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국채를 한은이 인수한다?

      2021.01.27 17:29   수정 : 2021.01.28 09:03기사원문


[파이낸셜뉴스] 어렸을 때부터 품어온 의문 하나. 한국은행은 돈을 찍어내는 곳이다. 그럼 윤전기를 1년 365일 돌려서 돈을 팡팡 찍어내면 안 되나.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한테 나눠주면 다 부자로 살 수 있을 텐데.

머리통 굵어지면서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고등학교 사회 시간에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하이퍼인플레이션 이야기를 배웠다.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은 패전국이 됐다.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승전국에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전쟁으로 쌓인 빚도 눈덩이처럼 불었다. 독일 정부는 급한 마음에 돈을 마구 찍었다. 그 결과 마르크화 가치는 똥값이 됐다. 베를린에서 빵 한 조각이 1922년 말 160마르크에서 1년 뒤 2000억마르크로 퀀텀 점프를 했다. 1923년 11월에 미국 돈 1달러를 사려면 4조마르크를 줘야 했다. 요새도 독일이 유럽 최강의 짠돌이, 긴축의 전사를 자처하는 건 이때의 기억이 그만큼 뼈저리기 때문이다.

시인 김광균(1914~1993)은 일찍이 돈의 본질을 알았다. 그가 1940년에 발표한 '추일서정'은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라는 시구로 시작한다. 1939년 9월 독일은 폴란드를 짓밟았다. 2차 세계대전의 서막이다. 히틀러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폴란드 망명정부가 과연 나라를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낙엽은 낭만이라도 있지, 힘빠진 망명정부의 지폐는 낙엽만도 못하다.



2008년 금융위기가 세상을 바꿨다


외환위기 때까지 긴축이 세상을 지배했다. 돈줄을 쥔 국제통화기금(IMF)은 한국에 고금리와 긴축 재정을 강요했다. 온 국민이 힘들어 죽을 판인데 허리띠를 더 졸라매지 않으면 돈줄을 끊겠다고 위협했다. 도리 있나, 고분고분 따르는 수밖에. 한국인은 쓰라린 고통의 긴축을 이겨낸 민족이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한데 IMF에서 빌린 돈을 조기 상환했다. 이러니 세상이 놀랄 수밖에.

그런데 10년 뒤인 2008년 진짜 놀라자빠질 일이 벌어졌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터졌다. 블랙 스완, 곧 검은 백조 같은 일이 생겼다고 온 세상이 난리를 쳤다. 그러자 미국은 사상 유례 없는 규모로 시장에 돈을 풀기 시작했다. 금리를 제로로 내린 것도 모자라 양적완화(QE)라는 희한한 통화 정책를 동원했다. 당시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은 '헬리콥터 벤'을 자처했다. 헬기에서 돈을 뿌리겠다는 것이다. 한 치의 오차없이 우리와 반대로 갔다. 미국 워싱턴 DC에 본부를 둔 IMF는 그 장단에 춤을 추었다.

금융위기 때 연준은 세차례 양적완화(QEㆍQuantitative Easing) 정책을 실시한다. 이를 흔히 QE1, QE2, QE3로 부른다. 시장에서 국채, 회사채 등 채권을 사들여 돈을 무제한으로 푸는 정책이다. 2014년 채권 매입을 중단한 시점에 연준은 4조5000억달러(약 5000조원)의 자산을 보유했다. 그만한 돈을 시장에 뿌렸다는 뜻이다.


코로나가 부활시킨 양적완화


경제가 금융위기의 수렁에서 조금씩 벗어날 기미를 보이자 슬슬 긴축 이야기가 나왔다. 살살 금리를 올려야 유동성 과잉이 부른 인플레이션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재닛 옐런 연준 의장은 2015년 12월 기준금리를 올렸다. 2006년 이후 첫 인상이었다. 긴축을 싫어하는 트럼프는 2018년 옐런이 4년 임기를 마치자 갈아치웠다. 후임엔 제롬 파월을 임명했다. 하지만 파월도 초기엔 금리 인상 기조를 이어갔다. 양적완화 규모도 줄였다.

이걸 코로나가 싹 바꿨다. 2020년 초 코로나 바이러스가 지구촌을 뒤덮자 파월은 금융위기 때 버냉키를 능가하는 돈풀기 작전에 나섰다. 금리는 다시 제로로 떨어졌고,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양적완화 시즌2(QE4)가 시작됐다. 작년 여름께 벌써 연준 자산이 2조달러가량 늘었다는 통계가 있다.

미 정부와 의회도 돈 쓰는데는 이골이 났다. 작년 12월 의회는 9000억달러(약 995조원)짜리 경기부양책에 합의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이 돈도 성에 차지 않은 모양이다. 바이든은 조만간 1조9000달러 규모의 초대형 부양책을 내놓을 예정이다. 돈은 누가 대나? 걱정할 것 없다. 발권력을 가진 막강 연준이 있다.



미국은 뭘 믿고 이렇게 돈을 푸나


여기서 의문이 든다. 왜 1920년대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발생한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미국에선 발생하지 않는가. 돈을 무절제하게 찍어내는 건 마찬가지인데 말이다. 아래 이유가 있다.

1. 미국은 기축통화국이다. 2차 대전이 끝난 뒤 세계는 금본위제 아래서 미국 달러를 기축통화로 삼았다. 1971년 닉슨 대통령이 금본위제 포기를 선언했으나 달러의 위상은 더 공고해진 느낌이다. 여전히 세계 무역은 달러 결제가 압도적이다. 독재자도 제 안위를 지킬 땐 달러를 찾는다. 지난 2003년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이 은신처에서 미군에 체포됐다. 현장에선 달러 뭉치가 발견됐다. 원수 같은 미국 돈이지만 후세인도 어쩔 수 없었다.

2. 대마불사. 미국 경제가 망하면 세계 경제가 망한다. 미국은 경제도 군사력도 세계 최강이다. 이런 나라에 문제가 생기면 다른 나라는 말할 것도 없다. 미국을 대신할 대체재도 없다. 중국? 쑥쑥 크고는 있지만 아직 멀었다. 위안화는 중화권 통화일 뿐 달러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위기 때 투자자들은 달러 자산을 산다. 위안 자산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시장은 누가 더 센지 직감으로 안다.



이웃 일본은 양적완화 원조


일본도 제로금리·양적완화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운 나라다. 1990년대 초 버블이 꺼진 뒤 경제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무진 애를 썼다. 1차 양적완화는 2001년에 시작했다. 일본은행은 국채, 자산담보부증권(ABS), 기업어음(CP) 등 다양한 채권을 시장에서 사들였다. 그렇지만 경제는 여전히 골골했다. 고령화의 늪에 빠진 일본 경제는 잃어버린 10년의 터널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아베 총리(재임 2012~2020)는 더 화끈한 아베노믹스를 밀어붙였다. 이어 코로나 사태가 터지자 일본은행은 아예 국채 무제한 매입을 선언했다. 일본 국채의 절반가량은 일본은행이 쥐고 있다. 중앙은행이 뒤를 받쳐주지 않으면 일본 정부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판이다. 여기서도 의문이 든다. 기축통화국인 미국은 그렇다 치고 일본이 별탈없이 버티는 비결은 뭔가. 일본 정부 빚은 2019년 기준 국내총생산(GDP) 대비 223%로 선진국 가운데 독보적으로 높다.

1. 엔도 기축통화 대우를 받는다. 국제 교역에서 엔은 달러와 유로에 이어 가장 많이 거래되는 화폐다. 외환 보유시 달러-유로-파운드(영국)-엔 순으로 선호도가 높다. 시장을 뒤흔드는 위기가 닥칠 때마다 엔은 안전자산으로 되레 가치가 오른다.

2. 일본은 대외순자산 세계 1위 국가다. 2018년 기준 대외순자산은 341조엔(약 3600조원)에 이른다. 대외순자산은 해외 자산에서 부채를 뺀 규모다. 그만큼 일본 기업과 개인이 밖에 나가 투자를 많이 했다는 뜻이다. 이른바 와타나베부인이 대표적이다. 금리가 바닥을 기자 와타나베부인들은 해외 주식·채권에 눈을 돌렸다. 기업들은 해외 기업 인수·합병(M&A)에 왕성한 식욕을 보였다. 일본이 대외순자산 세계 1위 자리를 수십년째 놓치지 않는 이유다. 일본은 무제한 양적완화를 해도 확실하게 믿는 구석이 있다.


한은도 한국형 양적완화 실험


자연 이런 질문이 나온다. 미국·일본이 하면 우리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중앙은행인 한은이 국채를 좀 더 넉넉히 사주면 안 되나? 일본은 중앙은행(일본은행)이 국채의 절반을 사주는데.

한국판 양적완화를 둘러싼 논란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전통적으로 한은과 전문가들은 양적완화에 부정적이다. 무엇보다 한국은 기축통화국이 아니기 때문이다. 위기 때 한국 원화를 찾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심지어 한국인도 달러나 엔을 찾는다. 이래서 비기축통화국은 함부로 돈을 찍으면 안 된다. 돈값이 곤두박질치고 덩달아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원 가치가 떨어지면 외국자본도 한국을 등지게 된다. 원화를 쥐고 있을수록 손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한은에 미묘한 변화가 나타났다. 작년 3월 한은은 환매조건부채권(RP)을 무제한 매입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한은이 RP를 매입하면 그만큼 돈이 시장에 풀린다. 무제한 유동성 공급은 외환·금융위기 때도 없던 일이다. 놀란 기자들이 'RP 무제한 매입이 선진국 양적완화와 사실상 같은 조치인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윤면식 부총재는 "그렇게 봐도 크게 틀린 게 아니다"고 말했다. 당시 언론은 '한국판 양적완화'라는 제목을 큼지막하게 뽑았다.

엄밀하게 보면 당시 조치가 미국·일본형 양적완화는 아니다. 한은은 RP만 무제한 매입 대상으로 삼았다. RP엔 금융사가 되산다(환매)는 조건이 붙는다. 소유권이 다시 금융사로 넘어가면 그만큼 통화량이 준다. 한은은 이를 통해 18조7000억원을 시장에 공급했고, 넉달 뒤인 작년 7월에 종료했다. 시장에서 매입 요청이 끊겼기 때문이다. 그래도 의미는 작지 않다. 소극적이나마 한은이 한국판 양적완화에 문을 연 첫 사례라서다.


코로나 보상 논란, 한은의 선택은


연초부터 한은이 국채를 직매입하는 이슈가 불거졌다. 더불어민주당 민병덕 의원 등은 지난 22일 '코로나 손실보상 및 상생에 관한 특별법안'을 발의했다. 11조(條)가 논란을 불렀다. 국가가 국채를 발행하면 이 국채를 한은이 직접 매입하고, 그렇게 마련한 돈을 자영업자·소상공인 등에게 지급한다는 내용이다. 소요 재원은 월 24조7000억원, 4개월치만 보상해도 100조원에 이르는 천문학적 규모다. 4월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은 피해 보상안을 밀어붙일 태세다. 문재인 대통령은 25일 "재정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서 손실보상을 제도화하는 방안을 당정이 함께 검토해달라"고 말했다. 대통령도 OK 도장을 찍었다. 민병덕 의원은 27일 라디오 인터뷰에서 한은의 국채 직매입에 대해 "통화정책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고 재정도 이럴 때 쓰라고 곳간에 쌀을 쌓아둔 것"이라고 말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녹초가 됐다. 그는 "재정은 화수분이 아니다"며 처음엔 저항하는 듯했다. "나라 곳간지기 역할은 국민이 요청하는 준엄한 의무"라는 말도 했다. 하지만 "이 나라가 기재부의 나라냐"는 정세균 총리의 호통 한마디에 방어벽이 무너졌다. 새해 예산은 이미 꽉 짜였다. 결국 코로나 피해 보상은 국채로 할 수밖에 없다.

기재부 홍남기 방어벽이 무너지면서 그 불똥이 한은 이주열 총재한테 튀었다. 국채를 받아줄 가장 확실한 돈줄은 발권력을 가진 중앙은행이기 때문이다. 한은이 코로나 보상용 국채를 적게는 수십조, 많게는 수백조원어치를 인수하면 똑 부러진 양적완화다.

한은의 고민이 깊어졌다. 사실 국채를 매입할 수 없다고 버티면 그만이다. 현행법 상 한은은 중립성을 보장받는다. 한은법 3조는 "한은의 통화신용정책은 중립적으로 수립되고 자율적으로 집행되도록 하여야 하며, 한은의 자주성은 존중되어야 한다"고 못박는다. 하지만 대가가 두렵다. 한은이 기관 이기주의에 빠져 코로나에 지친 자영업자 등 서민층을 버렸다는 비판이 나올 수 있다.

지난해 한국형 양적완화 실험은 우리 경제에 플러스가 됐다. 금융시장 안정에 기여했다. 가보지 않은 길을 고른 한은의 선택은 옳았다. 한국 국가신용등급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코로나 국채 매입은 어떨까. 한국 경제에 대한 해외의 신뢰도가 뚝뚝 떨어질까? 무디스 같은 신용평가사가 한국도 곧 남미 짝 난다고 경고 나팔을 불까? 아니면 코로나 위기 극복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로 환영할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같은 국제기구는 한국을 향해 재정을 더 풀라고 성화다. 국내에선 비판이 비등하지만 국제 비교를 하면 한국의 재정건전성은 여전히 우수한 편에 속한다. 그렇다고 재정을 마이너스통장마냥 마구 써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기업 팔을 비트는 것도 모자라, 국채를 인수하라고 한은 팔을 비트는 것도 모양새가 영 아니다. 양적완화를 해서는 안 될 이유를 찾으면 열 개도 넘는다.
거꾸로 해야 할 이유를 찾아도 열 개가 넘는다. 이주열 총재가 선택의 길목에 섰다.
중앙은행 총재, 참 어렵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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