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 임산부에 신발 벗어줘… ‘울산의 기적’ 이끈 이웃사랑
2020.10.14 11:50
수정 : 2020.10.14 18:55기사원문
맨발로 대피한 임신부에 신발 벗어줘
울산지역 한 인터넷 카페에 지난 12일 '선행해주신 분을 찾습니다'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화재 피해 이재민의 지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의 글이었다.
"지인이 화재 당시 너무 놀라 갓난아기만 안고 얇은 잠옷 바람에 맨발로 뛰쳐나왔다"면서 "아이를 구급차에 태워 보내고 기다리던 중, 지인에게 코트와 신발을 주고 가신 분이 계시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면서 글쓴이는 "당시 지인이 정신없고 놀란 탓에 여자분이라는 것만 기억했다"면서 "꼭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고 싶어한다. 본인이거나 아시는 분이 계시면 꼭 쪽지 부탁드린다"고 글을 남겼다.
울산에서는 이처럼 지난 8일 발생한 울산 삼환아르누보 주상복합아파트 대형 화재현장에서 있었던 미담이 줄을 잇고 있다.
28~33층서 18명 구한 구창식씨 가족
14일 피해 이재민과 울산시소방본부 등에 따르면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일화는 28층~33층에서 주민 18명의 구조와 탈출을 도운 구창식(51)씨 가족의 활약이다. 전날 정세균 국무총리가 직접 전화를 걸어 감사의 뜻을 전했을 정도다.
28층에 거주하는 구씨는 부인과 아들 식구 3명과 함께 겨우 집밖으로 나와 테라스에 설치된 피난대피소에 몸을 피했지만 그 때 29층에서 갓난아이와 함께 구조를 요청하는 임신부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이들 가족은 망설임 없이 되돌아섰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온 힘을 다해 창틀을 부순 뒤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어 창으로 뛰어내린 아이를 받아내는 등 구조는 30층에 다다를 때까지 계속됐다. 마지막에는 33층 창틀에 붙어 겨우 숨만 쉬고 있던 일가족 3명을 발견하고 소방관들에게 긴급구조를 요청하기도 했다. 주민구조에 나선 지 3시간이 흘러서야 구씨의 가족은 1층으로 내려왔다. 그제야 자신들의 몸에 난 상처를 확인하고 물 한 모금을 마실 수 있었다.
갓난아이 안고 22층 계단 2분 만에
한 명도 희생자를 낼 수 없다는 사명감으로 불길 속에서 활약을 펼친 소방관들에게도 찬사가 이어지고 있다. 울산남부소방서 119구조대 이형우 팀장과 김근환 대원은 9일 새벽 주민 대피를 시키던 중 22층 계단에서 기진맥진해 있는 엄마 품에 안겨있던 갓난아기를 발견했다. 아이는 연기를 계속 마셔 위급한 상태였다. 김 대원은 아이를 받아 안고 그대로 뛰기 시작했다. 20kg 넘는 산소통과 구조, 진화장비가 등에 매달려 있었지만 2분 만에 건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주민들은 위기 상황에서 시민을 구하는 영화 '어벤져스'의 영웅을 눈앞에서 보는 듯 했다고 말했다.
이번 화재에 투입된 소방관들은 약 900명이며 이들을 통해 1명의 희생자 없이 77명을 구조하는 데 성공했다. 피해는 연기흡입과 찰과상 등 경상자 93명에 그쳤다. 진화가 끝나고 울산남부소방서에는 시민들 응원메시지와 격려품이 잇따랐다. 한 5학년 초등학생은 손 편지를 통해 "제가 대통령이면 소방관 월급을 1억씩 주고 싶다"며 "다치지 마시고 건강에게 울산을 지켜달라"고 아이다운 솔직함을 전달했다.
외제차 매장 소방관 휴식처로 제공
울산 화재에서는 시민이 모두 한마음으로 구조와 구호 활동에 힘을 보탰다.
화재가 발생한 울산 남구 신정동 삼환 아르누보 주상복합 바로 옆 메르세데스 벤츠 전시장은 밤새 진화작업과 구조에 지친 소방관들을 위해 소방관들의 휴식처와 현장 지휘소로 변신했다.
벤츠 딜러사인 스타자동차 유재진 회장의 지시였다. 유 회장은 소방관들에게 300인분의 국밥 등 음식도 제공했다. 화재 현장 주변의 호프집도, 식당도 소방관들에게 쉴 수 있는 공간과 함께 음료와 식사를 대접했다.
시민들로 구성된 남부소방서 의용소방대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다. 화재 발생 1시간만에 현장에 도착한 45명의 대원들은 주민대피, 차량통제 등의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했다. 밤샘 후 다음날에는 소방관들의 식사와 간식까지 챙기며 혼신의 봉사활동을 펼쳤다.
ulsan@fnnews.com 최수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