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순간' 감독 "30대남과 70대녀의 멜로, 제주 반응은 육지와 달랐죠"(인터뷰)
2021.07.07 01:28
수정 : 2021.07.07 08:04기사원문
[파이낸셜뉴스] “할머니랑 같이 봤어요~! 당황했던 저와 달리 할머니는 부드럽게 받아들이시더라고요. 오히려 젊은 제가 선입견에 싸여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주를 이렇게 아름답게 담은 영화가 있었나, 싶었어요. 아름다운 제주, 아름다운 사랑, 아름다운 순간을 다룬 소중한 영화에요.”
“소녀가 나이가 들면 할머니가 된다. 순간이라서 더 아름답고 안타까웠던 인생의 빛나는 순간... 좋은 영화였습니다.”
영화 ‘빛나는 순간’에 달린 호평이다.
극중 진옥의 삶을 다큐로 담는 과정을 통해 제주 해녀들의 강인한 생명력과 삶의 지혜를 담아냈을 뿐 아니라 한국의 대표 관광지인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 이면의 아픈 역사도 보듬는다. 여기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남녀의 사랑이 보태지면서 순한 맛의 휴먼드라마가 아니라 강렬함을 덧댄 멜로영화로 완성됐다.
영화는 해녀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으려 제주도에 내려온 경훈이 다큐 찍기를 거부하는 진옥의 삶에 서서히 스며들고, 일상을 공유하던 중 우연히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남자와 여자로서 서로를 바라보게 된다는 내용이다.
소준문 감독은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왜, 사랑하는 사이로 만들었냐’는 것이었다”고 회상했다. “젊은 남자가 왜 이렇게 나이든 해녀를 사랑하느냐? 해녀에게 섹시함이라든지 뭔가 남자가 반할 수 있는 포인트를 만들어줘야 하지 않느냐고 했다. 모성애로 치환하라는 조언도 있었으나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유는 “감정엔 나이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감정이 사랑 아닌가. 감정은 서로가 느끼는 것이지 이해의 문제는 아니다.”
제주도 출신의 국민배우 고두심 역시 둘의 사랑에 의문부호를 달지 않았다. ”현장에서도 선생님은 진옥이 경훈을 왜 좋아하는지 묻지 않았다. 그냥 ‘사람이니까, 그래’라고 생각하셨다. 영화 촬영에 도움을 주셨던 제주 해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ㅡ마음을 열고 보면 참 아름다운 영화인데 호평들 속에 불편한 심경을 드러낸 격한 반응이 간혹 보이더라. 영화에서도 딱 한번 이들의 사랑에 부정적 반응을 보이는 장면이 나온다.
원래 경훈의 회사 선배가 “역겨워”라고 말하면, 경훈이 ‘사랑은 사랑이야’라고 응수했는데, 편집 과정에서 그 대사를 삭제했다. 굳이 내가 답을 주고 싶지 않더라. 초고는 지금보다 좀 더 뾰족한 느낌이 강했다. 2년간 시나리오를 수정하면서 제주도 해녀와 제주도민의 시선으로 사물과 인물의 감정을 바라보게 됐고, 내가 나서서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는 관객이 인물들의 감정을 발견하고 느끼는 방식으로 수정됐다. 진옥이 바다로 떠나 돌아오지 않은 기존의 엔딩도 지금과 같이 바뀌었다.
ㅡ‘파격 멜로’로 세상에 나온 이 시나리오에 대한 배우들의 첫 반응은 어땠나?
고두심 선생님은 해녀들의 삶을 다룬다는 점 때문에 바로 관심을 보이셨다고 전해들었다. 시나리오를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팅을 제안하셨다. 저는 시나리오 집필 단계에서부터 고두심 선생님을 염두에 두고 썼기에 다른 대안이 없었다. 남자배우는 고두심 선생님을 상대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니까 의외로 캐스팅이 쉬울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랐다. 캐스팅 디렉터가 지현우 씨를 추천해주셨다. 현우씨가 출연을 확답하기 전에 혼자 제주도를 방문했는데, 우연찮게 그 모습을 우리 스태프가 발견하고 작품에 호감을 갖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알게 됐다. 솔직히 연하남 이미지가 강해 그 이미지의 끝판왕에 해당되는 이 작품을 안 할 줄 알았는데, 출연해줘서 감사했다.
ㅡ고두심 선생님과 첫 미팅 당시 분위기는 어땠나?
일단 선생님이 화장도 안하시고 마치 우리 어머니처럼 수수하게 하고 나오셨다. 내가 시나리오를 쓰면서 생각한 이미지와 잘 맞아서 아주 편하고 좋았다. 내게 한 첫 질문은 “이거 왜 썼니?”였다. 개인적으로 선생님이 출연한 드라마 ‘꽃보다 아름다워’에서 자신의 신장을 남편의 내연녀에게 떼어 주어야 하는 가슴 아픈 고민을 안은 채, 첫사랑 오빠를 만나러 목포에 가는 장면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늘 어머니 역할을 하는 배우라 생각했는데, 그 장면에서 사랑을 마음에 품은 소녀의 얼굴을 봤다. 그래서 선생님을 염두에 두고 썼고, 제주도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더니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럼 하자”고 하셨다. 이후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아주 많이 들려주셨다. 취재하면서 만난 다수의 해녀들처럼 선생님 역시 감수성이 아주 풍부하셨다.
ㅡ지현우씨는 여성들이 다수인 촬영장에서 어땠나?
현우씨가 아주 예의가 바르다. 선생님은 물론이고 해녀 삼촌들(어르신의 제주도방언)에게 아주 잘했다. 또 탐구하는 자세로 연기에 임했다. 촬영 없는 날에도 경훈처럼 삼촌들과 어울리며 실체적 감정을 느끼고자 했다. 영화 속 노래방 신처럼 그렇게 잘 어울려 놀았다. 해녀 삼촌 중 한분은 촬영이 끝날 때 현우씨가 떠나 섭섭하다며 정말 많이 우셨다. 해녀들과 함께한 시간 때문인지 후반부 진옥의 선택에 대해 현우씨가 ‘그 마음을 알겠다’고 하더라.
솔직히 제주도가 공동체 문화가 강해 조용한 마을에 들어가 영화 찍는다고 분위기 훼손할까봐 최대한 조심했는데, 기대이상으로 우리를 환대해주셨다. 소품이 부족하면 자기 집에 있는 냄비도 갖다 주셨고 극중 메밀꽃밭에서 국수 먹는 신을 찍는다니까 아침부터 물질해 잡은 해산물로 육수를 만든 뒤 국수를 삶아오셨다.
ㅡ진옥을 제주4.3사건의 아픔을 지닌 인물로 설정했는데, 제주도와 제주4.3사건에 주목한 이유가 있나?
소외된 사람들의 삶과 사랑에 관심을 두고 작품을 해왔기에 타자화된 공간, 고립된 공간이라는 점에서 제주도에 관심을 갖고 있다가 20대 후반 ‘제주 다크 투어’를 갔다가 제주도의 아픈 역사에 주목하게 됐다.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제주도민들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살아왔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이 즐거운 이야기를 하다가 불쑥 제주4.3사건을 언급했다. 뭍에서 왔으니 제발 이 이야기를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한 80세 할머니는 그토록 아프고 슬픈 기억인데도 아주 아름답게 들려주셨다. 갑자기 산으로 도망치게 되면서 가족 중 한명을 못 데리고 갔는데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다시 데리러 마을로 내려왔더니 잔인하게 돌아가신 후라고 했다. 그분을 묻어줄 시간조차 없어 거죽을 덮어줬는데, 정말 예쁜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시신 위에 앉아서, 그 새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고 하셨다. 그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해녀 노래를 하시면서 아픔을 흘려보냈다. 고두심 선생님 역시 제주4.3사건을 직접 겪지 않았지만 마치 자신이 겪은 일처럼 그 아픔이 대물림 됐다고 하셨다(영화 속 명장면이 탄생한 배경이기도 하다).
ㅡ해녀들의 삶에 대한 애정이 영화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제주도민들을 만나면서 슬픈 역사를 가슴에 품고 척박한 땅에서 삶을 일궈온 그들, 그중에서도 뭍이나 바다로 나간 남자들을 대신해, 물질로 생계를 이어온 해녀들의 강인한 생명력과 고단한 삶을 잘 그려내고 싶었다. 제주도는 모계사회고, 해녀는 곧 제주도의 혼이고 힘이라고 생각한다.
ㅡ휴먼드라마로 만들 수도 있었는데 멜로영화로 만든 이유는?
인간에게 사랑은 기본적인 감정이잖나. 사람과 사람 간에 사랑이 있었으면 제주4.3사건과 같은 역사적 아픔도 없지 않았을까. 요즘 사회면을 장식하는 젊은이들의 허망한 죽음도 없지 않았을까. 좀 단순한 생각이지만, 미움과 혐오가 난무하는 시대, 사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사랑을 통해 과거의 아픔과 현재의 갈등을 품고 싶어 멜로드라마라는 장르를 차용했다.
ㅡ남녀주인공의 나이 설정만 파격적일뿐 멜로드라마의 기본에 충실하다. 서로 티격태격하던 남녀가 어떤 일을 계기로 서로에게 호감을 갖거나 마음을 확인하게 되듯 진옥과 경훈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기존 멜로드라마의 흐름을 충실히 따르고 싶었다. 비록 시나리오 단계에서 왜 젊은 남자가 이렇게 나이든 해녀를 사랑하느냐, 섹시함이라든지 이 남자가 반할 수 있는 포인트를 만들어줘야 한다 등의 지적을 받았지만 이 이상 더 특별한 동기나 계기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감정엔 나이가 없으니까. 사랑은 두 사람이 느끼는 것이지 (타인이) 이해할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고두심 선생님 역시 진옥이 경훈을 왜 좋아하는지 묻지 않았다. 그저 사람에 대한 마음으로 접근했다. “사람이니까, 그래” 그렇게 생각했다.
ㅡ진옥이 바다에 빠진 경훈을 구해주는 장면은 바다에서 소중한 사람을 잃었던 둘에게 치유의 물꼬를 트는 소중한 순간이 된다. 둘은 서서히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따뜻한 안식처가 되어준다.
사랑에 대한 개인적인 정의를 말하자면, 위로의 순간에 피는 것이 사랑이라고 본다. 상대의 외형적 매력보다 내가 이 사람과 있을 때 위로가 되는 감정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ㅡ멜로신 수위에 대한 고민이 컸겠다.
동굴신의 몸동작이 사랑의 표현일수도 있으나, 그보다는 두 사람의 숨결과 온도라고 생각했다. 말이 아니라 신체적인 접촉을 통해 느껴지는 또 다른 감정이 있다고 본다. 그런데 그걸 터부시하는 것을 뛰어넘고 싶었다. 동굴신의 수위에 있어서는 배우들과도 이야기를 많이 했다. 처음엔 사랑의 감정을 폭발하듯, 아주 격정적인 키스신을 찍었다. 한 번에 오케이 했는데, 배우들이 다른 버전을 찍어보자고 했다. 그래서 감정을 서서히 터뜨리는 지금의 버전을 찍었다. 두 번째 테이크를 선택한 이유는 두 사람의 몸짓 속에 쉼표가 있는게 좋았다. 둘의 감정으로 불을 지피기보다 생각할 시간을 주고 싶었다고 할까.
ㅡ동굴신은 다층적 의미로 다가왔다. 고단한 삶을 견뎌온 해녀들에게 빛나는 순간을 선물하고 싶은 감독의 마음이랄까. 동시에 4.3사건 희생자들이 목숨을 잃었던 비극적 공간을 사랑의 공간으로 바꿈으로써 제주도민을 위로하고 싶은 바람도 느껴졌다. 상사화는 이루기 힘든 둘의 사랑이면서 동시에 그 색이 하도 붉어 제주4.3사건 희생자들이 흘린 피의 이미지가 떠오르기도 했다.
영화 구석구석에 여러 상징을 심어놓고자 했다. 바다에서 진옥에 의해 목숨을 구한 경훈이 노란 유채꽃밭에 서있는 장면의 경우, 노란색하면 떠오르는 우리사회의 비극적 사건에 대한 추모의 의미를 담았다. 제주4.3사건이 진옥과 같은 구세대의 트라우마라면 세월호를 비롯해 최근 몇 년간 청춘들의 생명을 앗아간 각종 재난 사고는 젊은 세대의 트라우마라고 봤다. 그런 측면에서 과거의 세대와 현재의 세대가 서로 안아주고, 도닥여주는 동굴신이 중요했다. 더불어 사회적 기준에 부합되지 않는 남녀의 사랑과 세대나 이념간의 사회적 갈등이 다른 차원이 문제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사람들이 좀 더 사랑의 시선으로 이 문제들을 대한다면, 모두 해결할 수 있다고 봤다.
ㅡ진옥이 가까운 지인에게 경훈과의 사랑을 고백했을 때, 해녀의 딸, 설희의 반응이 인상적이었다. 경훈의 회사 선배가 “역겹다”고 했다면 그녀는 “겁내지 말라”며 손을 꼭 잡아준다.
진옥의 감정을 부정하지 않고 인정해주는데, 이것이야말로 우리 세대가 가져야할 시선이 아닐까 생각한다. 더불어 그녀 역시 해녀의 딸로서 진옥 세대의 아픔을 알고, 그것을 봐온 사람이기 때문에 진옥이 현재 느끼고 있는 그 감정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 것이라고 봤다.
ㅡ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장면이 있다면?
진옥이 경훈에게 “너는 왜 나 같은 게 좋아?”라고 묻는 대사를 가장 좋아한다. 선생님이 그걸 표현할 때, 그 속에 기쁨과 불안, 검열 등과 같은 내적갈등이 다 들어있었다. 화장품 가게 장면도 아주 좋아한다. 선생님이 그 안을 들여다보는 장면을 1회 차 때 찍었다. 단순한 장면일수 있지만 그 짧은 순간에 선생님이 표현한 감정이 아주 디테일했다. 진옥이 제주4.3사건에 대한 아픈 기억을 쏟아놓는 인터뷰 장면은 말할게 없다. 정말 좋아하는 장면이다.
ㅡ고두심 선생님이 이 영화로 데뷔 이래 처음으로 해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제18회 아시안 필름 페스티벌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는데 선생님이 아주 좋아하셨다. 그동안 선생님의 얼굴을 TV로만 봐온게 아깝다. 감독으로서 바람이 있다면 두 배우가 연말에 국내시상식에서도 상을 많이 수상하면 좋겠다. 솔직히 이 영화는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끝까지 못 찍었다. 극중 경훈을 품듯 나를 품어줬다. 촬영할 때 제주도의 변덕스런 날씨 때문에 마음 고생이 심했는데, “이게 제주도의 매력이다”며 부드럽게 넘기셨고, 내가 힘든 표정을 지으면 “감독님, 다 알아요”라고 가만히 말해줬다. 의지가 많이 됐다.
ㅡ영화에 대한 제주도민의 반응은 어땠나?
선생님이 제주도 방언을 하면서 등장하는 순간부터 빵빵 터졌다. 내가 쓰는 말이 나오고, 내 동네가 나오니까 아주 좋아하셨다. 반면 육지의 반응은 달랐다. 처음부터 자막이 나오니까 생소해 했는데, 제주도는 반대로 반가움의 시작이었다. 또 육지에선 이 영화가 파격멜로로 통했는데, 제주도는 로맨스로 보기도 했지만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순수하게 받아들여줬다. 육지에선 동굴신을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컸으나 제주도에선 아픈 역사를 사랑으로 품어준다고 고마워했다. 해녀들이 특히 동굴신을 좋아했다. 상처받은 여인을, 젊은 사람이 안아주는 것만으로, 치유되는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 불턱이라고 해녀들이 작업하다가 언 몸을 녹이기 위해 불을 피워 따뜻하게 하기 위해 바닷가에 돌담을 쌓아 만든 공간이 있는데, 마치 불턱 같다고 하셨다.
ㅡ개봉 소감과 차기작 계획은?
또 다른 시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관객들이 이 영화에는 넘어야 할 장애물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좀 더 넓은 시선과 마음으로 봐주면 좋겠다. 그리고 차기작은 고두심 선생님이 가능하다면 한 번 더 작업하고 싶은 바람이 있다.
jashin@fnnews.com 신진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