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도는 지금 100년전 경제인에 열광중.. 그 속에서 '일본의 조바심'을 읽다
2021.02.07 17:49
수정 : 2021.02.10 11:06기사원문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역경이 불어닥칠 때야 말로, 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말년에도 나라를 바로세우기 위해 정력적으로 임했던 시부사와의 뜻을 이어받겠다.
최근 일본에서는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이자 요즘말로는 스타트업 육성자인 '액셀러레이터'로 불릴 만한 시부사와 에이이치(1840~1931년)에 대한 '학습 열풍'이 뜨겁다.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를 대신해 2024년, 40년 만에 일본의 최고액권인 1만엔권 화폐의 새 얼굴이 될 그는 사실, 한국에는 다소 생소한 인물이나, 한반도와 적지않은 악연을 갖고 있다. 그가 만든 제일국립은행과 철도, 전력 회사들이 한반도 수탈의 첨병 노릇 역할을 했으니 씁쓸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일본 사회가 근대 메이지시대 인물에 몰입하고 있는 것은 분명 주목해야 할 현상이다. 중국의 추월, 한국의 추격, 안으로는 성장 정체와 한계에 다다른 아베·스가노믹스, 이 안에서 근대 여명기 리더에게 오늘의 해법을 찾고 있는 것이다.
■日, 근대 '벤처설립가' 열광
일본 공영방송인 NHK는 이달 14일부터 일본의 '국보급 얼굴'이라는 배우 요시자와 료를 앞세워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생을 그린 새 대하드라마를 방영한다. 지난 2019년 방문했던 도쿄 기타구 소재 시부사와 기념관은 3월 말까지 방문 예약이 꽉 찬 상태였다.
서점가는 이미 100여년 전 '도덕 경제' '공익과 사익의 조화' 등을 주장했던 그의 사상과 행적, 어록을 정리한 서적들로 즐비하다. 만화잡지에 연재물로도 등장했다. 고전어로 쓰여져 요즘 사람들이 읽기 어려워 현대어로 각색됐다는 그의 저서 '논어와 주판'은 마루젠 등 도쿄 유명 서점의 베스트셀러에 올라 있다. 이바라키현의 어느 커피회사는 막부 말기, 프랑스 파리박람회에 참석 당시 그가 마셨다는 커피를 재현해 보겠노라며 고증까지 나선 마당이다.
사부사와는 일본에 자본주의 기틀을 심어놓은 인물이다. 메이지 정권의 대장성 관료를 박차고 나온 33세(1873년)부터 대략 90세에 이를 때까지 500여개 기업을 만들었다. 일본의 3대 은행 중 하나인 미즈호은행의 전신인 제일국립은행을 설립해 이곳을 기반으로 도쿄증권거래소, 전력, 철도, 항공, 호텔, 보험 등 일본 경제의 인프라가 된 기업들을 세웠다.
그 많은 기업의 실소유자였는가. 이 부분에서는 일본 제국주의 당시 재벌을 형성했던 미쓰비시, 미쓰이가(家)와는 결이 달랐다. '한 손에는 논어를, 한 손에는 주판을 들고'라는 그의 도덕경영 구호처럼 경영은 하되 소유는 하지 않았다. 패전 후 맥아더 통치하 미군정(GHQ)이 재벌 해체에 나설 때 시부사와가(家)도 해체 대상으로 놓고 뚜껑을 열어봤더니 제대로 된 기업 하나 소유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얘기들이 일본 사회에 미담으로 회자되고 있는 것이다. 여성교육, 상업교육, 사회사업 등까지 강조한 '실용주의적 도덕경제론자'였다.
그러나 그의 도덕경제는 어디까지나 일본 내셔널리즘에 입각한 것이었다. 대장성에 사직의 변을 올릴 때만 해도 군부의 대외팽창정책에 반대했다고는 하나, 재정 건전성이나 국가경제 운영, 무역거래의 관점에서였다.
■심연의 인물 끌고 나온 건 아베·아소
그렇다면 왜 지금인가. 일본 사회가 왜 이 100여년 전 인물을 대상으로 '앓이'를 하고 있는 것일까. 시동을 건 것은 아베 신조 전 총리와 그의 정치적 '맹우'인 아소 다로 부총리 겸 재무상이었다. 아소 부총리는 지난 2019년 4월 9일 전격적으로 지폐쇄신안을 발표했다.
나루히토 일왕 즉위 한 달 전에 1000엔권, 5000엔권, 1만엔권 화폐 속 인물들을 교체하겠다고 한 것이다. 심연에 있던 시부사와 에이이치를 세상으로 끌고나온 것이자 일본 제국주의 시대로 이어지는 근대 인물의 전면 재등장이었다.
대개 화폐 디자인 변경 발표는 실시 2~3년 전에 하기 마련인데, 이번에는 시행 5년을 앞두고 조기에 발표한 것이다. 모리토모 학원 비리 사건으로 인한 정권 이미지 타격, 장기 집권에 따른 피로감 등을 일거에 쇄신하고 당시 나루히토 일왕 즉위, 레이와(令和)시대 개막에 맞춘 일종의 축포였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더욱이 아베노믹스의 성과를 부각시키고, 경제활력을 향한 메시지를 주기에 '애국적 경제관'으로 일본의 민간경제를 주도한 시부사와는 적격이었던 것이다. 작가 에가미 고우는 최근 지지통신에 "중국에 추월 당해버린 일본 경제를 활성화시키고 국내총생산(GDP)을 약진하기 위해 시부사와를 택한지도 모른다"며 "매일 지갑에서 시부 얼굴을 경배함으로써 기업가 정신을 고취시켜 달라는 의도"라고 꼬집기도 했다.
과거 대하드라마에서 전국시대 인물들만 다뤄온 일본의 공영방송 NHK가 사상 처음으로 근대 인물인 시부사와의 삶을 다룬 드라마를 이달 14일부터 내보낸다. 앞서 아베 정권이 꺼내든 시부사와를 NHK가 띄우고, 이 붐을 타고 출판시장이 함께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경제인들은 시부사와의 어록을 곱씹고 있다. 유력 총리 주자였다가 지난해 스가 요시히데 총리에 밀려 절치부심하고 있는 기시다 후미오 자민당 전 정무조사회장은 당시 선거전에서 '목표하는 국가상'에 대해 "지금 시대에 맞는 자본주의를 만들어 가자"며 시부사와의 경제철학을 화두로 꺼내들었다.
■과거 성공경험의 복습
민간의 위기감도 시부사와 학습 열풍의 이유로 지목된다. "사회 전체를 보면서 자신의 이익이 아닌 공익을 항상 생각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국가전체의 이익을 생각했다"는 등의 평가가 줄을 잇고 있다.
최근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미국의 거대 IT기업인 GAFA(구글, 애플, 페이스북, 아마존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든 단어)와 마이크로소프트, 이들 5개 기업의 시가총액 합계가 도쿄 증시 1부에 상장된 2170개사의 시총 합계치를 웃돈다고 보도했다. 지난 2018년 아베 정권 당시 일본 정부는 각의 결정을 통해 2023년까지 기업가치 10억 달러, 1조원대 이상의 비상장 '유니콘'등 신흥기업을 20개가량 만들겠다는 목표를 내걸었지만 아직까지는 이렇다할 성과는 없어 보인다. 미국, 중국 기업들은 이미 새로운 시대를 향해 앞서 가는데 여전히 일본에서는 디지털트랜스포메이션(DX), 디지털 전환이 화두인 마당이다.
코로나19 사태는 재정확대로 지탱해온 일본 경제에 충격을 줬고 초고령화는 가속화되고 있다. 위기감은 과거 성공경험을 떠올리게 한다. 메이지 시대의 "화혼양재(일본의 전통·정신에 기반해 서양의 학문과 지식을 조화시켜 발전시키자)정신을 다시 끄집어 내자"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1840년 사이타마현 출생
1866년 프랑스 파리 만국 박람회로 유럽 방문
1867년 메이지유신 정부의 대장성 국장 취임
1873년 대장성 관료 사임, 제일국립은행 설립 등
1878년 도쿄상법회의소 설립
1883∼1928년 오사카 방적회사, 일본철도회사, 도쿄가스, 제국호텔, 삿포로 맥주, 도쿄교환소, 도쿄전력, 일본항공수송회사 등 500개 회사 설립
1931년 사망
ehcho@fnnews.com 조은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