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마시면 다르다, 책으로 만난 술의 역사

      2021.06.19 11:16   수정 : 2021.06.19 19:53기사원문
[파이낸셜뉴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많은 것들이 어쩌면 당연한 게 아닐 수 있다. 무언가에 대해 공부한다는 건 당연하게 여기던 어떤 것들을 더는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걸 뜻한다.

새해 첫 독서로 술에 대한 책을 집어든 것도 그래서였다.

얼마나 많은 술을 비우면서도 그 술이 무엇인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어디서 왔고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또 어떤 이야기를 써내려갈 것인지 관심을 가져보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시작은 어느 술자리였다.
외국생활을 오래 한 어느 친구가 한국은 술 문화랄 게 별로 없다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평생을 한국에서 산 나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엄격한 회식자리부터 편안한 분위기에서 마시는 술자리, 여름 저녁이면 한강변에서 펼쳐지는 풍경까지. 축구장이나 야구장에선 맥주 마시는 커플과 깡소주 드시는 아저씨까지 어우러지는 게 우리나라 아니었나 말이다.

술도 좀 되었겠다 서로 주고받는 논쟁이 시작됐는데,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한국 술 문화가 얄팍하다는 결론으로 다가섰다.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다곤 하지만 결국 한국인 대부분이 마시는 술과 그 술을 마시는 방식이 다른 나라에 비해 훨씬 적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우리 선조들에 비해서도 말이다.

한국의 대표 주종은 누가 뭐라 해도 소주와 맥주다. 현재 소주는 하이트진로와 롯데주류가, 맥주는 오비맥주와 하이트진로, 롯데주류가 대부분의 물량을 생산한다. 결국 대기업이 대규모 공장에서 제조한 술이 한국의 대표 술이란 결론이다.

구체적으로 들여다봐도 이상한 점은 한둘이 아니다. 우리가 마시는 소주는 증류주가 아니라 희석주다. 희석주라 하면 전통적인 증류주와 달리 식용 알코올을 제조해 물에 탔다는 것인데 정통 소주와는 여러모로 거리가 멀다. 기업들조차 앞 다퉈 고급 증류 소주를 내놓는 모습은 우리가 마시는 소주가 정통이 아님을 반증한다.

맥주 역시 마찬가지다. 세계적으로 공인된 맥주 가짓수는 모두 100가지가 넘는데 한국에서 맥주라 하면 사실상 미국식 라거 뿐이지 않은가. 그마저도 100% 몰트가 아니라 전분이나 다른 재료를 넣는다 해서 수차례 논란이 일었다.

왜일까. 궁금했다. 그래서 책을 폈다.


호주가 '럼'이 세운 국가라고?

<술에 취한 세계사>는 술에 대한 다양한 이야깃거리 모음집이다. 딱딱한 원론서나 역사서라기보단 술을 매개로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공간을 초월해가며 흥미로운 이야기를 모아놓은 책이다. 영국 유명 블로거라는 저자 마크 포사이스의 전공이 그대로 녹아들어 각 장 별로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가 여럿 담겼다.

자연 상태에서 술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인류가 왜 술을 마시게 됐는지 등의 의문으로부터 시작해 이집트와 그리스, 로마를 거쳐 유럽과 호주, 러시아, 북미 등을 오가며 각 나라의 술의 발전사를 다룬다. 이 과정에서 세계 술을 양분해왔다 해도 과언이 아닌 맥주와 와인의 역사부터 다채로운 증류주의 발전사가 술술 풀어진다.

술에 대한 기초적인 상식이 있다면 이해가 더욱 쉽겠지만 없더라도 충분히 읽을 수 있는 수준이다.

흥미로운 부분 몇 가지를 적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호주의 출발을 술로 풀어낸 부분이 인상적이다. 책에 따르면 호주의 초창기는 곧 ‘럼’의 역사라 할 만하다. 사탕수수 발효주인 럼은 사탕수수가 대항해시대 이후 주요 곡물로 떠오르며 인기를 끄는데, 위스키나 브랜디에 비해 값이 저렴해 널리 보급됐다. 선원들에게도 인기를 끌어 이 시대 항해하는 배라면 어디든 럼을 잔뜩 싣고 있는 게 보통이었다.

그 시기 영국에서 범죄자들을 문명화되지 않은 땅으로 보내는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미개척지는 호주로, 군인들이 수송을 맡아 수만의 범법자를 호주로 실어 날랐다. 화폐는 물론 기본적인 건축물도 없었던 이곳에서 범죄자들은 자기들만의 삶의 방식을 체득하기 시작한다.

오스트레일리아 유배지를 생각해낸 시드니 경은 굉장히 유토피아적이고 끔찍이도 도덕적인 구상에 따라 계획을 짰다. 죄수를 그곳으로 이송하려 한 까닭도 고통을 주기보다 교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중노동, 맑은 공기, 자연과 같이 긍정적이지만 막연한 것들을 교화수단으로 구상했다. 또한 알코올과 돈 없이는 범죄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생각에 그 두 가지를 허용하지 않기로 했다. 233p

하지만 계획은 초기부터 무산된다. 범죄자들을 호송한 군인과 선원들부터 술 없는 노동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호주에 정착한 범죄자들 사이에서도 밀주는 물론 밀수가 횡행했고, 화폐 없는 대륙에서 술보다 화폐 역할을 잘 할 수 있는 상품도 없었다. 곧 총독들도 암암리에 술을 허가하기에 이르렀다.

저자는 ‘바운티 호의 반란’ 으로 유명한 윌리엄 블라이 함장이 호주 총독으로 들어와 마주한 일련의 사건을 언급하며, 사실상 호주를 럼이 세운 것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한다. 그가 내부 반란과 맞닥뜨려 결국 실각한 것이 본국 방침에 따라 술을 금지하려 했기 때문이란 것이다. 놀랍게도 이는 정설이다.


금주법이 망친 미국 '술', 한국과도 다르지 않다

책에 등장한 미국의 사례는 한국의 오늘과 관련지어 생각해봄직하다. 미국은 술에 있어 후진국이란 평가를 면치 못하는 나라다. 막대한 술 소비와 자본력, 유서 깊다 주장하는 몇몇 양조장에도 주류업계에선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공식적으로 1920년부터 1933년까지 이어진 금주법 때문이다.

여성의 출입이 불허되는 살롱문화에 대한 페미니스트의 반발에서 출발한 금주법은 당시 1차대전 및 선거국면과 맞물려 전면적인 알코올 불허 법 개정 운동으로 발전한다. 이로 인해 미국엔 최소 십 수 년 동안 제대로 된 양조장이 서지 못하게 된다. 대도시엔 몰래 술을 유통하는 업자들이 있었지만 범죄조직과 손잡고 빼돌린 공업용 알코올로 제조한 밀주를 유통하는 게 고작이었다.

국경이나 항구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괜찮은 수입품을 입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금주법이 폐지된 1933년에 이르면 13년 동안 제대로 된 술을 마셔본 적이 없는 미국국민이 대부분이었다. 좋은 맥주 맛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양조 기법을 잊어버린 양조장으로선 다행한 일이었다. 그 후 반세기에 걸쳐 미국이 형편없는 맥주와 시시한 포도주와 역겨운 호밀 위스키나 만든다는 평판을 떨쳐버리지 못한 것은 합당한 일이었다. 300p

1차대전으로 인한 곡물값 폭등과 금주법 이후 양조장들이 양조 기법을 잃어버렸다는 대목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오늘날 한국이 희석식 소주와 미국식 라거 맥주를 서로 섞어 마시는 게 가장 흔한 음주풍토로 자리 잡은 것엔 비슷한 역사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제치하 36년, 그 중에서도 경제적 침탈이 집요했던 2차 대전 시기를 겪어내며 한국의 양조장과 양조 기법이 씨가 마른 건 널리 알려진 일이다. 그나마 만들기 쉽고 기법이 구전돼 온 막걸리 등 쌀 발효 탁주도 곡물이 많이 들어가는 탓에 권장되지 못했다.

희석식 소주는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특별한 술이다. 제조업이 일반화된 나라에서 필요한 알코올을 저렴하게 공급하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초래한 결과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대로다.

맥주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에서 미국식 라거맥주, 그것도 유럽에 비해 맥아를 중시하지 않던 맥주가 일반화된 건 미군 주둔과 미국의 원조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랜 동안, 심지어는 자국민에게조차 ‘맛이 없다’는 오명을 뒤집어 쓴 채 두 주종을 섞어 마시는 게 유행한 건 이런 아픈 역사에 기인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술에 취한 세계사>가 한국 등 아시아를 제대로 다루고 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우리와 무관한 이야기라 볼 수 없는 건 이 때문이다. 우리 역시 알코올이 없이는 살 수 없는 평범한 인간이다. 러시아·미국·아이슬란드·노르웨이·뉴질랜드 등과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역사상 단 한 번도 금주령이 지켜진 적이 없는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들이 살고 있는 국가인 것이다.

술에도 공부가 필요하단 건 이 책을 읽은 내가 스스로 느끼는 바다. 정말이지 다른 많은 것과 마찬가지로 알면 다르게 보인다. 술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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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n@fnnews.com 김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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