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은 아시아 혐오, 할리우드선 아시안 파워?

      2021.04.19 15:16   수정 : 2021.04.19 15:21기사원문
"LA에 사는 아들이 아카데미 시상식을 위해 미국에 가려는 나를 걱정하고 있다. 경호원을 붙이자는 제안도 했다. 이건 정말 끔찍한 일이다.

" 13일 오스카 시상식 참석차 출국한 배우 윤여정이 앞서 미국 매체 포브스와 한 인터뷰 내용이다. 대낮에도 아시아 대상 혐오범죄가 자행되고 있는 가운데, 어느해보다 여성과 아시안 등 유색인종을 대거 후보에 올린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1주일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26일(한국시간) 전세계 225개국에 생중계되는 올해 시상식은 역사상 가장 많은 70명의 여성 감독·배우·제작진을 후보로 지명했고 전체 20명의 연기상 후보 중 9명이 유색인종이다.

■할리우드 내 '아시아 물결' 주목
지난해 비영어권 영화로는 최초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기생충’을 정점으로 할리우드의 아시아 물결은 올해도 계속된다. 봉준호 감독의 존재감을 이어받을 주인공은 중국 출신인 ‘노매드랜드’의 클로이 자오 감독이다. 오스카 예측 전문매체 골드더비가 예상한 작품상·감독상 유력 후보인 그는 영국·미국에서 10대 시절을 보내고 미국 대학에서 정치학·영화학을 전공한 39세의 여성 감독이다. 지난해 ‘섬웨어’의 소피아 코폴라 이후 여성감독 사상 두번째로 베니스국제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사자장을 수상한 뒤 아시아계 여성감독 최초로 제78회 골든글로브 작품상·감독상, 제74회 영국아카데미시상식 작품상·감독상을 수상했다. 또 2010년 ‘허트 로커’의 캐스린 비글로에 이어 두번째로 제73회 미국감독조합 감독상도 받았다. '노매드랜드'는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감독상·각색상·여우주연상·촬영상·편집상 6개 부문에 호명됐다.

한국계 미국인 리 아이작 정 감독의 ‘미나리’도 작품상·감독상·각본상·남우주연상·여우조연상·음악상 등 6개 부문에 지명됐다. 정 감독은 클로이 자오 등과 감독상을 놓고 경합하는데, 봉준호 감독이 예상대로 감독상 시상자로 나서고 만약 둘 중 한 명이 수상한다면, 미국 내 아시아 커뮤니티가 다시 한번 들썩일 것으로 보인다. 아시아 배우론 네번째이자 한국배우론 첫번째로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윤여정의 수상도 유력한 분위기다.

특히 영국 아카데미시상식에서 '고상한 영국인'의 허를 찌른 윤여정의 강력한 입담에 세계 영화팬들이 매료된 상태다. 한 해외 누리꾼은 "윤여정이 진심으로 오스카를 타길 원한다"며 "그녀가 미국인들에게 뭐라고 한방 날릴지 너무 궁금하다"고 말했다. ‘미나리’의 스티브 연 역시 새 역사를 쓰고 있다. 아시아계 미국 배우로는 처음으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라 ‘더 파더’의 안소니 홉킨스 등과 경합한다. 이밖에 올해 한국 작품으론 유일하게 한국계 미국인 에릭 오 감독의 ‘오페라’가 최우수 단편애니메이션 부문에 올랐다.

■미국의 정체성과 현실을 담은 두 아시아 감독
두 아시아인 감독이 만든 '미나리'와 ‘노매드랜드’가 역설적이게도 가장 미국적인 영화로 주목받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포브스는 앞서 “미나리는 한국계 미국인 가족 이야기이지만, 이민자들이 어떻게 미국을 만들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라며 미국이 ‘이민자의 나라’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특히 이 영화는 인종차별적 경험보다 바퀴 달린 집에 살면서 미국땅에 뿌리내려려고 고군분투하는 한 가족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면서 미국 이민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리 아이작 정 감독은 앞서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과거 아시아계 영화인들은 우리의 얼굴을 스크린에 비추기 위해 투쟁했다면, 지금은 한 '사람’으로서 우리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며 변화를 짚었다.

‘노매드랜드’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몰락한 중산층이 ‘하우스리스’로 사는 모습을 담고 있다. 동명의 논픽션을 영화로 옮긴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극영화로 21세기 미국사회의 새로운 유랑(nomad)족의 사연을 생생히 전한다. 직장과 남편을 잃은 한 중년여성이 낡은 차에 몸을 싣고 일자리를 찾아 여기저기 떠다니는 모습은 사회급변에 따른 미국의 실업문제 등을 엿보게 한다. ‘노매드랜드’는 또한 자오 감독을 바라보는 미·중 양국의 서로 다른 시선이 마치 현실의 미·중 갈등을 보는 듯하다. 타임지는 올해 자오 감독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차세대 100인’ 중 한명으로 꼽으며 ‘혁신가’로 명명했다면, 중국은 이 여성감독을 배신자로 낙인찍고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 생중계를 하지 않기로 했다. 자오 감독이 과거 “중국은 거짓말이 도처에 널린 곳”이라고 인터뷰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진 여파다.

인종차별적 시선에도 불구하고 아시아계 영화인들의 활약은 계속된다. 자오 감독은 마블 히어로 영화 최초로 성소수자 슈퍼히어로가 등장하는 ‘이터널스’의 연출을 맡으며 할리우드 주류에 진입했다. 스티븐 연은 내년 여름 개봉하는 ‘겟 아웃’의 조던 필 감독의 차기작 합류 소식을 전했다. 연은 중국계 미국인 앨리 웡과 함께 코미디 연기를 선보일 TV시리즈 '비프'의 주역도 맡았다.
윤여정 역시 재미 한인작가 이민진 원작의 재일 한인 가족 3대 이야기인 애플TV플러스의 ‘파친코’에 출연한다.

전찬일 영화평론가는 “미국사회 내 아시아인의 약진은 아시아계 대상 혐오범죄를 국가적 관심사로 확장하는데 기여했다”며 “특히 윤여정은 범죄의 우려 속에서 아카데미에 용기 있게 참석하며 연기뿐 아니라 삶의 태도 역시 큰 주목을 받게 됐다”고 말했다.
"(인종차별주의자) 트럼프 집권 당시 오스카는 오히려 반트럼프 영화에 작품상을 안겼다"며 "미국의 극우는 아시아인의 수상을 여전히 못마땅해 하겠지만, 오스카 내 아시아 물결은 미국을 좀 더 건전한 사회로 만드는데 일조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jashin@fnnews.com 신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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