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덜 거리는 그의 재봉틀 소리가 그립습니다” 60년 세탁명인 인생 화제
2020.11.25 06:00
수정 : 2020.11.25 06:00기사원문
【파이낸셜뉴스 완주=김도우 기자】 덜덜 거리는 40여 년 된 ‘부라더 미싱’은 오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전북 완주군 삼례읍에서 60년째 세탁업을 하는 ‘일진사(日進社) 세탁소’의 이낙교 대표(79)가 가장 아끼는 재산목록 1호다.
완주군이 최근 이 가게를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세탁소’로 ‘완주 기네스’에 올리면서 국내 동종 업계의 산증인이자 역사인 이 대표의 ‘세탁 명인(名人) 삶’이 새롭게 조명 받고 있다.
중학교 졸업 후 가난 때문에 고교 진학을 포기한 그는 집에서 놀던 중 1961년 ‘열아홉 청춘’에 아버지 친구가 운영하는 세탁소에 간 것이 인연이 돼 한평생 다림질을 했다.
기술이라도 배우자는 심산에 세탁 보조로 들어갔으나 처음 2년 동안 매일 10시간씩 빨래만 하는 지독한 고생과 맞닥뜨렸다.
한겨울에 세탁소 마당의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손에 입김을 불어가며 손빨래를 하면서 눈물도 많이 흘렸다고 한다.
그래도 좌절하지 않고 어깨 너머로 직접 세탁 기술을 익힌 그는 스물한 살 때 인근의 작은 가게를 빌려 자신의 ‘첫 세탁소’를 열었다.
‘매일 발전하라’는 뜻의 ‘일진’이란 간판을 친구들이 달아준 것도 그때였다.
1960년대 초반 동네 세탁소는 19공탄 연탄 화덕에 1.5㎏짜리 무쇠 다리미 2개를 얹어놓고 번갈아 사용하며 옷을 다렸다.
좁은 가게에서 연탄가스를 마셔가며 일을 하던 중 스물일곱의 나이에 결핵성 뇌막염을 앓는 시련을 겪게 된다.
이후 기적처럼 건강을 회복해 특유의 성실함으로 고객의 신뢰를 쌓아갔다.
“세탁소는 겨울보다 여름이 힘들어요. 선풍기도 없이 연탄불에 다리미를 달궈야 하니 땀이 비 오듯 주룩주룩 흘러내려요. 뜨거운 자루를 자주 만지니 손에 지문마저 없어졌어요. 그래도 손님과 약속은 꼭 지켰습니다”.
의류가 귀했던 70년대 동네 세탁소에서는 여러 해프닝이 많았다.
맡기지 않은 비싼 옷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르거나, 점퍼를 찾으러 왔다가 다른 사람 바지를 슬쩍 하는 일도 발생해 대신 옷값을 물어준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다섯 번의 이사 끝에 내 집 마련에 성공한 그는 1982년 삼례시장 청년몰 맞은편에 지금의 가게 문을 열게 되었다.
하지만 시련은 끝이 없었다.
70년대 말에 등장한 최초의 자동세탁기는 80년대 들어 점차 일반가정에 보급됐고, 세탁소의 일감은 줄어들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느 날 예열된 다리미를 잘못 놓고 잠이 들어 세탁소에 불이 나는 위기의 순간도 경험했다.
한 살 연상의 아내도 어려워진 생계를 위해 새벽에 서울 동대문 시장을 찾아 의류를 다량 구매해 우체국이나 병원 등을 돌며 판매하는 등 생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난관을 극복하겠다’는 이 대표의 성실과 축적된 세탁기술이 조금씩 입소문을 타며 단골손님이 늘기 시작했다.
결혼을 앞둔 예비 신랑이 예복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를 때 자신의 양복을 잘 다려 공짜로 빌려줄 정도로 따뜻한 세탁소라는 소문도 한몫했다.
이런 따뜻함에 완주 봉동읍과 상관면, 심지어 익산시 왕궁면과 춘포면, 전주시 팔복동 등지에서 삼례 오일장을 찾았다가 옷을 맡기는 고객까지 생길 정도였다.
한숨을 돌릴 여유가 생긴 그는 주변의 고마움에 보답하기 위해 20년 전부터 부인과 함께 남몰래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각종 시설에 생필품과 쌀 등을 전달하고 궂은일에 손을 보태고 있으며, 동네 대소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공동체 회복에도 주력하고 있다.
“돌아보면 고생을 퍽 했어요. 60년 동안 다른 일을 했으면 돈을 더 벌었을 텐데...... 그래도 묵묵히 참아준 가족과 꾸준히 가게를 찾아주시는 손님들 덕에 오늘도 다림질을 멈추지 않고 있다”고 고마워했다.
‘가게 대표’보다 ‘장로님’으로 불러달라는 그는 “앞으로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세탁일과 봉사하는 신앙인의 삶을 살고 싶다”며 환하게 웃었다.
964425@fnnews.com 김도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