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화폐 거래소 폐쇄? 4년째 말만
2021.04.23 18:34
수정 : 2021.04.23 18:34기사원문
2021년 "9월에 다 폐쇄될 수 있다"
2009년에 등장한 비트코인
12년째 질긴 생명력 이어가
어른들, 청년층에 훈계보다
선제적 안전판 마련 나서길
[파이낸셜뉴스] 은성수 금융위원장이 22일 "가상화폐 거래소가 200개가 있지만 다 폐쇄가 될 수 있다. 9월에 갑자기 폐쇄될 수 있다"고 말했다. 국회 정무위원회 답변에서다.
◇1막: 2017~2018년
문재인정부 첫해인 2017년 하반기에 비트코인 광풍이 불었다. 덩달아 정부도 바빠졌다. 연말 정부는 '가상통화 특별대책'을 내놨다. 가상통화 거래 실명제를 도입하고 불법행위에 법정최고형을 구형한다는 내용 등이다. "법무부는 가상통화 거래소 폐쇄를 위한 특별법 제정을 건의했다"며 "향후 거래소 폐쇄 의견을 포함해 모든 가능한 수단을 열어 놓고 대응 방안을 검토해 나가기로 했다"는 대목도 보인다.
이어 박상기 당시 법무장관이 2018년 1월 신년 기자간담회에서 "가상화폐 거래소를 통한 거래를 금지하는 법안을 준비 중이고, 거래소 폐쇄까지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시장에서 난리가 났다. 비트코인 세대인 20∼30대 청년들의 반발이 컸다. 급기야 얼마뒤 정부는 "법무장관이 언급한 거래소 폐쇄 방안은 향후 범정부 차원에서 충분한 협의와 의견조율 과정을 거쳐 결정할 예정"이라고 해명하는 자료를 냈다. 한 발 물러선 셈이지만, 그렇다고 거래소 폐쇄 아이디어가 쓰레기통에 처박힌 것은 아니다.
박상기 장관으로선 억울한 측면도 있다. 거래소 폐쇄 이야기를 불쑥 꺼낸 게 아니라서다. 이미 보도자료에 나온 걸 한번 더 강조했을 뿐인데 여론의 반응은 확 달랐다. 장관이라는 자리가 갖는 무게가 그렇게 달랐다.
당시 최흥식 금융감독원장도 구설에 올랐다. 최 원장은 2017년 말 송년 기자간담회에서 "결국 (비트코인) 거품이 빠질 것"이라며 "내기를 해도 좋다"고 말했다. 비트코인을 도박이라고 비판하던 금융당국의 수장이 스스로 내기를 걸었으니 여론이 들끓을 수밖에.
최종구 전 금융위원장은 2018년 초 국회 정무위에서 "정부가 가상화폐 거래소를 전면 폐쇄하거나 불법행위를 저지른 거래소만 폐쇄하는 두 가지 방안을 모두 검토하고 있다"는 취지로 말했다. 예나 지금이나 금융당국이 가상자산을 보는 시각은 부정일색이다.
◇2막: 2020년~
작년 초 코로나 바이러스가 지구촌을 덮쳤다. 미국 등 주요국이 일제히 돈을 풀어 대공황급 위기를 막았다. 하지만 마구 푼 돈은 대가를 치르게 마련이다. 돈도 상품이다. 공급이 늘면 값어치가 떨어진다. 법정화폐의 대안으로 주목을 받는 게 바로 비트코인과 같은 암호화폐다. 비트코인은 작년 여름 슬슬 오름세를 타더니 가을부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기 시작했다. 올들어서도 굴곡은 있지만 상승세가 완전히 꺾인 건 아니다.
덩달아 정부도 바빠졌다. 지난 22일 국무조정실은 4~6월 석 달을 범정부 특별단속기간으로 정한다고 발표했다. 이때 정부는 두 가지 일정을 강조했다. 먼저 9월24일. 은성수 위원장이 "9월에 갑자기 폐쇄될 수 있다"고 말한 바로 그 날이다. 가상자산 사업자들은 이날까지 일정한 요건을 갖춰 금융위원회 산하 금융정보분석원(FIU)에 신고해야 한다. 일정 요건이란 정보보호관리체계(ISMS) 인증, 실명확인 입출금 계정 등을 말한다.
이는 '특정 금융거래정보의 보고 및 이용 등에 관한 법률'이 정한 의무사항이다. 특금법 개정안은 지난해 3월 국회를 통과했다. 가상자산을 이용한 자금세탁 등을 막는 게 목적이다. 이는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FATF)가 한국을 비롯한 회원국에 요청한 사안이기도 하다. 개정안은 1년 유예를 거쳐 올 3월(25일)부터 시행됐다. 다만 거래소 신고 등은 9월(24일)까지 6개월 말미를 줬다.
눈여겨 볼 두번째 날짜는 2022년 1월이다. 이때를 기점으로 정부는 가상자산 차익에 세금을 물린다. 관련 소득세법 개정안은 작년 정기국회에서 통과됐다. 한 해 250만원 넘게 벌면 양도차익에 20% 세금을 매긴다.
이제 공은 은행으로 넘어갔다. 검증 부담을 떠안은 은행이 깐깐하게 굴면 가상자산 거래소가 실명확인 입출금 계정을 트기가 어렵다. 그런데 요즘 은행들은 라임·옵티머스펀드 사태로 잔뜩 몸을 사리고 있다. 가상자산 스캔들에 휘말릴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은 위원장의 '폐쇄' 발언은 은행에 주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이다.
대형 거래소 4사(빗썸·코인원·업비트·코빗)는 살아남을 공산이 크다. 그러나 군소 거래소들은 목숨이 위태롭다. 투자자들도 비상이 걸렸다. 은 위원장은 "가상자산에 투자한 이들까지 정부에서 다 보호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금융위 설명자료(2021년 4월22일)에 따르면 가상자산 사업자 수는 100~200여개로 추산된다. 가상자산 사업자는 거래업자, 보관관리업자, 지갑서비스업자를 말한다. 이 중 거래업자(거래소)만 100여곳에 이른다.
◇보호는 없지만 세금은 내라?
은 위원장의 강경 대응 방침은 일견 이해할 만하다. 누가 봐도 가상자산 시장엔 거품이 끼었다. 언제 푹 꺼질지 모른다. 금융당국이 경고음을 울리는 것은 바람직하다. 박상기·최종구·최흥식·은성수의 발언에서 보듯 거래소 폐쇄는 아직 살아 있는 카드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자. 세금은 걷으면서 투자자 보호는 내 알 바 아니라는 태도가 과연 옳은 것인가. 내 눈엔 모순이며 정부의 오만으로 비친다. 갱단도 보호를 대가로 수금하는데, 정부가 이래서야 쓰나. 손실을 보전하란 얘기가 아니다. 주식처럼 가상자산 투자에서 돈을 잃으면 100% 본인 책임이다. 아무리 '경험치' 낮은 20~30대라도 이걸 모를까. 중뿔나게 어른이 나서서 가르칠 필요조차 없다.
다만 주식·채권·사모펀드·파생상품 시장과 마찬가지로 가상자산 시장에도 최소한의 룰이 필요하다. 이미 가상자산 시장의 거래 규모가 전통 증시를 넘어섰다. 아무리 눈엣가시라도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무자격 거래소를 퇴출할 때 투자자 피해를 최소화하고, 마구잡이 코인 상장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장차 코인이 어디로 튀든 투자자 곧 납세자를 위해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것은 정부의 책무다.
◇대선·정치가 변수
민주당 이광재 의원은 23일 페이스북을 통해 "암호화폐 정책, 그때도 틀렸고 지금도 틀렸다"고 비판했다. '그때'는 2018년 박상기 장관 발언, '지금'은 2021년 은성수 위원장 발언을 뜻한다. 이 의원은 투자자 보호를 외면한 과세에 대해 "청년들이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노웅래 의원 역시 22일 페이스북에서 "내년부터 20% 양도세를 걷겠다면서 최소한의 투자자 보호조차 못 하겠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며 은 위원장의 발언을 걸고 넘어졌다. 노 의원은 "가상화폐를 미래 먹거리로 활용할 생각은 안 하고, 투기 수단으로 폄훼하고 규제하는 것은 금융권의 기득권 지키기이자 21세기판 쇄국정책"이라고 비꼬았다.
1991년생 전용기 의원은 아예 은 위원장의 발언을 "기성세대의 잣대로 청년들의 의사결정을 비하하는 명백한 ‘꼰대’식 발언"이라고 맹공을 퍼부었다. 전 의원은 “금융위원장의 경솔한 발언에 상처받은 청년들께 죄송의 말씀 올린다”며 대신 사과했다.
민주당은 23일 비상대책회의에서 "당 차원에서 청년세대에게 가상화폐 투자가 불가피한 현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과, 소통의 필요성에 공감했다"고 말했다(최인호 수석대변인).
4·7 보궐선거에서 청년층은 민주당을 버렸다. 야당 국민의힘은 반사이익을 얻었다. 내년 3월 대선을 앞두고 청년 민심을 겨냥한 양당의 러브콜은 필연이다. 경제·금융도 결국은 정치의 영역이다. 정치가 목소리를 내면 가상자산 정책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비트코인의 운명
가상자산의 운명을 누가 알겠는가. 비트코인·도지코인 낙관론자인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도 모르고, 비관론자인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도 모른다. 확실한 건 2009년에 모습을 보인 비트코인의 생명력이 생각보다 길다는 것이다. 이럴 땐 성급한 판단보다 추이를 지켜보는 게 상책이 아닐까. 비트코인 투자를 장려할 필요도 없고, 거래소를 폐쇄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을 필요도 없다.
대신 금융당국이 진짜로 해야 할 일이 있다. 가상자산 시장 덩치가 산만큼 커졌다. 자칫 금융 시스템 리스크를 부를까 걱정이다. 장기 폭락에 대비한 선제적인 스트레스 테스트를 금융당국에 권한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