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땅인데 집도 못 지어” 임진왜란 왜군 본거지가 문화재
2021.04.11 09:00
수정 : 2021.04.11 09:00기사원문
【파이낸셜뉴스 울산=최수상 기자】 임진왜란 때 왜군의 본거지로 축조된 서생포 왜성(西生浦 倭城)을 일제가 사적(史蹟)으로 지정한 후 이를 이어 울산시 또한 문화재(자료)로 지정하는 바람에 인근에 주택 신축 허가조차 불허되는 등 재산권 침해 논란이 일고 있다.
■ 법원, 200m 떨어졌지만 문화재가 먼저
A씨는 지난 2020년 1월 울산 울주군 서생면 서생포 왜성과 인접한 곳에 지상 1층, 연면적 96.42㎡ 규모의 단독주택을 신축하기 위해 울산시에 시지정문화재 현상변경 등 허가 신청을 했지만 거부당했다. 해당지역이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으로, 문화재 경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허가 신청을 반려했다.
A씨는 "땅이 문화재와 200m 떨어져 있어 문화재 경관을 해칠 우려가 없다"며 재산권 보호를 내세워 소송을 제기했지만 이달 8일 열린 1심 판결에서 법원도 울산시의 손을 들어주었다.
1심 재판부는 울산시 문화재자료 제8호인 서생포 왜성의 문화재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인근에 단독주택 신축을 제한한 것은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 일제가 직접 사적지 지정하고 큰 의미 부여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 의해 축조된 서생포 왜성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경상도 해안에 세운 18곳의 성루(城壘)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는 왜성 중 가장 크고 보존상태가 좋다. 둘레 4.2㎞, 면적 15만 1934㎡ 규모에 방어를 위한 해자(垓字)까지도 확인됐다. 일본 3대 성의 하나인 구마모토성의 원형으로도 평가받을 만큼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크다는 게 울산시의 입장이었다.
징비록 등 기록에 따르면 실제 서생포 왜성은 거대한 규모로, 한 때 약 7000명의 일본군이 주둔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급기지인데다 사실상 지휘본부였다. 가토 기요마사가 전라·충청도로 진격하자 아사노 요시나가가 3000명의 군사로 이곳을 수비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6명의 왜장들이 잇따라 서생포왜성은 수비하면서 임진왜란 당시 한 번도 침공 당하지 않았다.
이 같은 사실에 일제는 강점기인 1938년 서생포 왜성을 그들의 사적 제54호로 지정하고 큰 의미를 부여했다. 이는 광복 후에도 그대로 유지됐다. 그러다 지난 1997년 1월에서야 사적에서 해제됐지만 불과 9개월 뒤인 10월에 울산시가 문화재 자료 제8호로 재지정 했다.
이를 계기로 일각에서는 일본인 관광객 유치를 위해 서생포 왜성을 복원하자는 주장까지도 나왔지만 일본인 관광객은 커녕 국내 여행객들에게도 외면 받아 현재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한 상태다.
■ 울산 백성들 강제동원 피해
가토 기요마사는 서생포 왜성의 방어를 위해 1997년 10월에 울산 태화강 하류 쪽에 현재의 울산왜성도 축조하기도 했다. 울산왜성 축조에는 40일이라는 짧은 시간이 소요됐는데, 울산지역민 1만6000명이 강제 동원돼 민간의 피해가 컸다. 사실상 지금의 울산 전 역이 일본군 밑에서 큰 고통을 겪었다.
지역 학계 한 관계자는 “임진왜란 당시 우리 민족을 마구잡이로 살해한 왜군의 상징이자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와 같았던 서생포 왜성을 울산시가 큰 고민 없이 문화재 자료로 지정하는 바람에 임진왜란 발생 429년이 지난 지금도 재산권 침해 등 울산 지역민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패소한 A씨는 그동안 자신이 집을 짓고자 하는 땅에서 서생포 왜성이 보이지도 않고, 또 이미 주변에 주택과 창고 등 건물이 존재한다고 주장해왔다. A씨가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할 지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ulsan@fnnews.com 최수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