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이 살아야 도시가 산다
2020.11.10 18:00
수정 : 2020.11.10 17:59기사원문
도시는 크고 작은 도로망으로 이뤄져 있다. 넓은 도로는 이동을 위한 공간이고 좁은 골목길은 삶을 담는 공간이다. 신작대로가 화려함으로 치장한 가식의 세계라면 그 이면에 가려진 뒷골목은 수수함이 묻어나는 진실의 세계다. 음식점 하나만 봐도 그렇다. 신작대로 변의 음식점은 하나같이 번드르르하고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에 가격도 만만치 않다. 반면 뒷골목의 음식점은 오랫동안 서민 단골손님들을 상대하다 보니 실속 있고 저렴하다.
종로 북측 뒷골목인 피맛길은 서민들의 애환이 서린 뒷골목이다. 양반이나 고관대작들이 말을 타고 다니는 길을 피해 다닌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이렇게 좁은 골목길이 오히려 활성화된 것은 바로 서민들이 애용하는 저렴하고 맛난 음식점들이 꽉 들어차 있어서다.
2009년 청진동 도시환경정비사업으로 피맛길이 사라지고 24층 높이의 쌍둥이 빌딩이 들어서는 큰 변화가 예상되자 서울시에서는 피맛길 조성을 위한 시민 아이디어 공모를 시행했다. 그리고 피맛길 양쪽으로 늘어선 피맛골을 보존하기 위해 이 일대에서 새로운 개발을 할 때는 최소 4m 폭으로 길을 남겨놓고 채광 및 환기가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는 건축 유도지침을 만들었다. 그 결과 고층건물을 동서로 관통하는 현대식 피맛골 공간이 탄생했다. 이 공간에 대해서는 그나마 옛 골목의 흔적을 남겼다는 긍정적 평가와 현대식 건축재료로 인해 옛날의 정취가 사라졌다는 부정적 평가가 엇갈린다.
인사동 초입에 있는 쌈지길은 뒷골목의 정취를 현대적으로 풀어낸 공간이다. 아기자기한 상점들이 하늘을 향한 마당을 휘감아 돌면서 올라가는 길을 따라 배치되어 있다. 긴 뱀 꼬리 모양으로 길이 나 있는 이 독특한 건물은 옥상정원이 있어서 쇼핑과 휴식을 겸한 장소로 인기가 높다. 이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 최문규는 "건물이기보다는 길이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서울에 얼마 남지 않은 작은 골목과 그 주변에 오밀조밀하게 배치된 가게들을 천천히 걷는 기분을 느낄 수 있도록 배려했다.
도시에서 골목은 서민들이 소소한 일상을 즐기는 유일한 다목적 공간이다. 어린이들에게는 친구들과 소꿉놀이나 딱지치기를 하는 놀이터이자 할머니들에게는 옛이야기를 나누는 수다방이요, 아주머니들에게는 살림을 위한 정보교환의 장소다. 그러나 불도저식 대단위 도시개발로 이제 도시에서 이런 골목길을 찾아보기가 어려워졌다.
서울시는 2015년 역사도심 기본계획을 수립해 역사적 장소 간의 보행 연결체계를 강화하고, 보행공간의 매력을 강화하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으나 현장에서는 개발의 경제논리에 밀려 옛길 복원은 꿈도 꾸지 못한다. 용적률을 희생하고서라도 옛길을 복원하자고 하면 미친 사람 취급받는다.
유럽의 도시가 광장을 중심으로 발달해왔다면 우리의 도시는 마당과 골목길이 중심이다. 골목길은 인체로 비유하자면 말초신경이다. 말초신경이 막히면 손발이 썩어들어간다. 마찬가지로 도시에서도 골목길이 막히면 도시기능에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우리는 외친다. "골목길이 살아야 도시가 산다."
류중석 중앙대 사회기반 시스템공학부 도시시스템전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