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수출 늘린 韓 정유사, 웃을 수만은 없는 이유

      2021.05.29 10:44   수정 : 2021.05.29 14:36기사원문
[파이낸셜뉴스]

올해 초 미국 최대 오일메이저 엑슨모빌(Exxon Mobil)은 호주 정유시설 알토나(Altona)를 더이상 운영하지 않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원유를 수입해 정제과정을 거쳐 휘발유, 항공유 등 석유제품을 생산하던 기존 시설을 연료수입 터미널로 전환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영국 오일메이저 브리티시 페트롤리엄(BP)도 작년 말 같은 결정을 내렸습니다.

호주 최대 정유설비인 퀴나나(Kwinana)를 폐쇄하기로 한 것입니다. 퀴나나는 호주 최대 정유설비입니다.
호주 석유제품 생산량의 24%를 담당하고 있죠.

두 오일메이저의 발표로 호주에서 가동 중인 정유공장은 이제 두 곳만 남게 됐습니다. 10년 전 총 7개였던 호주 정유설비는 이제 곧 2개로 줄어듭니다. 오일메이저들이 이같은 결정을 내린 이유는 설비 노후화로 인해 수익성이 감소한 탓입니다. 코로나19 여파로 석유제품 수요가 감소하자 막대한 손해가 발생한 것이죠.

수십 년간 이들 시설에 대한 투자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은 점도 한몫했습니다. 시설을 개보수하거나 신규 설비를 도입해 생산 효율을 끌어올려 수익을 높여나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국제적인 탈탄소, 탈석유 바람도 거세지면서 효율성 낮은 설비를 굳이 유지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겁니다.

정유시설 폐쇄에 '에너지 안보' 위협

호주 정부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습니다. 호주 정부 역시 탈석유, 탈탄소 정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정유시설 폐쇄는 이같은 정책 방향과 다르지 않죠. 다만 그 속도가 너무 빠르다고 보고 있습니다. 호주 에너지당국은 엑슨모빌의 결정에 대해 "매우 실망했다"고 발표했습니다.


그간 호주 당국은 오일메이저 측에 자국 내 정유시설을 유지해달라고 요청해왔습니다. 작년 9월 이들 시설을 유지해 달라며 10년간 총 23억호주달러(약 1조9750억원)를 지원하겠다고 제안했지만 대다수 기업이 이를 거절했습니다.

호주 정부가 오일메이저의 정유시설 폐쇄 결정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에너지 안보'와 '일자리'입니다.

정유시설이 사라지면 휘발유, 항공유 등 직접 생산하던 석유제품을 수입해야 합니다. 전기차, 수소 등 친환경 연료 확대에 따라 석유제품 수요량이 점차 줄겠지만, 아직 초기 단계입니다. 기존 내연기관을 대체할 만큼 상용화되지 않았습니다. 아직 석유연료 수요가 많은 상황에서 석유제품을 수입에만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 셈입니다. 친환경 에너지 전환 속도와 보조를 맞춰 정유시설을 줄여나가려는 호주 정부에겐 오일메이저들의 결정이 아프게 다가왔을 겁니다.

정유시설 지원 예산 편성한 호주 정부

호주해운노조(MUA)는 BP의 퀴나나 폐쇄 발표에 "이 정유소가 문을 닫기 전에도 호주 정제 연료의 90% 이상이 해외에서 유입돼 해양 공급망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위기에 심각한 노출을 겪고 있다"며 "대유행, 군사 분쟁, 자연재해 또는 경제적 충격으로 인해 호주로의 연료 공급이 중단되면 상황은 재앙이 될 것이고 국가 전체가 중단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정유시설에서 일하던 노동자들도 문제입니다. 한순간에 일자리를 잃게 됐습니다. 엑손모빌이 문을 닫겠다고 발표한 알토나에는 350명의 숙련공이 일하고 있습니다. 지역사회에 미치는 여파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호주 정부는 이제 남은 두 곳의 정유시설만이라도 사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시드니무역관 관계자는 "최근 호주 정부는 2021~2022 예산안을 발표하면서 남아있는 정유공장을 지원하기 위한 예산을 편성했다"며 "호주 정부 측도 자원안보 측면 등에서 최근 정유공장 폐쇄에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고 전했습니다. 하지만 남은 두 정유시설인 엠폴(Ampol)의 리턴(Lytton)과 비톨(Vitol)의 비바에너지(Viva Energy)도 폐쇄 여부를 검토하고 있습니다.

韓 정유사, 호주 수출량 늘었지만..

이를 기회 삼아 국내 정유사들은 호주 수출량을 크게 늘리고 있습니다. 수백수천의 파이프가 얽히고설켜 있는 거대한 규모의 정유설비는 단 한 번에 멈춰 세울 수 없습니다. 조금씩 생산량을 줄여나가야 합니다. 연내에 설비 가동을 멈추겠다고 발표한 만큼 생산량이 감소하고 있습니다.

대한석유협회가 발표한 국내 정유사의 올해 1·4분기 대(對) 호주 석유제품 수출 통계를 살펴보면 경유 수출량이 크게 늘었습니다. 올해 1·4분기 호주향 경유 수출량은 499만배럴에 달했습니다. 작년 같은 기간 221만5000배럴의 두 배가 넘는 양입니다. 경유 수출이 늘어난 덕에 코로나19 탓에 항공유 수출량이 90% 넘게 대폭 감소했음에도 전체 수출량은 되레 늘어났죠.


SK에너지는 1·4분기에 매월 30만~60만배럴 정도를 수출했다고 합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호주에 경유 수출을 하지 않았던 회사입니다. 앞으로도 매월 60만배럴 가량을 꾸준히 수출할 계획입니다.

이같은 수출량 증대에도 호주 정유시장을 바라보는 국내 정유사들의 마음이 편치만은 않습니다. 한국 정부도 탈탄소, 탈석유 정책을 급속하게 추진하고 있는 터라 호주와 같은 상황이 한국에서도 벌어질 수 있다고 우려합니다.

글로벌 2·4·5위 韓 정유공장..탈탄소 도전 직면

한국은 기름 한 방울 나지 않지만 정유설비에 대한 투자를 지속해서 이어왔습니다. 그 결과 세계 5위 규모의 정유설비를 보유하게 됐습니다. 국가별 정제능력은 미국, 중국, 러시아, 인도에 이어 다섯번째입니다. 단일 정제공장별 정제능력을 따져봐도 최상위권입니다. 전 세계 정유공장 600여곳 중 세계 5위권에 국내 정유사 3곳이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죠. 2위 SK에너지(울산), 4위 GS칼텍스(여수), 5위 에쓰오일(울산) 입니다.

석유업계 관계자의 설명을 들어보겠습니다.

"현재 한국은 석유제품 수출국입니다. 국내에서 다 쓰고도 남아서 수출하고 있습니다. 정부의 탄소제로 정책의 구체적인 플랜이 부족하고 또 너무 급합니다. 큰 비용을 치르지 않고 탈탄소 사회로 전환하기 위해선 현재 정제능력을 유지한 채 탄소를 저감하는 기술이 필수적입니다. 석유산업이 글로벌 경쟁력을 유지한 채 향후에도 안정적인 석유제품 공급할 수 있도록 정부 차원의 지원 필요합니다."


호주의 에너지 안보 위협 "남의 일 아냐"

석유 수요가 단기간에 급감할 가능성은 작다고 합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SDS(Sustainable Development Scenario)를 적용했을 때 전체 에너지 중 석유가 차지하는 비중은 2019년 40.5%에서 2040년 30%로 줄어듭니다. SDS는 청정에너지 전환 가속화를 위한 시나리오입니다. 전세계 온실가스 최대 배출시기를 2019년으로 잡았습니다. 2019년 배출량 최대치를 찍고 점차 줄어든다는 가정이죠. 정유업계에게 가장 가혹한 시나리오인데도 석유는 여전히 주요 에너지원으로 자리 잡는다는 예측입니다.

정유업계는 석유제품 수요가 20년 후에도 상당 비중을 차지하게 될 상황인 만큼 국내 정유시설의 생산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탄소저감 기술이 제대로 연구·개발되지 않은 채 탄소중립 목표를 달성하려면 국내 석유제품 생산량을 줄여야 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설명입니다. 정유시설이 축소되면 석유제품을 수출하던 한국이 거꾸로 석유제품을 수입에 의존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죠.

호주뿐만 아니라 일본, 뉴질랜드, 필리핀 등에서도 노후 정유시설이 폐쇄되거나 폐쇄 논의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들 국가도 호주처럼 직접 생산해오던 석유제품의 상당량을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할 수 있는 것이죠. 국내 정유사들이 탄소배출을 줄이면서도 현재 생산능력을 유지한다면 이들 국가에 석유제품 수출량을 더 늘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얻은 이익으로 친환경 에너지에 투자할 비용을 얻을 수 있다는 구상입니다.


정유업계는 탄소세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탄소세는 탄소배출량이 많은 산업에 부과하는 세금입니다. 추가적인 세금을 부과하면 이들 기업이 세금 회피를 위해 탈탄소 정책에 적극적으로 따르지 않겠냐는 발상입니다. 스웨덴, 스위스, 핀란드 등 유럽 국가를 중심으로 도입돼 왔고요. 탄소 배출량 세계 순위 5위인 일본도 탄소세를 도입했습니다.

탄소세 재원..文 대통령의 '공정한 전환'에 써야

국내에서도 탄소세 도입 논의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지난달부터 한국조세재정연구언이 '탄소 가격 부과 체계 개편 방안'을 위한 연구 용역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르면 올해 하반기 결과가 나올 것으로 보입니다.

정유업계는 탄소세로 걷은 세원을 전통산업의 탄소저감사업에 우선 적용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지난 3월 탄소세가 도입될 경우 국내 기업의 추가 부담이 연간 7조3000억원에서 최대 36조3000억원에 달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이 재원을 탄소 포집·저장·활용 기술, 청정합성연료 개발, 사업장 저탄소 연료 전환 인센티브 등 탄소저감 기술의 연구개발에 투입해 달라는 목소리입니다. 국내 정유설비의 생산능력을 줄이지 않은 채 탄소중립을 유지하는 해결책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유승훈 교수는 '공정한 전환'을 언급했습니다. 공정한 전환은 지난 3월 충남 보령 화력발전소를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 발언의 핵심 키워드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문 대통령은 "재생에너지 전환은 지역 경제에 타격을 주지 않고 아무도 일자리를 잃지 않도록 공정한 방법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유승훈 교수는 "탄소세를 부과해 이산화탄소 배출하는 산업을 퇴출시키고, 그 재원을 전기차, 재생에너지 보급 확대 등에 쓰자는 주장이 있다"면서도 "대통령이 천명한 공정한 전환에 맞지 않는다. 유럽도 미국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어 "산업과 일자리를 지키면서 이산화탄소를 줄일 수 있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공정한 전환"이라며 "탄소세 재원이 마련되면 전통적인 산업의 탈탄소화를 지원하는 형태가 돼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eco@fnnews.com 안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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