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박스오피스 1위, 태국인이 봤다면 어땠을까

      2020.08.29 11:00   수정 : 2021.03.29 21:29기사원문
[파이낸셜뉴스] 사람 사는 세상은 모두 같다. 내가 싫은 것은 남도 싫고, 내가 좋은 것은 남도 좋게 마련이다. 예외가 없을 수는 없겠지만 대개는 그렇다.

그래서 공자는 자공에게 '기소불욕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이라 가르쳤다. "자신이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는 뜻이다.


공자뿐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산상수훈에서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하였다. 나를 비추어 남을 대하는 것은 동양과 서양을 가로질러 인간사의 기본이란 말이 되겠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우리 한국인은 자신에 대한 관심 하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들이다. 해외에서 누가 왔다 하면 "두 유 노(Do you know) 000"하는 질문이 빠지지 않는 것도 그래서다. 대개 000 자리엔 박지성과 김연아, 손흥민, 봉준호 같은 이들이 자리하는데, 가끔은 김치나 불고기 같은 음식이 대신하기도 한다. 누구는 이것을 오랜 기간 주류에서 소외된 문화적 열등감의 발로라고도 하지만, 그보다는 존중받고 싶은 인간의 본성이라 보는 게 옳은 자세일 것이다.


'김치냄새' 한 마디에 분개했던 나라가 있었다

누군가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큰 만큼 무시 받거나 비하되면 발끈하게 되는 것도 인지상정이다.

2015년 <버드맨> 개봉을 앞두고 벌어진 일이다. 당시 한국에선 이 영화가 김치를 부정적으로 묘사해 한국과 한국인을 비하했다는 이야기가 퍼져나가며 반대여론이 크게 일었다. 영화가 한국에서 개봉하기 전부터 <버드맨>과 김치에 대한 기사가 수백 편이나 쏟아졌을 만큼 비상한 관심이 모였다. 개봉도 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정확한 사실을 아는 이가 거의 없었음에도 그랬다.

5년이 흐른 지금, <버드맨>을 한국을 비하한 영화로 기억하는 이는 거의 없다. 영화 도입부에서 엠마 스톤이 연기한 샘이 동양인이 운영하는 꽃집에서 "온통 OOO 김치냄새야(It all smells like fucking kimchi)"라고 말한 대목이 문제가 됐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영화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국은 늘 바깥의 시선에 민감했다. 그렇지만 피해자이기만 했던 것도 아니다. 국민 대다수가 '역지사지'란 말을 알고 있는 나라치고는 믿기지 않는 둔감함으로 다른 나라와 문화를 비하하고 조롱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개중 몇은 만약 한국이 미국이나 유럽에서 이렇게 묘사됐다면 결코 가만히 있진 않았으리라 여겨졌을 만큼 심한 경우까지 있다.

이달 개봉해 박스오피스 1위를 달리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도 그런 영화다. 내가 싫은 것을 남에게 하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줄 모른다. 새로운 잘못이 아니란 점에서 습관의 문제이고, 알면서 바로잡지 않았다는 점에선 태도의 문제다. 악덕은 많은 경우 습관과 태도에서 비롯된다.


경찰은 부패, 악당은 호구, 시민은 가난?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태국에서 한인을 상대로 한 납치사건이 발생해 여자가 숨지고 그녀의 딸이 행방불명된다. 알고 보니 이 여자는 청부살인업자 인남(황정민 분)의 옛 사랑으로, 사라진 딸도 인남의 아이다. 인남은 태국으로 가 사라진 딸의 행방을 쫓기 시작한다.

그 인남을 쫓는 사람이 하나 있다. 인남이 살해한 야쿠자 보스의 동생 레이(이정재 분)다. 레이는 오직 복수를 목적으로 홀로 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레이는 인남과 관련된 이를 만나는 족족 참혹하게 살해한다.

영화는 태국에서 벌어지는 이중 추격전이다. 인남은 어린 딸의 행방을 추적하고 레이는 그런 인남을 쫓는다. 인남의 딸이 태국 거대 범죄조직에 납치돼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쫓고 쫓기는 한 판 액션극이 스크린을 가득 메운다.

문제는 이 영화가 태국인의 시선으로 보면 불편함을 넘어 불쾌한 것으로 가득하다는 점에 있다. 대낮에 어린 아이가 납치되고 그를 구하러 갔던 어머니는 참혹하게 살해된다. 경찰은 무능을 넘어 범죄조직에 머리를 조아리는 부패한 조직이다.


태국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도 없다

영화 속에서 태국인은 추격전 사이에 배경으로 등장해 비명을 지르는 시민이거나 범죄에 가담해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치는 악당이거나 둘 중 하나다. 시민은 가난하고 악당은 비열한데, 인남과 레이가 나타나며 상황은 더욱 심각해진다. 범죄조직과 시민, 공권력 모두가 인남과 레이 앞에서 무력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맨몸으로 건너온 인남과 레이, 단 두 명에게 태국 일류 범죄조직과 경찰이 파탄나다시피 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것만 수십 명에 이르는 조직원이 일방적으로 압살당하며 현장에 출동한 경찰특공대조차 레이 한 명에게 초토화된다.

통상 누아르와 액션영화에서 악당에게 부여되는 최소한의 미덕조차 태국인에겐 허용되지 않는다. 형의 복수와 옛 여자에 대한 애정으로 태국까지 쫓아온 레이와 인남에겐 그래도 미덕이란 게 남아있다.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현지 정보원과 조력자 유이(박정민 분)도 의리가 있다. 오직 한국인과 일본인만 그렇다.

영화가 여러모로 참고한 흔적이 역력한 다른 작품도 비슷한 비판을 받은 바 있다. 특히 납치당한 딸을 구하는 전직 특수요원의 이야기 <테이큰>은 할리우드 배우가 프랑스의 인신매매조직을 홀로 일망타진하는 내용으로, 일부 묘사가 부적절했다는 평가가 있었다. 만약 뤽 베송 등 프랑스 제작진이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면 이와 관련된 논란이 더욱 크게 일어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미국이나 유럽이었다면 이렇게 찍을 수 있었을까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는 <테이큰>과 같은 안전장치도 없다. 한국 자본으로 한국인 제작진이 전면에 나섰다. <테이큰>도 알바니아계 마피아를 악당으로 설정하고 프랑스 전반에 대한 묘사는 도를 넘지 않았는데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는 다른 나라를 묘사하는 최소한의 선조차 설정하지 않은 듯 막무가내로 달려간다.

말 그대로 '역지사지'해보자. 할리우드 제작진이 서울을 배경으로 이와 같은 영화를 찍는다면 어느 관객이 이를 곱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불과 5년 전 한인이 운영하는 미국 꽃집을 향해 "김치냄새가 난다"던 대사 한 줄에 분개했던 게 한국 관객들이다. 그 대사를 뱉은 인물은 재활원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알코올중독자였고 영화 전체에서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다른 부정적인 묘사가 전혀 없었는데도 그랬다.

묻고 싶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의 제작진이 미국 뉴욕이나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도 비슷한 영화를 찍을 수 있었을까. 할리우드 영화에선 얼마든지 부패경찰과 조직폭력배가 등장하니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이다. 인남과 레이가 뉴욕과 런던, 파리 같은 도시에서 경찰과 범죄조직을 상대로 활개치는 영화를 찍을 수 있었을까.

내가 당하기 싫은 것을 남을 상대로 하는 것도, 강자를 상대로 하지 못할 것을 약자를 상대로 하는 것도 모두 악덕이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는 창작자가 결코 무시해선 안 될 악덕으로 가득한 작품이다. 부디 이들을 악에서 구하소서.

pen@fnnews.com 김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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