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라와 태양
2021.04.07 16:56
수정 : 2021.04.07 17:43기사원문
클라라와 태양/ 가즈오 이시구로/ 민음사
가즈오 이시구로는 한국 독자에게 보내는 인사의 말을 통해 이 책이 그의 최고작이라 불리는 ‘남아 있는 나날’과 ‘나를 보내지 마’ 사이에 다리를 놓는 작품이 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나를 보내지 마’는 인간 유전자 복제라는 과학기술을 테마로 하고 있다. ‘남아 있는 나날’은 이시구로 특유의 불완전한 1인칭 화자의 서술을 통해 세상과 인간관계의 부조리함과 슬픔을 담아낸다.
이시구로는 자신이 관심을 가진 테마에 대해 쓰고, 쓰고, 또 쓰면서 더욱 깊이 다가가는 작가다. 그런 면에서 ‘클라라와 태양’은 그가 작가로서 걸어온 궤도 안에 위치하면서 그 정수를 가장 심플하고 깊게 담아낸 작품이다.
작품이 발표되고 난 이후 서구의 유수 언론 매체들은 인공지능 로봇이라는 타자(他者)를 주인공으로 설정했다는 점에서 ‘나를 보내지 마’와 ‘파묻힌 거인’과 한데 묶어 3부작으로 부른다.
다섯 살 때 영국으로 이주하여 평생을 살아온 작가는 '이방인' 혹은 '타자'가 된다는 점에 깊이 천착해 왔고, 현재까지 발표된 그의 작품에는 이처럼 양면적이고 위태로운 다른 사람의 시선을 통해 당연한 듯 존재해온 세상의 근간을 뒤흔드는 조용한 질문들이 담겼다.
다른 사람의 존재와 그 시선의 탐구는 이미 1980년대 영국 문학계에 나타난 당시 신인 작가들이 공유한 시대의식이었다. 영국 저명 문예지 ‘그랜타’는 10년에 한 번, 향후 영국 문학을 책임질 20인의 신인 작가를 꼽는데, 1983년의 리스트에는 가즈오 이시구로와 살만 루슈디, 줄리언 반스, 이언 매큐언, 마틴 에이미스, 윌리엄 보이드 등이 선정됐다.
이들은 이후 40년 동안 영국 현대 문학의 황금세대를 대표하는 거장들이 됐다. 이들 중에서 다수의 부커 상 수상자는 물론 노벨 문학상 수상자까지 배출됐는데 당시 세대 중에서도 가장 큰 문학적 성취를 일군 작가라면 역시 2017년 노벨상 수상자인 가즈오 이시구로를 꼽는다.
이 책은 동화를 한번 써보고 싶다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생각에서 탄생했다. 움직이고 말할 수 있는 장난감이 자신을 데려갈 어린 소녀를 기다리는 이야기를 떠올린 이시구로는 자신의 딸인 나오미 이시구로에게 이야기의 얼개를 들려줬지만 평상시 아버지 소설의 편집자 역할을 해 온 딸의 대답은 어린이에게 들려주었다가는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이시구로는 이 이야기를 동화책이 아닌,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장편소설로 집필하기 시작하여 팬데믹이 세상을 뒤덮기 시작한 시점에 마쳤다. 완성된 소설 ‘클라라와 태양’은 원 모티프의 형상을 그대로 간직한 우화적 SF다.
이야기는 간결하다. 늘 그랬듯이 잔잔한 지문과 대사 사이에 깊은 행간이 있으며 그 '사이'를 읽어내다 보면 가슴 깊이 파고드는 슬픔과 여운이 찾아든다. 세상에서 서로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두 연약한 존재가 우연히 만나는 그 순간부터 아픔은 예약돼 있고, 읽는 이들은 그 슬픈 예감이 운명적으로 실현되는 과정에 이끌려 마지막 페이지까지 차마 눈을 뗄 수 없다. 이는 우화의 힘이자, 그 강력한 힘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거장의 글솜씨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장르를 넘나드는 작가로도 유명하다. 디스토피아적 SF인 ‘나를 보내지 마’, 역사 소설인 ‘남아 있는 나날’, 아서왕 전설을 재해석한 판타지 ‘파묻힌 거인’, 미스터리인 ‘우리가 고아였을 때’ 등 여러 작품을 통해 그는 자신이 쓰려는 테마에 부합하는 형식을 불러와 자유자재로 부린다.
우화적 SF인 ‘클라라와 태양’은 읽기에 따라 디스토피아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이시구로는 빅 데이터, 유전 공학, 인공지능, 그리고 그것이 실현된 세계의 불평등까지 아우르는 근미래적 설정들을 일일이 설명하기보다는, AI인 클라라의 불완전한 인식 구조가 점차 발전해가는 과정을 1인칭 화자의 시선을 통해 담아낸다.
인간이 아닌 존재인 클라라의 인간에 대한 한결 같은 헌신이 실현되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과연 '인간됨'이란 무엇이고 무엇이 인간 개개인을 고유하게 만드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yccho@fnnews.com 조용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