 여성도 만났는데 지금은 내 아내가 되었다. 켄드라는 다발성경화증 환자를 돌보는 간호사로서 병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진행한다는 걸 알았지만, 그럼에도 내 삶의 동반자가 되기로 결정했다. 우리 결혼이야말로 주님께서 내게 주실 수 있는 가장 큰 은총이었다. 아내는 나의 바탕이 되어 주며 날 겸손하게 하고 내가 세상에 긍정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키게 하는 하나님의 방식이 다발성경화증이었음을 이해하게 한다. 진단을 받고 3년이 흐른 쉰 살에는 주(洲) 보디빌딩 대회에 출전해서 '가장 고무적인 보디빌더' 상을 받았다.
2012년에는 아내와 함께 비영리재단 '다발성경화증 피트니스 챌린지'를 설립해 꾸준히 몸을 움직이고 싶어하는 환자를 돕고, 트레이너들에게 다발성경화증 환자들과 운동하는 법을 교육하고 있다. 우리 자선단체는 25개국 이상으로 확장했다.
다발성경화증과 함께 살아가면서 이 모든 걸 해내기는 어렵다. 어떤 날은 무척 피곤해서 체육관에서 거의 기어 나와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슈퍼맨이 아니라는 걸 알고, 그럴 필요도 없다는 걸 안다. 친구와 가족 그리고 누구보다도 주님께 의지할 수 있다. 그분께서는 내가 팔에 문신으로 새긴 디모데후서 4장 17절 말씀("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처럼 내 곁에 서서 내게 힘을 주신다.
'가이드포스트(Guideposts)'는 1945년 노먼 빈센트 필 박사에 의해 미국에서 창간된 교양잡지로, 한국판은 1965년 국내 최초 영한대역 잡지로 발간되어 현재까지 오랜 시간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오고 있습니다. 가이드포스트는 실패와 좌절을 딛고 다시 일어선 사람들, 어려움 속에서 꿈을 키워가며 끊임없이 도전하는 사람들의 감동과 희망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런 감동의 이야기를 많은 분들의 후원을 통해 군부대, 경찰, 교정시설, 복지시설, 대안학교 등 각계의 소외된 계층에 전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후원을 통해 더 많은 이웃에게 희망과 감동의 메시지가 전달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글·사진=가이드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