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된 정인이 시신이 말하는 것 [김기자의 토요일]
2021.03.20 13:16
수정 : 2021.03.20 13:16기사원문
[파이낸셜뉴스] 조용하던 법정에 탄식이 흘러나왔다. 법정 벽면 스크린에 벌거벗은 작은 몸뚱이가 띄워지면서다. ‘정인이 사건’ 피해자 정인양(입양 후 안율하·사망 당시 16개월)의 부검 당시 사체였다.
최대한 자극적이지 않게 보이려 흑백처리까지 했건만 사체는 그야말로 처참했다. 작은 몸 전체에 상하지 않은 곳을 찾기가 어려웠다. 팔과 다리, 몸통, 머리, 그리고 뱃속까지, 자세히 들여다본 곳마다 상처투성이였다. 공판정에 나선 부검의는 “지금까지 봤던 아동학대 피해자 중 제일 심한 상처”라며 “학대냐 아니냐를 고민할 필요가 없을 정도”라고 증언했다. 20년 가까이, 3800여구의 사체를 부검한 베테랑 부검의의 말이다.
■법정서 공개된 정인양 부검 사진
17일 서울남부지법에서 열린 4차 공판에선 사건의 향방을 가를 주요한 신문이 이뤄졌다. 아동학대의 특성상 사실관계가 바깥에 드러나지 않은 상황에서 부검의의 증언은 당시의 상황을 추측할 핵심적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특히 이날 증인석에 선 부검의는 정인양을 사망에 이르게 한 치명적 복부손상이 최소 5일 간격을 두고 2차례에 걸쳐 이뤄졌다고 증언했다. 정인양 복부를 열어보니 장간막이 길게 찢어져 상당한 출혈이 있었고, 췌장 역시 완전히 절단돼 있었는데, 이 두 장기가 서로 다른 날에 손상을 입었다는 분석이다.
장간막 찢어짐과 췌장 절단이 최소 5일의 간격을 두고 발생했다면 그보다 잦은 외력이 가해졌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더욱이 정인양은 첫 충격이 예상되는 시점에 관련 진료를 받은 기록이 없다. 아이 혼자 넘어지거나 침대에서 떨어지는 정도로는 입기 힘든 췌장 절단 상해가 사망으로부터 최소 5일의 시차를 두고 발생했다면 더는 우발적 사고로 사망에 이르렀다는 주장을 이어가기 어려워진다.
두 가지 손상 모두 성인 여성이 주먹으로 때리거나 단순 낙상으로 발생하기 어려운 것인 만큼 어떤 충격이 가해졌을지 추정하는 것도 중요한 대목이다. 이와 관련해 양모 장모씨는 정인양을 손으로 때렸을 뿐, 발로 밟거나 심각한 복부손상을 입힐 만한 타격을 한 사실이 없다는 입장이다.
■아동학대 혐의만 적용된 양부, 합당한가
치명적 타격이 상당한 시차를 두고 이뤄졌음을 뒷받침하는 부검의의 증언은 양부 안모씨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안씨는 장양이 사망에 이를 수 있는 복부손상을 입은 상황에서 며칠 간 관련된 조치를 하지 않았다. 안씨는 사망 전날 어린이집으로 정인양을 데리러 왔다가 어린이집 원장과 면담을 하기도 했는데, 당시 원장은 법정에서 당시 안씨에게 ‘(정인양을) 병원에 꼭 데려가라’고 말했다는 취지로 증언한 바 있다.
그럼에도 안씨는 정인양을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다.
췌장이 완전 절단, 또는 상당한 수준으로 손상됐을 사망 최소 5일 전의 충격 뒤, 정인양의 상태는 이전과 확연히 달라졌을 게 분명하다. 어린이집에서 제대로 걷지 못하는 모습에 원장이 안씨를 특별히 불러 당부했을 정도였다. 더욱 가까이에서 아이를 보살펴야 할 의무가 있는 부모가 이를 알 수 없었을까.
장씨에게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혐의가 적용될 수 있다면, 안씨에겐 최소한 방조 혐의가 적용될 여지가 있다.
부작위에 의한 살인죄 적용 역시 검토해 볼 만 하다. 형법 제18조는 ‘부작위범’에 대해 “위험의 발생을 방지할 의무가 있거나 자기의 행위로 인해 위험 발생의 원인을 야기한 자가 그 위험 발생을 방지하지 않은 때에는 그 발생된 결과에 의해 처벌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당시 예상되는 정인양의 상태를 고려할 때 적절한 의료적 조치를 하지 않은 양부모의 책임을 보다 중하게 물을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한 것이다.
정인이 사건은 모든 인간이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을 누리는데 있어 부모가 져야만 할 책임이 어디까지인지를 규정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법정에서 공개된 정인양의 생전 상태가 기존에 보도된 것 이상으로 심각했고, 적어도 한 차례 중대한 장기손상을 입은 상태에서 최소 닷새간 어떠한 구급조치도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은 피고인들에게 당초 적용된 것 이상의 혐의를 물을 수 있는 근거가 되기에 충분하다.
경찰이 세 차례 신고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아 사망에 이른 정인양의 죽음 뒤, 이제 검찰과 법원의 역할만이 남아 있다. 유족 없이 떠난 정인양을 시민들이 남아 지켜보고 있다. 그 귀한 마음들에 한이 남지 않는 결말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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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n@fnnews.com 김성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