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급진개화를 꿈꿨던 금수저 청년들의 3일 천하 '갑신정변'
2021.08.21 09:00
수정 : 2022.02.14 21:05기사원문
19세기 말, 열강들의 전방위적인 침탈로 조선의 국력이 점차 쇠퇴할 때 자주적인 근대화를 지향하며 급진적인 개혁 노선을 천명하고 나선 일단의 젊은 청년들이 있었다. 바로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등을 중심으로 한 '개화당'(開化黨)이다. 이들은 단순한 주장을 넘어 실제 현실에서 개혁을 달성하기 위해 극단적인 방식의 정변까지 일으켰는데, 역사는 이를 '갑신정변'(甲申政變)이라고 부른다.
갑신정변은 조선을 중세 봉건 국가에서 벗어나 '근대(近代) 국가'로 탈바꿈시키려 한 최초의 개혁 운동이었다. 여기에서 표방했던 것들은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 사대 관계 청산, 인민 평등, 조세 개혁 등 이전에는 결코 찾아볼 수 없었던 파격 그 자체였다. 이는 훗날 우리나라 역사의 개화 운동과 민족 운동 등에도 큰 영향을 끼치며 계승, 발전됐다.
다만, 충분한 준비가 되지 않은 채 성급하게 추진됐던 '위로부터의 개혁'은 명백한 한계도 노정하고 있었다. 개혁 실행 과정에서 외세를 개입시켰고, 일반 민중들에 대한 충분한 고려도 이뤄지지 않았다. 당시 조선의 민중들은 아직 개화당의 급진적인 개혁 노선을 따라올 만한 의식과 여건이 성숙되지 못한 상태였다. 또한 개화당의 개혁에는 민중들이 정말로 원했던 '토지 개혁'이 담기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개화당이 숙적(宿敵)인 '일본'까지 끌어들이는 모양새를 취하면서 민중들 사이에서는 큰 반감이 일어났고, 이후 전격적으로 청(淸)나라의 군대마저 개입하면서 갑신정변과 개화당은 완전히 실패하게 된다. 원대한 꿈을 꿨지만 '3일 천하'로 끝나고 만 금수저 청년들의 '갑신정변' 전말을 되돌아봤다.
■청의 내정간섭 심화
1882년, 구식 군인들의 군료분쟁(軍料紛爭)에서 촉발된 '임오군란'(壬午軍亂)은 고종의 아버지였던 흥선대원군과 수구적인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의 재집권을 불러왔다. 이들은 민씨 외척 세력 척결 및 외세 배척 등을 표방하며 한 때 성공하는 듯이 보였지만, 민씨 세력의 요청으로 급파된 청나라 군대에 의해 몰락했다.
구식 군인들에게 살해된 줄 알았던 중전 민씨는 충주에서 멀쩡하게 환궁(還宮)했고, 청나라의 힘을 등에 업은 민씨 외척 세력이 다시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다. 민비는 임오군란에서 사실상 죽다 살아났기 때문에, 이때부터 과거에 잠시 표방했던 개혁 노선은 완전히 접고 오로지 신변의 안전만을 위해 청나라에 철저히 의존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에 따라 조선의 각 분야에서 청나라의 내정 간섭은 노골화됐다. 우선 임오군란 진압 때 청나라 군대를 이끌었던 위안스카이와 오장경 등은 조선의 군권(軍權)에 깊숙이 관여했다. 청나라의 실권자인 이홍장의 추천으로 한국 최초의 서양인 고문으로 부임한 묄렌도르프는 통리아문의 외무협판으로서 외교권과 해관총세무사로서 해관까지 넘봤다. 조선과 청나라 간 통상조약인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에 따라 상무총판(재정고문)으로 파견된 진수당은 사실상 조선의 재정권을 장악했다. 궁극적으로 청나라는 상민수륙무역장정 전문에서 언급한 대로 조선을 '속방'(屬邦)화 하려 했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고종은 무력했고, 민씨 외척 세력은 자신들의 안위와 기득권을 지키는 데만 급급했다. 그런데 저편에서 이를 매우 심각하게 목도(目睹)하고 있던 한 세력이 있었으니, 이들이 바로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을 중심으로 한 '개화당(급진개화파)'이다.
■개혁정치와 좌절
개화당 중심 인물들의 배경은 매우 화려했다. 우선 수장인 김옥균은 명문가인 안동 김씨 집안 출신으로 22세에 장원 급제를 했고 호조참판(현 기획재정부 차관), 외아문현판(현 외교통상부 장관) 등 주요 요직을 두루 거쳤다. 박영효는 조선의 제 25대 임금인 철종의 사위로 한성부판윤(현 서울시장) 등을 역임했다. 홍영식은 영의정이었던 홍순목의 차남으로 정변 당시 우정총국 책임자였다. 서재필은 일본 육군학교를 졸업했고, 조련국(임시사관학교) 사관장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당시 양반 사대부들이 모여 살고 있던 '북촌'(北村)에 거주했고, 평균 연령은 고작 20대 후반에 불과했다. 요즘 말로 하면 전형적인 '금수저' 청년들이었다.
실학의 북학사상을 계승한 개화당이 지향하는 개혁은 '급진적'이었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받아 서양의 과학기술과 함께 근대적인 사상, 제도까지도 적극적으로 도입해 조선의 정치·사회를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변법론'(變法論)을 주장했다. 이는 청나라의 양무(洋務) 운동(중체서용)을 본받아 점진적인 개혁, 즉 서양의 기술과 문물은 수용하되 법, 제도, 사상 등에 있어서는 전통적인 것을 지켜야 한다는 '동도서기'(東道西器)의 입장을 취했던 온건 개화파와 대립되는 것이었다.
당초 고종은 개화당에게 적지 않은 호감을 갖고 있었다. 서구 열강과 교류가 시작된 19세기 후반부터 고종은 새로운 인재 육성의 필요성을 느꼈고, 해외의 발전된 제도, 문물 등에 대한 식견을 갖고 있는 젊은 신진 관료들을 중용해 크게 쓰려 했다. 고종의 신임에 힘입어 개화당은 초반에 각종 개혁 정책을 의욕적으로 추진하려 했다. 대표적으로 신식 행정관서로서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 설치, 일본국정시찰단(신사유람단) 및 영선사(병기학습 유학생사절단) 파견, 기무처(機務處) 설치, 최초의 영어 학교인 동문학(同門學) 설립, 최초의 근대 신문인 한성순보(漢城旬報) 창간, 근대 우편 제도 창설 등이 있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을 노골화하던 청나라는 개화당의 정책이 조선의 독립을 지향한다며 탄압하기 시작했다. 청나라와 밀착하고 있던 민씨 세력도 개화당의 개혁 정책에 눈살을 찌푸렸다. 더욱이 개혁 정책의 뒷받침이 될 만한 재정도 부족했다. 이에 김옥균이 일본에서 자금을 빌려와 재정 문제를 해결해 상황 반전을 노려보려고 했지만, 이마저도 실패함에 따라 개화당의 입지는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축소됐다. 큰 정치적 위기가 엄습하면서 개화당은 초조해졌다. 이에 따라 개화당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조선의 자주적인 근대화가 어렵다고 보고, '정변'이라는 비정상적인 방법을 통해 청나라 및 민씨 세력을 몰아내고 근대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과감하지만 위험한' 생각을 갖게 된다.
■갑신정변
개화당이 정변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은 1883년 봄으로 알려졌다. 개화당은 틈 날 때마다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자리에 모여 거사를 일으킬 기회를 엿봤다. 그러다가 1884년 5월 이후부터 기회가 엿보이기 시작했다. 마침 베트남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싸고 청나라와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는데, 청나라가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 일부를 빼내 베트남으로 보낸 것이다. 여기에 더해 본래 개화당에 적대적이었던 주조선 일본공사 다케조에가 태도를 바꿔 일본군 150명을 빌려주면서 개화당의 정변을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이에 힘입어 개화당은 그해 12월 4일에 열릴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을 거사일로 잡았다.
정변 당일 우정총국 축하연에는 개화당 인물들과 민씨 일족 및 고위 관료들, 주한외교사절 등이 참석했다. 개화당은 우선 축하연에 온 민씨 일족 및 고위 관료들을 척살한 뒤 창덕궁(昌德宮)으로 진격해 고종의 신변을 확보할 예정이었다. 축하연은 저녁 7시에 시작됐다. 약 3시간 가량 지났을 무렵 갑자기 우정총국에서 불이 났다. 사전에 개화당에게 매수된 궁녀가 사제폭탄을 터뜨린 것으로 전해졌다. 민씨 일족과 고위 관료들이 놀라서 밖으로 뛰쳐나갔는데, 미리 매복해있던 개화당 장사(將士)들이 이들을 덮쳤다. 이 자리에서 민비의 조카이자 김옥균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민영익은 칼을 무려 33방이나 맞았다.
개화당은 아수라장이 된 우정총국을 뒤로 하고 우선 일본 공사관을 찾아 군대 지원 여부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확답을 받은 후 고종이 거처하는 창덕궁으로 향했다. 개화당은 잠들어있던 고종을 깨워 '변고'(變故)가 발생했으니 서둘러 경우궁(景祐宮)으로 자리를 피할 것을 청했다. 경황이 없던 고종과 민비는 이들의 요청에 응했고, 창덕궁을 떠나 근처에 있던 경우궁으로 피신했다. 개화당은 경우궁 안팎에 40여명의 병력을 배치했고, 대문 쪽에 일본군 150여명을 배치해 수비에 만전을 기했다. 개화당이 굳이 경우궁을 고종의 피신처로 선택한 것은 넓은 창덕궁에 비해 협소한 장소여서 수비하기가 용이했기 때문이다.
이튿날 새벽에 개화당은 조영하, 민영목, 민태호 등 군사 지휘권자들과 권력의 핵심 실세들을 어명(御命)으로 불러들여 척살했다. 이때 고종은 연거푸 "죽이지 마라"는 전교(傳敎)를 내렸지만, 개화당은 왕의 명을 전혀 듣지 않았다. 정변이 어느 정도 일단락된 후 개화당은 마라톤 회의를 한 끝에 개화당 핵심 인물들이 정부 요직에 포진한 (우의정 홍영식, 호조참판 김옥균, 좌우영사 박영효와 서재필, 서리독판교섭통상사무 서광범, 도승지 박영교) 신 정부 명단과 국가 제도를 전면적으로 바꾸는 '혁신정강 14개조'를 왕의 전교 형식으로 공포했다.
■46시간의 개혁
개화당이 공포한 혁신정강 중 대표적인 것은 우선 1조 청나라에 끌려간 흥선대원군을 곧 돌아오게 하고 종래 청나라에 행하던 조공의 허례(虛禮)를 폐지해 사대 관계를 청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얼핏 보면 흥선대원군은 개화당과 대척점에 서있는 수구적인 인물이지만, 왕의 아버지가 다른 나라에 볼모로 끌려가 있으면 조선을 자주적인 국가로 볼 수 없다고 판단해 혁신정강 첫머리에 넣었다.
2조는 문벌을 폐지해 인민 평등의 권리를 세워 능력에 따라 관리를 임명한다는 것이다. 이는 10년 후 '갑오개혁'(甲午改革) 때 신분 제도 폐지에 큰 영향을 미쳤다. 3조는 토지 수익에 매기는 조세에 관한 사항을 규정한 법률인 '지조법'(地租法)을 개혁해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며 국가의 재정을 넉넉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12조는 모든 재정을 호조(戶曹)로 통할해 일원화한다는 것이다. 김옥균은 다른 관직은 마다하고 굳이 '호조참판'을 맡았는데, 이는 국가의 돈줄을 쥐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끝으로 13조 대신과 참찬은 의정부에 모여 정령을 의결·반포하고, 14조 의정부와 6조 외의 모든 불필요한 기관은 없앤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개화당은 역사상 처음으로 '입헌군주제'를 주장했다. 군왕은 상징적으로 존재할 뿐 실질적인 통치는 내각에서 하겠다는 것이다. 특별히 이 정강으로 말미암아 갑신정변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정치 개혁' 운동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다만, 일반 민중들이 정말로 원했던 지주-소작제 문제 해결을 위한 '토지 개혁'은 정강에서 빠졌다. 기존의 지주전호제를 그대로 유지한 채 세제개혁의 차원에서만 토지 문제를 거론하는데 그쳤다.
그러나 일부 한계에도 불구하고 개화당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파격적인 모습들을 선보이며 목표로 하는 조선의 급진적인 개혁을 의욕적으로 밀어붙일 태세였다. 고종은 혁신정강으로 왕권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꼈지만, 마지못해 개화당의 혁신정강을 수용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들에게 허락된 시간은 고작 46시간에 불과했다.
■청군 개입, 개혁 실패
갑신정변 직후 경우궁으로 옮겨졌던 민비는 곧 정변의 의도가 자신의 세력을 척결하는 데에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래서 민비는 경우궁이 비좁다는 핑계를 대며 개화당에게 창덕궁으로의 환궁을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청나라에서 은밀히 보낸 심상훈과 접촉하며 청나라 군대의 개입을 강력히 요청했다.
처음에 김옥균은 민비의 요구를 계속 거절했다. 급기야 고종까지 나서 창덕궁으로의 환궁을 요구했지만, 김옥균은 경우궁보다 조금 더 넓은 계동궁(桂洞宮)으로 거처를 옮겨줄 뿐이었다. 그럼에도 왕과 왕비의 요구가 빗발치자 김옥균은 일본 공사인 다케조에와 상의했다. 다케조에는 왕이 창덕궁으로 환궁해도 현재 일본이 보유한 병력으로 충분히 수비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이 말을 믿은 김옥균은 결국 고종과 민비를 모시고 창덕궁으로 돌아갔다. 개화당은 창덕궁에서 갖고 있는 모든 병력을 동원해 고종과 민비 주변을 3중(외위, 중위, 내위)으로 에워쌌다.
그러나 머지않아 우려했던 사태가 벌어졌다. 12월 6일 오후 3시에 예상보다 신속하게 1500명의 청나라 군대가 두 부대로 나눠 개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창덕궁의 돈화문과 선인문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이에 대응해 외위(外衛)를 담당한 조선군 친군영 전후영병이 결사항전을 했지만, 궁궐로 빠르게 진입하는 청나라 군대에 의해 무너졌다. 뒤이어 중위(中衛)를 담당한 일본군이 대응해야 했지만, 이들은 별안간 철병(撤兵)했다. 개화당으로서는 그야말로 충격적인 배신이었다. 일본은 현재 병력으로는 결코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고, 청나라와의 무력 충돌로 인한 외교 마찰 등에 적지 않은 부담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남아있는 소수의 내위(內衛)는 청나라 군대에 의해 속절 없이 죽거나 도망쳤다.
이렇게 개화당의 정변과 개혁은 '3일 천하'로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은 일본 공사관으로 피신했다가 21일에 일본으로 망명했다. 국내에 남은 홍영식·박영교 등은 청나라 군대에 의해 살해됐다. 이 밖에 갑신정변에 연루된 수많은 개화당 관련 인물들이 살해됐고, 권력은 다시금 청나라를 등에 업은 민씨 세력에게 넘어갔다.
한편, 갑신정변을 지켜본 민중들은 개화당의 개혁 정책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이 일본 군대를 끌어들여 왕과 왕비를 핍박했다고 여겼다. 이에 분노한 민중들은 개화당을 '왜당'(倭黨)으로 규정했고, 일본 공사관을 습격해 불태워버렸다. 직후에 일본은 조선에 이에 대한 책임을 물었고, 이듬해 10만원의 배상금과 일본 공사관 수축비를 부담하는 '한성조약'(漢城條約)이 체결됐다. 더 나아가 일본은 청나라와 담판을 지어 앞으로 조선에 변란이 일어났을 경우 청나라처럼 군대를 파병할 수 있는 권한을 획득했다. 이것이 바로 '텐진조약'(天津條約)인데, 이는 약 10년 후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 때 일본군 파병의 구실이 된다.
kschoi@fnnews.com 최경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