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실천은 아파트 단지서부터

      2021.07.13 19:01   수정 : 2021.07.13 19:01기사원문
통계청에서 발표한 2019년 인구주택 총조사 결과에 의하면 우리나라 일반 가구 중 아파트 거주가구 비율은 51.1%, 총주택 1813만호 중에서 아파트가 1129만호로 62.3%를 차지하는 등 이제 아파트는 우리 주거문화를 대표하는 주거형태가 되어버렸다. 유럽에서 고층아파트는 저소득층 주택의 대명사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부의 상징이자 중산층 이상이 거주하는 주택이다.

1993년 한국에 온 프랑스의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는 이런 한국의 아파트 문화에 큰 충격을 받고 서울의 아파트에 대한 연구를 시작해서 박사논문을 쓰고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그의 눈에 비친 한국의 성냥갑 아파트는 획일화된 도시공간의 상징이었으며, 건축가가 창의성을 발휘할 여지가 없는 정부의 규제와 간섭에 의한 산물이자 상품화된 물건으로서의 아파트였을 것이다.

굳이 환경심리학의 환경결정론이라는 이론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미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라는 일화를 통해서 주거환경이 인간행동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익히 알고 있다. 아파트 주거가 인간의 온전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삶터 디자인의 관점이 아니라 산업화의 표상으로서 또는 정치권력과 자본이 결합된 상품이라는 관점에서 공급된 결과는 참담하다. 최근 아파트 거주자의 갑질에 시달린 경비원 자살사건이나 층간소음이 살인으로 번진 사건, 아파트 관리비 부당집행에 항의한 모 여배우의 수난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써지 체르마이예프'와 '크리스토퍼 알렉산더'라는 미국의 두 건축학자는 '커뮤니티와 프라이버시'라는 책을 통해서 공동주택에서 충돌할 수밖에 없는 공동성과 개별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한 지붕 여러 가족의 충돌을 건축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개별공간을 잘 확보함과 동시에 실내와 실외에 공동공간을 적절하게 배치해 가족 간이나 이웃 간의 교류가 원활하게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설계만 잘한다고 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운영도 잘해야 한다.

본시 공동주택이라는 것은 여러 세대가 한 건물에서 거주하도록 설계돼서 규약을 만들어 놓고 지킬 것을 약속하고 입주한다. 밤 9시가 넘으면 악기연주를 하지 않는다든지, 발코니에 물이 새면 위층의 입주자가 수리비를 부담한다든지 하는 것이 그것이다. 지켜야 할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초라면 아파트야말로 민주주의 실천의 가장 좋은 교육장이다.

인권교육은 경비원 갑질을 근절하는 데서 시작된다. 함께 사는 세상과 이웃에 대한 배려를 배울 수 있다. 출근길에 엘리베이터 안에서 서로 인사하면 층간소음으로 인한 이웃 간의 분쟁도 줄어든다. 경제정의는 아파트 보수 및 유지관리를 위한 입찰담합을 막는 데서 시작된다. 주민들이 눈을 부릅뜨고 관심을 가지면 일원 한푼 낭비하지 못한다. 환경정의는 쓰레기 분리수거에서 시작된다. 잘 분리해서 모아두었다가 재활용하면 자원낭비를 줄이고, 지구온난화를 방지할 수 있다. 옛날에는 아침이면 자기 집 마당을 쓸고 나서 마당 앞길까지 쓸었다.
아파트 청소를 용역업체에 맡기는 것이 효율적일지는 모르나 적어도 이웃 간의 교류 빈도를 떨어뜨리는 주범인 것은 확실하다.

여기저기에서 최신 브랜드의 아파트는 계속 지어지지만, 아파트 공동체 문화를 제대로 정립하자는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발레리 줄레조가 신기하게 여겼던 우리나라의 아파트 문화를 한국인의 전통과 문화에 맞는 새로운 공동체 문화로 탈바꿈시키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를 꽃피우는 작지만 위대한 발걸음이 될 것이다.

류중석 중앙대 사회기반시스템공학부 도시시스템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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