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카명의 벤츠로 꼼수 임대주택 사는 부자들

      2020.10.13 18:18   수정 : 2020.10.13 18:56기사원문

"여기 외제차 많지. 다 다른 사람 명의로 해놨으니 쫓겨나지 않는 거지."

13일 서울 노원구 중계동의 한 영구임대 아파트 단지에서 만난 입주민 김보영씨(72·가명)는 주차장에 세워진 고급 수입차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2년 전 임대주택 입주가 결정된 김씨는 이곳에 들어오면서 보유하던 경차를 팔았다. 거동이 불편한 아내가 있어서 차가 꼭 필요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차를 팔아야 입주조건이 충족됐기 때문이다. 월 임대료가 평균 6만원인 영구임대 아파트는 자산 2억원 및 차량가격 2500만원 미만이어야 거주자격이 된다. 김씨는 경차를 포함하면 자산 2억원을 초과하는 상황이었다. 김씨는 "나는 우리 마누라가 아픈데도 경차를 팔아버리고 온 사람"이라면서 쥐고 있던 담배를 입에 물었다. 주거권을 위해 이동권을 포기한 셈이다.


사회적 약자 아파트에 고급 수입차


이날 방문한 중계주공9단지 주차장에는 고가의 차들이 곳곳에 보였다. 메르세데스벤츠 2대, 아우디 4대, 폭스바겐 1대 등 고가 아파트에서나 볼 법한 수입차들이 즐비했다. 이들 차량 주변에 있는 거동이 불편한 주민을 돕기 위한 장애인콜택시, 가사·목욕도움 차량들이 대조를 보였다. 다른 영구임대 단지인 월계주공1단지에서는 폭스바겐 파사트 TSI(2018년 출고가 3613만원), 메르세데스벤츠 C220 CDI 아방가르드(2013년 출고가 5300만원) 등이 눈에 띄었다. 인근 월계사슴1단지 영구임대 아파트 주차장에는 한때 차값이 1억원을 넘었던 에쿠스 VS380(2014년 최대 출고가 1억503만원)도 목격됐다.

이곳에서 노모와 30년을 살았다는 입주민 A씨는 차량가액이 5520만원인 메르세데스벤츠 CLA250 4Matic을 보유하고 있었다. 불과 8개월 전인 올 2월에 출시된 신차다. 그에게 차량을 구입한 경위를 묻자 "지난 4월에 조카가 준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내 명의가 아닌데 뭐가 문제냐"며 "나만 외제차 끌고 다니는 거 아니다"라면서 황급히 자리를 떴다.

또 다른 영구임대 아파트인 가양4단지에서 만난 한 입주민도 A씨와 같은 종류의 차량을 몰았다. 그는 "리스차량인데 절차도 복잡하고 이것저것 내라는 것도 많아서 단지에 등록하지 않고 방문차량처럼 그냥 이용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이런 행태는 영구임대 입주민 사이에서 공공연한 비밀이다. 한 영구임대 단지는 입주민 명의로 된 차량이 한 대도 없었지만 고가의 차량은 물론 한 사람이 차를 세 대씩 보유한 경우도 있었다. 가양동 임대아파트 한 입주민은 "입주민 중에는 분가한 중산층 자식들이 있는데도 계속 거주하는 경우도 많다"며 "명절엔 주차장에 외제차가 60~70대도 넘는다"고 전했다. 그는 "영구임대 아파트는 우리처럼 오갈 데 없고 정말 어려운 사람들이 와서 사는 곳 아니냐"고 반문했다.

가짜 서민에 실수요자 기회 박탈


영구임대 아파트 관리사무소들도 미등록 고급차 때문에 골치를 썩고 있다. 노원구 임대단지에서 근무하는 경비원 박모씨는 "(고가 차량 소유주가) 어떻게 (입주민으로) 들어왔는지 모르겠다"면서 "그런 차들 중엔 관리실에 신고가 안 된 차도 있는데, 딱지를 붙여봤자 제대로 처벌이 안되니 소용이 없다"며 씁쓸해했다.

고가 차량 소유자 같은 '가짜서민'들이 입주기회를 가로채면서 기초생활수급자 등 영구임대 실수요자들의 박탈감은 커질 수밖에 없다. 진미윤 토지주택연구원 박사는 "무자격인 사람들이 안 나가고 버티니까 정말 필요한 사람들이 몇 년씩 기다려도 못 들어오고 있다"고 지적했다.
LH에 따르면 올해 6월 말 기준 전국 영구임대주택 대기자 수는 2만3177명에 달한다. 최근 1년간 영구임대 계약자들의 평균 대기기간은 9.6개월이다.


이런 가운데 박상혁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자동차가액 기준을 초과해 영구임대주택에서 퇴거조치를 받은 건수는 2018년 6건, 지난해 11건에 불과하다.

psy@fnnews.com 박소연 기자 , 조윤진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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