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세 반영 못한 ‘깜깜이 공시가’에 반발… ‘헐값 수용’ 재미동포는 33억 국제소송까지
2021.04.12 18:27
수정 : 2021.04.13 10:42기사원문
한국토지주택공사(LH) 땅 투기 사건을 계기로 30년 이상 문제로 지적된 '깜깜이 공시지가' 제도의 전면적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거세다. 공시지가 제도는 지가 안정, 공익사업의 효율적 시행이라는 정책성과를 거둔 반면 시세를 반영하지 못해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또 공시지가 산정 기준도 불투명하고, 공시지가에 대한 이의신청 제도는 마련돼 있지만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마포 땅 뺏긴 서씨, 정부에 소송
12일 법조계와 관련업계 등에 따르면 미국이나 아일랜드 등 외국의 경우 과세표준이 되는 공시지가는 시세를 기준으로 산정하거나 이를 반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2018년 9월 미국 동포 서모씨는 한국 정부를 상대로 최초의 '공시지가 토지 수용'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을 제기했다. 서씨는 2001년 서울 마포에 주택 및 토지 188㎡를 3억3000만원에 구입했다. 이후 2012년 마포구는 서씨 소유 토지를 재개발구역으로 지정했다. 이후 2016년 토지수용위원회는 서씨의 토지를 9억5000만원에 수용토록 결정했다. 현행 제도하에서는 재개발 결정이 공식화될 경우 해당 시점의 공시지가를 기준으로 토지(주택) 등을 강제 수용할 수 있다. 서씨는 "시장가격에 미치지 못한다"며 수령을 거부했다. 당시 신규 주택의 분양가는 전용면적 85㎡ 기준 약 7억원에 달했다.
이에 반발한 서씨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근거로 시장가격으로 보상하지 않는 국내 토지보상 체계에 문제가 있다며 ISD 의향서를 제출했다. ISD 소송은 특정 국가의 법률에 따라 이익을 침해당했을 때 국제법에 따라 판단을 요구하는 절차다. 서씨는 공시가격과 실거래가 간 차액 및 정신적 피해보상을 포함한 33억원 규모로 소송을 제기했다.
재판부가 꾸려졌지만 2013년 서씨가 미국 시민권을 획득한 이유 등으로 재판부는 본안 판단을 하지 않고 소송을 각하했다. 이 사건은 우리나라 공시지가의 문제점을 국제법의 관점에서 판단하는 첫 사례로, 만약 정부가 패소했을 경우 토지를 수용당한 외국인의 집단 이의 제기 가능성이 나오기도 했다.
■문제는 '시가 반영' 여부
세금 납부의 기준이 되는 공시지가는 땅의 경우 표준지 공시지가, 주택의 경우 공시가격으로 측정된다. 표준지 공시지가는 '부동산 가격공시 및 감정평가에 관한 법률'에 따라 1년에 한번 국토교통부, 감정평가사가 조사·평가해 단위면적당 가격을 정한다. 표준지 공시지가는 국공유지 매수 시 보상 기준이 되고 개별 공시지가에도 적용된다.
전문가들은 현행 공시지가 제도의 가장 큰 문제로 시세와의 괴리를 꼽았다. 개별 토지의 면적, 성격이 다른데 표준지 공시지가를 기준으로 하다 보니 보정을 거치더라도 인접 토지와의 가격 차가 크다. 부동산이 아파트인지 상가인지, 주택의 경우 단독 주택인지 공동 주택인지에 따라서도 시세반영률이 제각각이라 조세 형평성에도 맞지 않는다.
또 토지 수용 보상금을 정할 때 지나치게 낮은 공시지가로 보상액이 책정되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김은유 법무법인 강산 대표변호사는 "현재의 토지보상 제도는 개발 이익을 불로소득으로 보고 개발이익을 배제한다는 것인데 수용당하는 입장에서는 의사와 상관없이 토지 등을 빼앗기는 것"이라며 "보상액의 기준 시점도 토지수용 시점이 아니라 개발 사업의 사업인정고시일의 공시지가라 보정을 거쳐도 시가와 비교하면 부족하다. 시세를 반영할 수 있도록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성중탁 경북대 로스쿨 교수는 칼럼을 통해 "표준지 공시지가는 정치적 영향에서 자유로운 전문가에게 적정한 시가를 산정토록 해야 한다"며 "각종 세금의 기준이 되는 공시지가 외에도 시가의 대체 수단을 사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공시지가 산정 방식의 투명성도 과제다. 김예림 변호사는 "공시지가 산정 과정이 불투명하다 보니 조세 법률주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논의들이 나오고 있다"며 "공시지가 산정에 대한 이의제도 절차는 마련돼 있지만 실효성도 없고 소송을 해도 이기기 어렵다"고 말했다.
hwlee@fnnews.com 이환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