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사태, 'YS'를 소환하다
2021.02.27 17:10
수정 : 2022.02.16 15:55기사원문
현대 사회에서 '쿠데타'라는 용어는 낯설게 다가온다. 쿠데타의 정의는 국민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무력 등의 비합법적인 수단으로 정권을 빼앗으려고 일으키는 정변을 말한다. 쿠데타의 주체는 대개 군부였다. 현재 민주주의 체제를 기반으로 하는 대부분의 선진 국가들에선, 과거처럼 군부가 정치에 개입하는 사례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한 상황이다. 우리나라도 선진국 못지 않게 민주주의 시스템 및 의식이 정착돼 있어 군부 쿠데타라는 것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최근의 미얀마 사태를 보면서 우리나라도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이와 비슷한 시대가 있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절, 군부는 한국 정치의 중심에 있었고 국가의 모든 대소사를 통제했다. 군부 쿠데타라는 것도 국민들에게 낯설지 않은 용어로 존재했다. "어디서 쿵 소리가 나면 '또 누가 쿠데타 했구나'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엄혹한 시대였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를 뛰어넘어 지금과 같은 시대를 맞이하기까지. 과거 한 지도자의 역할이 주효했다. 바로 군부 정치를 일소하고 문민 통제를 확고히 정착시키겠다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과감한 의지와 결단, 행동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최근의 미얀마 사태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김 전 대통령의 특별한 업적을 다시금 소환시키고 있는 셈이다. 김 전 대통령의 당시 '하나회' 숙청 과정 및 의미를 되돌아봤다.
■취임 3달만에 별 40개 날아가
1993년 2월,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졌던 군부 출신 대통령의 시대가 끝나고 문민 정부의 시대가 열렸다. 다만, 대통령만 바뀌었을 뿐 이전 정권의 요체를 이뤘던 하나회 중심의 군부 세력은 그 자리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3월 초, 김영삼 대통령은 육군사관학교(육사) 졸업식에서 의미심장한 연설을 했다. "임무에 충실한 군인이 조국으로부터 받는 찬사는 그 어떤 훈장보다도 값진 것입니다. 그러나 올바른 길을 걸어온 대다수 군인에게 당연히 돌아가야 할 영예가 상처를 입었던 불행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 잘못된 것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돌이켜보면 일종의 '서막'이었던 셈이다. 이후 김 대통령은 당시 권영해 국방부 장관을 비밀리에 청와대로 불러 조찬을 함께 했다. 조찬 도중 김 대통령은 권 장관에게 군인들이 그만 둘 때 사표를 제출하는지를 물었다. 권 장관은 군인들은 사표가 없어도 대통령 명령에 복종한다고 답했다. 그러자 김 대통령은 불쑥 한 마디를 꺼냈다.
"김진영 육군참모총장을 바꿔야겠다"
하나회 핵심(육사 17기)이던 김 총장을 교체하겠다는 기습적인 말에 권 장관은 당황하며 "지금 육참총장을 교체하면 대규모 후속 연쇄인사가 불가피하다. 정기인사 때 교체하는 것이 좋겠다"고 답했다. 그러자 김 대통령은 "아니다. 육군참모총장, 기무사령관을 지금 즉시 바꾸겠다. 후임자도 바로 보임되고 취임식도 준비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김진영 총장과 서완수 기무사령관의 임기는 한참 남아있었다. 5공화국 탄생의 일등공신들이자 이전 정권 내내 군부의 대못으로 남아있던 인물들을 김 대통령은 단번에 뽑아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1993년 4월, 당시 백승도 대령이 육사 20기~36기 하나회 125명의 명단을 용산구 군인 아파트에 뿌리는 일이 발생했다. 이것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하나회의 깊은 뿌리가 백일하에 드러났다. 비단 장성들만이 아닌 하나회 소속 영관급 장교들까지 전부 수면위로 올라왔다. 이 사건이 또 하나의 기폭제가 됐고, 직후 김 대통령은 안병호 수방사령관과 김형선 특전사령관을 전격 경질한 후 교체했다.
불과 6일 뒤에는 1, 3야전군사령관과 제2작전사령관이 교체됐다. 일주일 뒤에는 대대적인 군단장·사단장급 인사까지 단행해 군 주요 보직에서 하나회 출신 장군들이 거의 다 물러나게 됐다. 기세등등하던 하나회 별들이 미처 반격할 틈을 갖지 못한 채 마치 유성쇼 하듯 떨어져 나갔다. 김 대통령 취임 3달 만에 장군 18명이 옷을 벗었고, 떨어진 별이 40개가 넘었다. 워낙 떨어진 별이 많고 새로 별을 다는 장군들도 많다 보니 계급장에 사용할 별이 부족해 국방부 간부들의 군복에서 별을 떼네 임시로 사용하는 웃지 못 할 상황도 벌어졌다.
■2차 숙청, 하나회 역사의 뒤안길로
취임 초기에 단행된 전격적인 1차 숙청 이후 2차 숙청은 그해 7월에 단행됐다. 발단은 합참 장성들이 모인 한 회식 자리였다. 하나회 소속이던 합참 작전부장 이충석 소장(육사 21기)이 물컵으로 탁자를 몇 차례 내려치면서 "군을 이런 식으로 막 해도 돼? 선배들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게 뭐냔 말이야. 소신도 없고, 다 죽었어. 정부가 장군들을 함부로 대하니까 외부에서도 제멋대로 군을 매도하잖아. 이래도 되느냐 말이야"라고 격한 불만을 쏟아냈다.
김 대통령과 비하나회로 구성된 군 수뇌부는 이를 군통수권자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즉각적인 조치가 이뤄졌다. 김 대통령은 문제의 발언을 한 이충석 장군을 보직 해임과 동시에 강제 전역시켰고, 쿠데타 가능성 등을 감안해 일부러 건들지 않았던 나머지 하나회 출신 장성들도 모조리 강제 전역시켰다. 더 나아가 전군에서 하나회 출신 영관, 위관급 장교들을 색출하라는 지시까지 떨어졌고, 이들 역시 이렇다 할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군을 떠나게 됐다. 대대적인 숙청 이후에도 하나회에 조금이라도 몸을 담았던 군인들은 계급을 떠나 하나회라는 이유만으로 진급과 직위에서 계속 배척을 당했고, 결국 하나회는 과거의 위세와 권력을 완전히 잃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하나회 숙청이 갖는 의미
김 대통령의 하나회 숙청은 한 지도자가 의지와 신념을 갖고 용기 있게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보여준다. 당시 하나회를 건드린다는 것은 꿈에서조차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12.12 신군부 쿠데타 이후 하나회는 군내 요직을 독점하고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정권도 뒤엎을 수 있는 힘이 있었다.
만약 그 당시 김 대통령이 하나회로 대변되는 강력한 군부와 타협해 '어색한 동거'를 했다면, 현재까지도 우리나라는 미얀마 사태와 같은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중론이다. 훗날 김 대통령 본인도 한 인터뷰에서 "내가 하나회를 해체하지 않았다면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은 당선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김 대통령이 아웅산 수치와 달리 타협하지 않고 '매우 과감하고 신속하게' 군부를 숙청함으로써, 우리나라는 정치군인들의 쿠데타 위협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당시 하나회 해체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고, 자칫 잘못하면 힘들게 달성한 민주화가 무너질 수도 있었던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며 "그럼에도 김 대통령은 지극히 '김영삼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방식으로 단번에 역사적 과업을 완료했고, 이것이 갖는 의미는 과거 칠레의 피노체트 유산과 최근 미얀마 사태를 감안할 때 지대하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kschoi@fnnews.com 최경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