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호) 설정들, 다 본 것 같은 이유
2021.02.11 14:16
수정 : 2021.02.11 15:16기사원문
[파이낸셜뉴스] 참담한 심정이다. ‘전에 없던’, ‘새로운’, ‘한국형 SF’를 표방한 넷플릭스 영화 <승리호>를 보고난 뒤 든 감상이다.
전혀 새롭지 않았다.
설정과 캐릭터,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온전히 제 스스로 창작한 것이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 한두 가지만 비슷하다면 그러려니 하겠으나 영화의 주된 것들이 죄다 어디서 본 듯한 것이다 보니 당혹스러움이 작지 않다.
<승리호>는 사이버펑크 계열 SF영화다. 사이버펑크는 발전한 기술에도 지구는 황폐화되고 빈부격차가 심하며 인간다움이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를 그리는 장르다. <블레이드 러너>나 <공각기동대>가 특별히 유명한데, 이들 작품이 마련한 세계관과 분위기가 이후 만들어진 많은 작품에 자양분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유토피아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
<승리호>의 배경은 2092년이다. 영화는 서울 여의도 63빌딩을 비추며 시작하는데, 카메라가 뒤로 빠지자 그보다 수십 배는 되는 거대한 건물이 곳곳에 우뚝 솟아있다. 60여년 뒤 미래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대단히 발전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문제는 그 같은 기술에도 사람들의 삶이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방독면 없이는 외출도 할 수 없을 만큼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은 제대로 된 음식을 먹어본 적도 없을 정도다. 식물들을 말라 비틀어졌고 사람들은 가난하다.
인류는 지구 밖 위성궤도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우주개발업체 UTS(Utopia Above the Sky)가 개발한 곳으로, 병든 지구에선 찾아볼 수 없는 푸른 숲과 맑은 강이 펼쳐져 있다. 자연히 이곳에 가려는 사람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UTS는 엄격한 기준에 따라 시민권을 발급해 지구에서 뛰어난 인재를 선별해 영입한다.
UTS 세계에 들어갈 수 없는 비시민은 지구에 그대로 발붙이고 살거나, UTS 세계와 지구 사이에 있는 비시민 거주단지에서 갖은 노동을 해야 한다. 한국 우주쓰레기 청소선 '승리호'에도 그런 이들이 타고 있다.
승리호 선원은 모두 네 명이다. 과거 우주해적단을 이끌었다는 장선장(김태리 분)을 필두로, 돈 되는 일이라면 뭐든 하는 항해사 태호(송중기 분), 갱단 두목 출신 기관사 타이거 박(진선규 분), 작살잡이 부원 로봇 업동이(유해진 분)가 한 팀이다.
이들은 궤도를 도는 우주쓰레기를 모아다 판다. 총알보다 빨리 궤도를 도는 수많은 쓰레기 가운데서 돈이 될 만한 물건을 건져서 파는 것이다. 우주개발에 방해가 되는 쓰레기를 치우고, 부족한 자원을 뽑아내는 중요한 역할이다.
꼭 필요한 일임에도 이들의 삶은 엉망이다. 경쟁은 치열하고 대가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마저도 위험수당을 스스로 부담해야 한다. 수거한 쓰레기값보다 벌금이 더 나와 허덕이는 선원들의 삶은 이 시대 외주노동자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같은 계열, 비슷한 작품들
영화는 어느 날 승리호에 꽃님이(박예린 분)가 나타나며 벌어지는 소동을 다룬다. UTS가 폭탄을 내장한 로봇이라며 찾고 있는 이 아이를 승리호 선원들이 지켜내는 것이다. 이들의 여정은 일종의 저항과 혁명의 이야기로 귀결된다. 귀엽고 붙임성 좋은 아이와 승리호 선원 사이의 유대로부터, 감춰져 있던 UTS의 음모가 드러나고, 승리호 선원들의 절절한 사연까지 밝혀지는 과정은 영화의 주요 얼개다.
여기까지만 보아도 새로울 게 없다. 특히 기본적인 설정은 유명 SF영화와 소설, 애니메이션, 만화 등에서 다 원천을 찾을 수 있는 것들이다.
황폐화된 지구에서 살아가는 다수와 지구 바깥에 선택받은 소수가 살아가는 유토피아적 공간을 대비한 영화 중엔 닐 블롬캠프의 2013년작 <엘리시움>이 유명하다. 극심한 빈부격차를 미래세계의 생존권 차원에서 다룬 영화로, 단순한 SF를 넘어 현실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녹여내는데 성공했다.
로베르토 로드리게즈의 2019년작 <알리타: 배틀 엔젤> 역시 비슷한 설정이다. 모두가 원하는 공중도시와 그 도시를 위해 존재하는 고철도시의 이야기로, 고철도시가 공중도시의 식민지 역할을 한다는 설정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공중도시 시민권을 가지려 노력하는 고철도시 사람들의 이야기가 영화 곳곳에 배치됐고, 그 부조리에 맞서 혁명적 투쟁을 벌이는 내용이 영화의 주 얼개가 된다.
비슷한 영화는 꽤 많다. 사이버펑크 초기작으로 꼽히는 <블레이드 러너>부터가 황폐한 지구를 벗어난 부자들과 그들의 음모를 다루고 있지 않던가.
제 것 없는 SF, 이래도 괜찮을 걸까
궤도에서 쓰레기를 청소하는 이들의 삶을 흥미롭게 다룬 작품도 있다. 가장 유명한 건 애니메이션으로까지 만들어진 일본 만화 <플라네테스>다. 유키무라 마코토의 이 만화에서 주인공들은 <승리호>와 마찬가지로 우주쓰레기를 청소하는 청소부로 등장한다. 우주쓰레기를 청소하는 이들의 삶을 깊이 있게 담아내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철학적 물음을 진지하게 답하는 멋진 작품이다.
특히 <승리호>에서 마치 제 것인 양 인상 깊게 등장하는,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앞뒤도 위아래도 없다"는 대사는 명백히 <플라네테스>에서 가져온 것이다.
얼마간 비슷한 이야기로 이와오카 히사에의 <토성 맨션>도 있다. 쓰레기밭이 된 지구를 떠나 대기권 밖에 맨션을 짓고 사는 후대 인류의 이야기다. 이 맨션에서도 거주지에 따라 신분과 지위가 갈린다는 점이 인상적으로 등장한다.
이밖에도 각자 특수한 사연을 지닌 인물들이 앳된 아이를 지키고 그로부터 세계를 지배하는 자들의 음모에 다가선다는 내용은 수많은 SF영화의 공식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극중 인물들이 태극기가 붙은 우주선에서 된장찌개를 먹고 화투를 치며 한글을 쓰는 정도로는 결코 한국적 SF가 될 수 없다. 영화가 ‘본 적 없는’, ‘새로운’ 같은 문구로 홍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민망하게 느껴지는 게 과연 나 하나뿐일까.
각본을 쓴 조성희 감독은 출세작인 <늑대소년>에서도 표절논란에 휘말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영화를 보았을 때 받았던 충격을 생생히 기억한다. 누구나 <가위손>과 <늑대소년>을 연달아 본다면 내가 느꼈을 충격을 고스란히 경험할 수 있으리라. 굳이 내가 나서지 않더라도 두 영화의 설정과 캐릭터, 전개 등을 구체적으로 비교한 글을 온라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판단은 물론 독자의 몫이다.
영화팬들의 비난에도 당대 평단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조성희 감독이 250억원대로 몸집을 키운 <승리호>를 찍을 수 있었던 배경이다. 나는 <늑대소년>에서 적극적인 비판이 이뤄지지 않은 결과가 <승리호> 참사로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누군가에게 아플 수 있을 이 글을 적기로 하였다. 다시는 이와 같은 작품이 나오지 않기를 바라며.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영화가난다'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
pen@fnnews.com 김성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