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사 최초의 탄핵 사건 '중종반정'
2021.07.24 03:05
수정 : 2021.07.24 09:41기사원문
1506년(연산 12년), 연산군(燕山君, 제10대 왕)의 광기어린 폭정(暴政)에 대신들 및 백성들의 반감과 분노는 극에 달했다.
마침내 이를 보다 못한 훈구파(勳舊派)들을 중심으로 정변이 일어났다. 역사는 이를 '중종반정'(中宗反正)이라고 부른다. 훈구 세력들은 자신들의 정변을 정당화하기 위해 '반정'(反正)이라는 명분을 내걸었는데, 이 '반정'은 그릇된 상태에 있던 것을 올바른 상태로 되돌리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연산군이라는 잘못된 왕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중종·中宗)을 세워 나라를 바로잡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왕이 초월적인 존재로 군림하는 유교(儒敎) 국가 조선에서, 신하들에 의해 왕이 쫓겨나가고 그들에 의해 새로운 왕이 즉위(卽位)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생소한 장면이었다. 그럼에도 연산군의 광기와 폭정이 도를 넘어선 만큼 반정의 명분은 충족됐고, 백성들도 이에 호응하는 모습을 나타냈다. 다만, 그렇게 거창한 명분을 내세워 단행한 반정 이후 일련의 개혁 정치는 실패했고, 조선은 훈구권신들의 득세라는 구태(舊態)로 회귀하게 된다. 조선사 최초의 '탄핵'(彈劾)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중종반정' 전말을 되돌아봤다.
■폐비의 아들, 왕위에 오르다
연산군의 친모는 '폐비(廢妃) 윤씨'였다. 폐비윤씨는 성종(成宗, 제9대 왕)의 첫 후궁 출신이었는데, 본래 후궁은 왕비가 되기 어려운 위치였다. 그러나 폐비윤씨는 검소함과 겸손한 처신 등을 크게 인정받아 왕비가 될 수 있었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성종과 폐비윤씨의 사이는 매우 돈독했다.
하지만 왕비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폐비윤씨는 이전과는 다른 성품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성종이 다른 후궁들과 함께 하는 것을 질투했고, 이러한 감정을 왕과 신하들 앞에서 여과 없이 표출했다. 당시 성종은 주요순(晝堯舜), 야걸주(夜桀紂)로 불렸다. 이 말은 낮에는 요순이요, 밤에는 걸주라는 뜻이다. 성종이 낮에는 중국 고대의 전설적인 명군인 요임금, 순임금과 같이 국정을 잘 돌봤지만, 밤에는 중국의 대표적인 폭군인 하나라 최후의 왕 '걸'과 은나라 최후의 왕 '주'처럼 여색(女色)을 밝혔다는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이에 대한 폐비윤씨의 질투와 시기심은 높아졌는데, 실록에 따르면 성종은 이와 관련해 "윤씨는 짐(성종)을 온화한 얼굴로 대한 적이 없다. 내 발자취를 없애겠다고까지 했다"고 전하고 있다. 급기야 폐비윤씨에게 불행한 결말을 가져다주는 중대한 사건이 발생했다. 어느 날 성종과 폐비윤씨가 성종의 여색 문제로 말다툼을 벌이고 있었는데, 폐비윤씨가 성종의 얼굴에 손톱으로 상처를 낸 것이다. 왕의 얼굴인 '용안'(龍顔)에 상처를 냈다는 것 자체는 '중죄'(重罪)에 해당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특히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仁粹大妃)는 성종을 직접 불러 왕비를 폐할 것을 강하게 요구했다. 다른 대신들의 경우 처음엔 추후 세자(世子)가 될 수 있는 사람의 친모라는 이유로 '폐비'를 반대했지만, 인수대비의 강한 의지와 성종의 결단으로 마지못해 찬성했다. 결국 폐비윤씨는 궁궐에서 쫓겨났고, 폐서인(廢庶人)으로 강등(降等)된 후 사가에 머물게 됐다.
1482년, 연산군이 7살이 되면서 한 때 세자 책봉 논의와 더불어 폐비윤씨 복권(復權) 주장도 제기됐지만, 인수대비의 강한 반대와 소용 정씨 및 엄씨의 모함으로 복권은 무산됐다. 그런데 그 해 여름에 전국에 기근이 들자 대신들은 폐비윤씨가 굶어 죽을 것 등을 우려해 성종에게 별궁 안치를 청했다. 이에 따라 옛 정이 다소 남아있던 성종은 은밀히 내관이었던 안중경을 보내 폐비윤씨의 동정(動靜)을 살피게 했다.
당시 폐비윤씨는 특별히 문제가 될 만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사전에 인수대비에게 밀명(密命)을 받은 안중경은 폐비윤씨가 반성의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고 여전히 성종에 대한 원망을 늘어놓고 있다는 거짓 보고를 올렸다. 여기에 폐비윤씨의 기행(奇行)들을 낱낱이 기록한 정희왕후의 언문서한까지 더해지면서, 분개한 성종은 폐비윤씨에게 '사약'(賜藥)이라는 극형을 내리게 된다. 사사(賜死)를 당한 후 동대문 밖에 묻혔던 폐비윤씨는 처음엔 묘비도 없었다. 그로부터 7년 후 세자인 연산군의 앞날을 걱정한 성종은 '윤씨지묘'라는 묘비명을 쓰게 했고, 장단도호부사에게 제사를 지내게 했다. 성종은 죽기 전 향후 100년 간 폐비윤씨의 일을 거론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연산군은 '폐비'의 자식이었던 만큼, 당초 왕위에 오르지 못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성종의 의지와 장자(長子)라는 정통성이 부각되면서, 1494년 연산군은 성종의 뒤를 이어 19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다. 성종의 정실 소생이었던 진성대군(추후 중종)은 연산군이 세자로 책봉될 때 아직 태어나기 전이기도 했다. 왕위에 오를 즈음 연산군은 어머니 폐비윤씨 사건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밀려오는 먹구름, 사화(士禍)
연산군은 즉위 초에는 별다른 문제 없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했다. 연산군 때에는 그동안의 농업진흥 정책 등에 힘입어 산업구조상의 변화가 발생했다. 우선 지방 장시(場市)가 크게 확대됐고, 수리시설 및 시비법 개선에 따른 연작상경(連作常耕)의 집약적 농업기술의 발달로 구매력이 증대돼 전국적인 유통 경제망이 형성됐다. 또한 중국과의 사무역이 증가했고, 국내 은광업이 눈에 띄게 발달했다. 성종 때의 태평성대 분위기가 아직 남아있었고, 성종이 중용한 사림(士林) 세력들이 성하면서 국가의 질서가 유지되고 있었다. 사림은 성리학(性理學)적 질서와 왕도정치(王道政治)를 표방했다.
그러나 이 같은 상황 가운데 재위 약 3년 째부터 조금씩 먹구름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연산군은 이 시기를 전후해 폐비윤씨의 사건을 처음으로 인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록에 따르면 "왕이 비로소 윤씨가 죄로 인해 폐위되어 죽은 줄을 알고, 수라(水剌)를 들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이에 연산군은 폐비윤씨의 신주와 사당을 세우고 왕비로 추숭(追崇)하는 의식을 거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사림 세력이 중심이 된 대간(臺諫)들은 성종의 유언 등을 이유로 대놓고 반대했다. 연산군은 굴하지 않고 성종의 3년상(喪)이 끝난 직후 폐비윤씨의 묘를 개장 및 격상하는 작업을 강행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연산군과 사림 세력 간에 갈등의 골이 깊어졌는데,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훈구파가 나서서 이 갈등에 불을 질렀다. 훈구파는 조선 초기 세조(世祖, 제7대 왕)의 집권을 도와 공신이 되면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세력을 말한다. 훈구파의 권세는 이후 성종 때에 사림 세력이 득세(得勢)하면서 점차 축소됐다. 사림 세력은 스승 김종직의 주장을 기반으로 훈구파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세조의 왕위 찬탈을 격하(格下)했고, 단종의 정통성을 공개적으로 내세웠다.
연산군은 사림 세력의 폐비윤씨에 대한 태도와 자신의 할아버지인 세조 격하 움직임을 대단히 못마땅하게 여겼고, 적절한 시기에 사림 세력을 내칠 것을 모색했다. 이런 가운데 1498년 훈구파의 일원이었던 유자광과 이극돈은 사관들이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사초(史草)에서 김종직이 작성한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발견해 연산군에게 보고했다. 조의제문은 1457년에 문신·학자였던 김종직이 단종을 죽인 세조를 의제를 죽인 항우(項羽)에 비유하며 세조를 은근히 비난한 문서였다. 이를 통해 확실한 명분을 확보한 연산군은 눈엣가시였던 사림 세력을 대거 숙청(肅淸)하기 시작했는데, 역사는 이를 '무오사화'(戊午士禍)라고 부른다. 조선 시대 첫 사화였던 무오사화는 매우 잔인하게 진행됐다. 심지어 김종직은 이미 죽었지만 묘가 파헤쳐져 목이 잘리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기도 했다.
무오사화를 통해 사림 세력을 거의 몰아낸 연산군은 자신이 갖고 있는 왕권의 위력을 새삼 절감했다. 자신감이 오른 연산군은 훈구파와도 대립하는 모습을 보였다. 연산군은 자신의 향락 등에 사용하기 위해 훈구파 등으로부터 세금을 거둬 상당한 반발을 불렀다. 이런 가운데 임사홍에게 폐비윤씨와 관련한 구체적인 내용을 접수한 연산군은 이를 빌미로 폐비윤씨의 사사와 관련된 윤필상, 이극균, 성준, 이세좌 등 훈구파 재상들을 대거 숙청했다. 이것이 1504년에 발생한 '갑자사화'(甲子士禍)다. 갑자사화는 그 숙청의 규모 면에서 무오사화를 능가했는데, 비단 훈구파 뿐만이 아닌 나머지 사림 세력도 모조리 숙청됐고 피해자의 자녀와 가족, 동족까지 연좌(緣坐)되기에 이르렀다.
■광기의 심화
매우 폭력적인 두 차례의 사화로 인해 연산군의 견제 세력은 사실상 사라졌다. 연산군은 권력을 독점했고, 더 이상 거칠 것이 없는 광기(狂氣)를 표출한다. 평소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서슴없이 죽이거나 유배를 보냈고, 매일 연회를 열어 주색(酒色)을 탐했다.
특히, 궁궐 안으로 수많은 기생들을 들여왔는데, 이들을 흥청(興淸), 계평(繼平), 속홍(續紅) 등으로 나눠 불렀다. 여기서 왕과 잠자리를 가진 자는 천과흥청(天科興淸), 왕을 지근거리에서 모신 자는 지과흥청(地科興淸)이라고 했다. 대신들에게는 홍준체찰사(紅駿體察使)란 칭호를 부여한 후 서울과 지방 공천(公賤)의 처첩 및 창기 등을 색출해 각 원(院)에 나눠서 두게 했다. 아울러 성균관을 흥청들과의 놀이터로 사용했고, 서울 동북쪽 100리를 금표로 지정해 사냥터를 조성하기도 했다. 이 같은 연산군의 향락에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면서 국가의 재정은 악화됐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백성들의 몫이 됐다.
연산군의 광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종실(宗室) 여인이나 사대부의 부인들도 연산군은 갖은 수를 써가며 취했다. 특히 성종의 친형이자 연산군의 백부인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를 겁탈(劫奪)하기도 했는데, 이후 박씨는 수치심을 견디지 못해 자결하고 말았다. 박씨 겁탈 사건은 추후 중종반정의 직접적인 도화선(導火線)으로 작용했다.
또한 연산군은 자신을 비난하는 자는 온갖 고문을 가해 죽였다. 당시 연산군이 행했던 형벌을 보면 '포락'(凉烙, 단근질 하기), '착흉'(嫂胸, 가슴 빠개기), '촌참'(寸斬, 토막토막 자르기), '쇄골표풍'(碎骨瓢風, 뼈를 갈아 바람에 날리기) 등이 있었다. 실제 연산군 면전에서 대놓고 간언(諫言)했던 환관 김처선은 이와 같은 형벌을 당한 후 숨졌다.
성종의 친모이자 조정의 가장 큰 어른이었던 인수대비도 연산군의 광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어머니 폐비윤씨의 죽음에 인수대비가 깊게 관여한 것을 알게 된 연산군은 직접 인수대비의 처소에 들이닥쳐 그를 머리로 들이받았고, 인수대비가 보호하고 있던 성종의 두 후궁 엄귀인과 정귀인을 궁궐 뜰로 끌고 나와 때려 죽였다. 다만, 일각에서는 연산군이 인수대비 등에게 가했던 광기는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정황으로 봤을 때 당시 현장에 사관(史官)이 부재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전에 인수대비에게 적지 않은 효심을 보여줬던 연산군이 갑작스레 돌변한 것도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연산군의 광기 및 폭정이 전반적으로 심각하게 행해졌다는 것은 역사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중종반정
이 즈음 궁궐 안팎에서는 연산군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했고, 반란을 모색하는 세력이 한둘이 아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중 가장 큰 반감을 갖고 기민하게 움직였던 사람은 박원종이었다. 그는 연산군이 겁탈해 자결한 월산대군 부인 박씨의 친동생이었고, 과거 성종 때에는 부승지(副承旨)에 올랐으며 연산군 때에는 도총관(都摠管)을 역임하고 있었다. 박원종은 친누나의 원수를 갚고 연산군의 폭정을 단죄할 것을 결심한 후 훈구파 계열인 재상 성희안, 유순정 등과 손잡고 세력을 규합해 나갔다.
이들은 마침내 거사일을 확정했고, 차기 왕으로 자순대비 윤씨의 소생인 진성대군을 추대하기로 했다. 거사의 명분은 '반정', 그릇된 상태를 올바른 상태로 되돌린다는 것이었다. 연산군의 폭정 및 광기를 감안할 때 거사의 명분은 나름 갖춰진 셈이었다. 박원종 등은 우선 삼정승에게 은밀히 거사 계획을 흘렸는데, 영의정 유순과 우의정 김수동은 찬성했지만 연산군의 처남이자 진성대군의 장인이었던 좌의정 신수근은 "세자가 총명하니 참는 것이 좋겠다"면서 찬성하지 않았다.
이에 박원종 등은 계획이 누설될 것을 염려해 거사를 앞당겼고, 1506년 9월 2일 밤에 군자감부정 신윤무, 군기시첨정 박영문, 전수원부사 장정 등과 일단의 무사들을 훈련원에 소집한 후 이들을 거느리고 창덕궁으로 진격했다. 반정군이 진격하는 동안 백성들이 호응했고, 궁궐 안팎의 저항은 크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반정군은 궁궐로 무난하게 진입한 후 연산군의 최측근이었던 임사홍, 김효선 등과 반정에 반대했던 좌의정 신수근, 신수영 형제를 척살했다.
이후 궁궐을 완전히 장악한 반정군은 자순대비를 찾아가 반정 소식을 알렸고, 연산군을 폐위하고 차기 왕으로 진성대군을 추대한다는 교지(敎旨)를 내려줄 것을 청했다. 자순대비는 처음엔 사양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계속된 간청에 결국 이를 허락하는 비망기(備忘記)를 내렸다.
한편, 반정을 접한 연산군은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고 순순히 운명을 받아들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실록에 따르면 "연산군은 '내 죄가 중대하여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좋을 대로 하라'고 하며 곧 시녀를 시켜 옥새를 내어다 주게 하였다"라면서 "(연산군이) 내전문으로 나와 땅에 엎드리면서 '내가 큰 죄를 지었는데도 특별히 임금의 은혜를 입어 죽지 않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반정이 성공한 당일 진성대군은 19세의 나이로 근정전(勤政殿)에서 중종으로 즉위했고, 폐위된 연산군은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를 간 후 1506년 11월에 병사했다. 연산군은 광해군(光海君, 제15대 왕)과 더불어 조선 시대의 몇 안 되는 폐주(廢主)였고, 왕실 족보인 '선원계보'(璿源系譜)에 묘호 및 능호 없이 일개 왕자의 신분으로만 기록되는 비참한 운명을 맞았다.
■개혁의 실패
중종반정 이후 박원종 등 반정 세력은 이른바 '공신'(功臣) 세력이 돼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다. 별다른 준비 없이 갑작스레 왕위에 오른 중종은 이들 공신 세력에게 휘둘리기 일쑤였다. 물론 공신 세력은 연산군 때의 여러 잘못들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했지만, 막강한 권력을 등에 업고 부패와 전횡(專橫)도 일삼아 반정의 명분을 퇴색하게 만들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중종은 이들에게서 벗어나 자신만의 색깔을 갖춘 개혁 정치를 하기를 원했다. 이러한 방편으로서 사림파의 명맥을 잇는 인물인 '조광조'(趙光祖)를 등용했다. 중종 개혁 정치의 요체는 유교적 왕도정치 구현이었는데, 조광조의 도학(道學)정치론이 이에 부합한다고 봤던 것이다.
중종의 후원을 받은 조광조는 언로(言路)를 확충하기 위해 대간의 위상을 강화했고, 향촌의 자치 규약인 '향약'(鄕約)을 실시해 백성을 유교적 윤리로 교화하려 했다. 또한 과거 제도를 대신해 천거 제도인 '현량과'(賢良科)를 도입, 인재 등용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 이러한 조치들은 결과적으로 사림들이 중앙 정계에 적극 진출하는 발판이 됐다. 이후 조광조는 국가적인 도교 제사를 주관하는 관청인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했고, 대간을 앞세워 정국공신 중 공이 없으면서도 공신의 지위를 얻은 76명에 대한 위훈(偉勳)을 삭제할 것을 끈질기게 주장한 끝에 관철시켰다.
하지만, 이 같은 조광조의 과감하고 급진적인 개혁 정책들은 보수적인 훈구파의 극심한 반발을 불러왔다. 연산군 이전부터 나타난 훈구파와 사림 세력들 간의 갈등이 다시금 재연되는 모습이었다. 아울러 더 큰 문제는 중종의 우유부단한 성품에 있었다. 당초 개혁 정치를 목표로 했던 중종에게서 서서히 이에 대한 의지가 사그라졌고, 되레 중종은 조광조 등의 개혁 정책들 및 군주의 자질 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 등에 부담과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조광조 및 사림 세력들에게서 중종의 신임이 떨어져 나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한 훈구파는 조광조 등이 국정을 농단하고 있다며 탄핵을 주장했다. 이런 가운데 조광조 및 사림 세력들의 몰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주초위왕(走肖爲王)' 사건이 발생했다. 궁궐 후원에서 '주초위왕'이라는 글씨의 형태로 벌레가 갉아먹은 나뭇잎이 발견됐는데, 여기서 '주초'란 조(趙)를 파자(破字)한 것으로 '조씨가 왕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훈구파였던 남곤이 사전에 나뭇잎에 꿀로 글씨를 써서 공작(工作)한 일이었지만, 이를 계기로 종종은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세력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게 된다. 이것이 1519년에 일어난 '기묘사화'(己卯士禍)다.
기묘사화 이후 조광조는 물론 중종의 개혁 정치는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무엇보다 우유부단한 용군(庸君)이었던 중종이 스스로 이 같은 실패를 자초한 것이었다. 이후 조정에는 다시 훈구권신들이 득세하게 됐고, 중종 말기부터 인종, 명종 등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권신들 간의 권력 다툼이 이어져 조선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
kschoi@fnnews.com 최경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