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질라), 괴수영화 시대의 종말을 고하다

      2020.08.22 14:20   수정 : 2020.08.22 14:33기사원문
[파이낸셜뉴스] 괴수영화의 시대는 갔다.

전세계적 성공을 거둔 괴수영화의 원조 <킹콩>시리즈와 <퀸 콩>, <킹콩 대 고지라>, <성성왕> 등 온갖 아류작들이 영화판을 호령하던 시대로부터 이미 반 세기가 흘렀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쥬라기 공원>시리즈가 괴수영화의 르네상스를 이룩하기까지 아주 오랫동안 괴수영화는 '한 때 잘 나갔던' 잊혀진 장르였다.



르네상스라고 해도 살인고릴라를 소재로 한 <콩고>나 거대고릴라를 내세운 <마이티 조 영>처럼 드문드문 제작되었을 뿐 과거의 명성을 되찾을 만큼의 성공을 거둔 작품은 찾기 힘들었다.

영화기술의 발달에 따라 크기를 키우지 않고도 스릴있는 영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해지자 괴수물의 설 자리는 빠르게 사라졌다.
괴수의 몸집을 키우는 대신 이야기의 경계를 허문 판타지 블록버스터가 제작됐고 화려한 액션과 빠른 전개의 영웅물이 빈 자리를 채워나갔다. 오직 과거의 향수에 젖은 사람들만이 <킹콩>과 <고지라>의 시대를 추억했다.

그러나 롤랜드 에머리히가 할리우드 스타일로 <고질라>를 찍어내고 피터 잭슨이 성공적으로 <킹콩>을 부활시키자 상황은 조금쯤 바뀐 듯 보였다. 괴수의 몸집만큼 존재감 있는 영화는 아니었으나 잊혀진 장르를 복원하고 새 시대의 괴수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존중받아 마땅한 업적이었다.


30번째 <고질라>, 달라진 건 크기뿐

가렛 에드워즈의 <고질라>는 이 연장선상에서 제작된 작품이다. 롤랜드 에머리히의 <고질라>로부터 리부트를 선언하며 새 시대의 괴수영화가 되겠다는 야심을 보였으나 실상은 바로 그 <고질라>가 만들어 놓은 토양에 뿌리를 내린 두 얼굴의 영화.

할리우드 작가시스템 아래에서 드라마를 강화한 롤랜드 에머리히의 선택을 거부했고, 영상의 혁신으로 승부하고자 했던 피터 잭슨의 선택도 따르지 않았던 이 고집스런 영화의 승부수란 오직 괴수의 '크기'였다. 하지만 기존의 괴수영화들과 오로지 괴수의 크기에서만 차별화하려 했던 이 영화의 선택은 우직함이 아니라 멍청했다.

방사능을 먹이로 삼는 거대 괴물 무토가 깨어나 먹이를 찾으러 아메리카 대륙으로 향하자 무토를 먹이로 삼는 고질라가 그 뒤를 쫒아 괴수끼리의 일대 접전을 벌인다는 것이 영화의 기본적인 얼개다. 호놀룰루, 라스베이거스, 샌프란시스코 등 미국의 대도시들이 괴수의 출몰로 초토화되고 그 속에서 인간은 그저 무력할 뿐이다.

영화 속 고질라는 괴수라기보다는 오히려 지구를 지키는 절대적 존재처럼 묘사된다. 그리고 그가 처단하는 또 다른 괴수 무토는 인간이 생산한 방사능 물질을 먹고 살아가는 처단되어야 마땅한 괴수로 그려진다.

현대 문명이 낳은 가장 큰 위험 가운데 하나인 방사능 문제를 무토라는 괴수에게 투영하고 인류에 의해 병들고 자정작용을 잃어가는 지구의 모습을 무토에게 공격받는 고질라를 통해 보여주려 한 듯도 싶지만, 작가의 의도는 너무나 깊고 영화의 만듦새는 지나치게 조악해 무엇하나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다.


조악한 구성과 민망한 만듦새

할리우드 재난영화에서 수도 없이 보아왔던 무력하게 파괴되는 문명의 모습, 그 속에서 발견되는 가족주의와 인간애 따위의 설정은 너무나도 식상한 나머지 불편하게까지 느껴진다. 캐릭터들은 그 속에서 쉬이 낭비될 뿐이다.

와타나베 켄이 연기한 세리자와 박사는 15년 간의 연구에도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한 그저 무능한 공무원이고 초반부에 죽음을 맞이하는 줄리엣 비노쉬는 어처구니없게도 아무 역할이 없는 한 명의 희생자일 뿐이다. 그나마 비중이 있었던 주인공과 그의 아내는 가족의 소중함이란 당위적인 교훈 말고는 어떠한 새로움도 보여주지 못했다.

상황이 이쯤 되면 조잡한 만듦새가 눈에 밟히기 시작한다. 곰과 사마귀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 너무도 잘 드러나는 고질라와 무토의 생김부터, 그들의 조잡한 전투씬까지 모든 것이 엉성하게만 느껴진다. 수많은 원자력 발전소를 놔두고 굳이 핵미사일을 물고 와서 벌이는 무토의 짝짓기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다. 이 장면은 짝짓기 직전에 암컷에게 먹이을 바치는 사마귀의 모습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흔적이 역력한데 너무나 촌스러운 나머지 영상을 마주하기가 부끄러울 지경이다.


괴수영화임에도 괴수의 모습이 충분히 비춰지지 않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선택이다. <에이리언>시리즈나 <클로버필드>와 같이 괴수의 노출을 최소화시켜 긴장감을 극대화하기 위한 의도라기보다는 그저 CG비용을 적게 하려는 꼼수처럼 느껴질 만큼 연출의 의도가 명확히 드러나지 못했다.

주인공이 EOD 대위임에도 그가 폭발물을 의미심장하게 다루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 것도 실망스럽다.
폭탄제거 설정이 나올 것 같다가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이 영화가 흔한 할리우드 액션영화와 재난영화, 그리고 일본 괴수물의 어중간한 접점에 서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차라리 장르적 특성에 충실했던 롤랜드 에머리히의 <고질라>가 훨씬 더 나은 작품이 아니었을까?

무토는 언제부터 전자기펄스(EMP)를 쐈고 고질라는 어째서 필살기를 아꼈을까? 어마어마한 덩치에 어마어마한 강도의 피부를 가진 고질라가 무너지는 건물 더미에 눌려 힘없이 쓰러지는 순간은 당혹을 넘어 실소를 자아낸다.
대체 누가 있어 이로부터 만족할 수 있을 것인가?

일일이 언급하기조차 민망할 만큼 부족한 부분이 많았던 <고질라>는 개봉 당시 70만 관객을 모았다.

pen@fnnews.com 김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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