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희를 응원한다
2020.11.05 18:05
수정 : 2020.11.05 18:05기사원문
예측 가능한 범위에서 보자. 우선 오는 9일 예정된 WTO 특별일반이사회에서 컨센서스(전원합의) 부결이다. 미국이 끝까지 '명백하게' 반대(비토권)하면 지금 유명희가 사퇴한다 해도 응고지가 사무총장이 될 수 없다. 미국 정권교체 전까지 WTO 사무총장 부재가 장기화할 가능성이 크다. 이 과정에서 유명희에 대한 지지든 반대든 회원국들은 입장을 바꿀 수 있다.
유명희의 역전은 가능할까. 확실한 것은 '트럼프의 미국'이 유명희를 지지한 것이다. 설령 패했다 해도 트럼프 정부는 내년 1월 20일(취임식)까지 존속된다. 3+3년, 또는 2+2년 임기로 유명희와 응고지가 사무총장을 나눠 맡는 방안도 있긴 하다. 1999년(뉴질랜드, 태국 후보가 각 3년씩 사무총장 임기) 선례가 있어서다. 문제는 지금의 국제질서가 20년 전과는 딴판이라는 점이다. 그때 중국은 WTO 회원국(2001년 가입)이 아니었다. 회원국 투표 얘기도 있는데, 이럴 경우 미국(유명희)의 패배는 확실하다. 미국이 동의할 이유가 없다.
트럼프의 미국은 유명희를 지지하면서 "기본적인 투명성 의무를 지키는 회원국이 너무 적다"고 했다. 중국을 겨냥한 비판이다. 이를 두고 WTO 사무총장이 미(유명희)·중(응고지) 대리전이라는 말도 나온다. 바이든 정부는 동맹 우선, 다자무역체계 복귀로 트럼프와 다른 노선이 예상된다. 유명희는 WTO 다자무역 정상화와 균형을 공약했다. 그렇다고 바이든의 미국도 유명희를 지지할지는 불확실하다. WTO 사무총장 선거에 정통한 한 관료는 "우리가 카드를 꺼내서 될 선을 넘었다. 미국의 선택에 달렸다"고 했다. 유명희의 '명예로운 사퇴'조차 어려운 이유다.
승패를 떠나 유명희의 4개월간의 도전은 값진 일이다. 불리한 국제질서 속에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유명희 하면 "강단이 세다"는 수식어가 따른다.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 때다. 본협상에 앞서 2017년 12월 농민단체들이 참석한 공청회장. FTA 개정을 반대하는 농민들의 시위로 현장 분위기는 험악했다. 당시 유명희는 정부 대표(통상정책국장)로 나왔다. 고성과 항의, 소란 속에도 유명희는 꼿꼿했다. 위압적이거나 권위적이지 않았다. 농민들의 거친 질의에도 "이익균형 원칙으로 협상하겠다"고 침착하게 답했다. 유명희의 성품을 잘 아는 한 공직자는 "말투는 온화하지만 강단이 아주 세다. 공직 초임 때부터 냉혹한 통상 협상 판에서 단련된 것"이라고 평했다.
유명희의 강단, 국제 통상 판에서 쌓은 25년의 경험만 봐도 그가 WTO를 이끌 리더로서 손색이 없다고 본다. 설령 사무총장이 아니어도 유명희는 국익에 기여할 일이 많다. 미·중 사이에서 다자무역협정을 완성해야 하고 일본과 통상마찰도 풀어야 한다. 제2, 제3의 유명희도 키워야 한다. 유명희의 멘토 김현종(전 통상교섭본부장)은 "통상에서 제일 소중한 자산이 사람"이라고 했다. 승패를 떠나 유명희를 응원한다.
skjung@fnnews.com 정상균 경제부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