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왕비가 일본 낭인에 도륙되다 '을미사변'
2021.08.28 16:43
수정 : 2021.08.29 09:58기사원문
조선이 열강들에 의해 종속되면서 그 운명이 경각(頃刻)에 달려있을 때 조선의 궁궐 한복판에서 매우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조선의 왕비였던 '민비'(대한제국 선포 후 명성황후 추존)가 일본 낭인(浪人)들에 의해 처참하게 도륙(屠戮)된 것이다. 한 나라의 국모(國母)로 여겨지는 인물이 이러한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한 것은 세계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기실 민비는 역사적으로 비판을 받을 여지가 많은 인물이다. 조선 말, 최익현의 상소를 계기로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민비가 권력을 잡은 이후 조선에는 다시금 망국적인 외척세도(外戚世道) 정치 및 국정농단이 부활했다. 중앙 및 지방의 요직은 민비의 측근들이나 친인척들이 차지했고, 이들로 인해 부패와 사치, 매관매직(賣官賣職) 등이 성행했다. 무당인 '진령군' 등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민비 자신의 부패와 사치도 대단했으며, 이로 인해 조선의 국고(國庫) 탕진은 점차 가속화됐다. 더욱이 민비는 외세를 끌어들여 조선 백성들(동학농민들)에 대한 학살을 사주(使嗾)하기까지 하며 권력 유지를 도모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이처럼 문제가 많은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을미사변'(乙未事變)에 분노를 금할 수 없는 이유는 외세, 그것도 이웃 나라 일본이 버젓이 불법적이고 극악무도한 방법을 동원해 우리나라 땅에서 우리나라 왕비가 되는 사람을 살해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일본은 이 사건과 관련해 단 한번도 사과를 하지 않았다. 단죄를 받아야 할 인물이라도 마땅히 우리 손으로 단죄를 했어야 정상이며, 한 인물에 대한 평가와 역사적 사실에 대한 평가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결국 이 사건은 그 당시 조선의 국력(國力)이 얼마나 보잘것없었는지, 이에 따라 어떠한 비극이 발생할 수 있는 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작전명 '여우사냥'으로 불린 민비 시해(弑害) 사건, '을미사변' 전말을 되돌아봤다.
■친러파 득세, 日 위기감
1895년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의기양양해졌다. 민씨 정권과 결탁해 조선의 종주권(宗主權)을 주장하며 세를 떨치던 청나라를 군사적으로 굴복시킨 후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해 요동 반도와 대만 등을 할양받은 것은 물론 조선에 대한 확고한 우위를 확보했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1년 전에 일본은 이른바 '경복궁 쿠데타'를 통해 조선 조정에 친일 내각을 세웠고, 1·2차 갑오개혁을 배후에서 조종하며 조선에 대한 정치, 경제적 침투를 강화했다. 이제 라이벌이었던 청나라마저 몰아내면서 일본은 본격적으로 조선에 마수(魔手)를 뻗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일본 앞에 새로운 강적이 등장했다. 바로 극동아시아로의 남하(南下) 정책을 추진하고 있던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일본이 요동 반도를 점령하며 극동아시아의 강자로 부상하는 것을 크게 우려했다. 이에 러시아는 유럽의 독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을 압박하는 '삼국 간섭'을 단행했다. 삼국 간섭의 핵심은 일본이 요동 반도를 청나라에 되돌려 주라는 것이었다. 일본에게 있어 이는 대단히 굴욕적인 요구였다. 청일 전쟁에서 어렵게 승리를 거둬 쟁취한 성과물을 아무 조건 없이 내놓으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요동 반도를 돌려주게 되면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도 줄어들게 되고, 한반도의 주도권은 러시아에게 넘어갈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삼국 간섭을 수용했다. 굴욕적이지만 러시아 뿐만이 아닌 독일, 프랑스라는 초강대국들을 적으로 돌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일본은 요동 반도를 청나라에게 반환했고, 한창 잘 나가던 일본의 기세는 제대로 꺾였다. 한편, 고종과 민비는 이 같은 국제 정세를 주의 깊게 목도(目睹)하고 있었다. 그동안 청나라를 등에 업고 권력을 유지했던 민비는 이제 일본도 가볍게 굴복시켜버리는 러시아라는 더욱 든든한 뒷배를 발견한 셈이었다.
이에 고종과 민비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배격하는 '인아거일책'(引俄拒日策)을 추진한다. 특히 3차 갑오개혁 때 이완용, 이범진, 민영환 등 친러·친미 성향의 정동파(貞洞派)를 중용했고, 1·2차 갑오개혁을 주도한 박영효 및 어윤중, 김가진 등 친일파 관료들을 제거해나갔다. 또한 고종은 기존 일본군 장교가 맡고 있던 훈련대 대신 다이 장군 등 미국 군사 교관들에 의해 훈련 받은 군인들인 '시위대'(侍衛隊)가 궁궐 호위를 담당하도록 했다. 이 당시 조선의 중앙군은 시위대와 훈련대로 양분된 상태였다.
이처럼 조정에서 친러파 등이 득세하고 러시아의 영향력이 증대되면서 일본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면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그렇게 공을 들였던 조선 침탈이 완전히 좌절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했다. 그러자 일본은 세계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매우 극악무도한 반전(反轉)을 모색하게 된다.
■여우사냥 모의
일본은 친러파 득세 및 친일파 몰락이라는 조정의 세력 구도를 좌지우지하는 '원흉'(元兇)으로 민비를 지목했다. 더 나아가 민비가 없어져야 다시금 자신들의 영향력이 강화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에 따라 일본은 민비 제거 작전을 구체적으로 모의하게 된다. 작전명은 '여우사냥'. 한 나라의 왕비를 서슴없이 동물에 비유한 것이다.
표면적으로 이 작전을 주도한 인물은 1895년 9월에 새로운 일본 공사로 조선에 부임한 미우라 고로와 전임자인 이노우에 가오루였다. 우선 미우라 고로는 일본 육군 중장 출신으로 암살 전문가로 여겨졌다. 이노우에 가오루는 문관 출신이자 일본 정계의 거물이었다. 이노우에 가오루가 미우라 고로를 새로운 일본 공사로 적극 추천했고,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일본 공사관에서 민비 제거를 위한 밀실 모의를 시작했다. 그러나 한 나라의 왕비를 제거하는데 고작 이 두 사람만이 모의, 실행했을 리는 없었다. 이노우에 가오루는 당시 일본의 수상 격이었던 이토 히로부미에게 재가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고, 더 나아가 일왕(日王)도 이를 인지하고 승인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민비 제거 작전의 핵심은 일본이 주도적으로 이를 실행하지만, 마치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었다. 고심 끝에 미우라 등은 민비의 오랜 정적(政敵)이었던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조선인 훈련대를 끌어들여 이들에게 책임을 덮어 씌우기로 했다. 이에 따라 일본은 우선 훈련대의 1대대장 우범선과 2대대장 이두황, 전 군부협판 이주회 등을 포섭했다. 작전이 시행되면 훈련대는 일본 공사관이 좌지우지하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일본은 흥선대원군에게 찾아가 '국태공(國太公) 전하'라고 높여 부르면서, 대원군 세력 중용 등을 내세우며 민비 제거에 협조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런데 대원군은 이 같은 일본의 제안에 주저하는 모습을 보인 것으로 전해진다. 고령이었지만 정무 감각이 뛰어났던 대원군은 일본의 의도가 무엇인지 직감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대원군은 일단 협조하는 듯한 모양새를 취했다.
책임 전가용 포섭과 더불어 미우라는 한성신보(漢城新報) 사장인 아다치 겐조에게 상당한 자금을 주고 칼을 능숙하게 사용하는 일본인 낭인들을 동원하도록 했다. 다방면으로 수소문한 결과 동원된 낭인은 총 48명이었다. 이들 중 절반 이상이 일본 극우(極右)의 성지라고 불리는 구마모토시 출신들이었다. 그런데 이 낭인들의 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단순한 낭인들이 아니었다. 이 중에는 일본 최고 대학인 동경대 출신, 기자 출신, 심지어 훗날 일본 내각의 요직에 임명되는 엘리트들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어느 정도 준비가 완료된 일본은 최종적으로 작전 시행일을 10월 10일 새벽으로 정했다.
한편, 미우라는 작전 시행일 전에 조선 조정에서 눈치채지 못하도록 위장 전술도 구사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특히 미우라는 몇 일 동안을 밖에 나가지 않고 공사관 안에서 불경 만을 외는 듯한 모습을 보이며 주변의 경계심을 대폭 완화시키기도 했다.
■을미사변
그런데 순조롭고 치밀하게 작전을 진행하던 일본에게 뜻밖의 걸림돌이 발생했다. 민비 주도로 훈련대의 무장 해제 및 해산 조치가 진행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훈련대는 일본인 교관이 훈련을 담당하고 있었고, 훈련대 대대장들은 민비 제거 작전에 일정 부분 협조하기로 포섭된 상태였다. 그런데 만약 훈련대 해산이 현실화되면 작전은 무산될 가능성이 높았다. 시간에 쫓기게 된 일본은 결국 이틀을 앞당겨 작전을 시행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1895년 10월 8일 새벽에 을미사변은 일어나게 된다.
우선 당일 새벽 3시에 일본 낭인들은 흥선대원군이 머물고 있는 아소정(我笑亭)으로 갔다. 그 곳에서 잠자고 있던 대원군을 억지로 깨워 가마에 태운 후 신속히 경복궁으로 향했다. 일각에서는 이 날 대원군이 빨리 나타나 이른 시간에 작전이 시행될 예정이었지만, 일본의 의도를 직감한 대원군이 일부러 늑장을 부리는 바람에 작전 시간이 상당히 지연됐다는 설도 존재한다. 아울러 훈련대와 수비대도 경복궁으로 진격했다. 이 때 훈련대 대대장들은 일본에 포섭된 상태였지만, 대부분의 훈련대 병사들은 그저 야간 훈련이 실시되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이와 함께 미우라는 적지 않은 일본군도 동원해 경복궁을 포위했다. 마침내 새벽 5시에 대원군이 탄 가마가 광화문 앞에 도착하자 일본 낭인들과 훈련대, 일본군은 광화문의 빗장을 열고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일본 낭인들은 사전에 정보를 입수해 민비가 편전인 북쪽의 건청궁(乾淸宮)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일본 낭인들과 일본군이 건청궁으로 맹렬히 돌진하던 중에 훈련대연대장 홍계훈 부령과 군부대신 안경수 등이 이끄는 조선군 시위대와 교전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 병사 10여 명과 홍계훈 부령이 전사했다. 이후 숙직 중이던 다이 장군과 시위대장 현흥택 부령의 지휘 하에 급히 소집된 조선군 시위대가 저항했지만 멀지 않아 무너졌다. 생포된 현흥택 부령은 일본 낭인들에게 수모를 겪으며 민비의 소재를 추궁당했지만,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뒤이어 다이 장군으로부터 훈련을 받은 시위대 제1대대장 이학균 참령이 연무공원에서 일본 낭인들을 공격하려다 저지당했다.
이로써 모든 저항을 물리친 일본 낭인들은 건청궁에 진입해 궁녀들을 겁박하며 민비가 어디에 있는 지를 집요하게 캐물었다. 궁녀들은 그저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를 뿐이었다. 심지어 낭인들은 고종의 침소에도 들어가 사전에 준비한 왕비 폐출조서(廢黜詔書)에 서명하라고 겁박하기도 했다. 고종이 이를 계속 거부하자 고종의 어깨와 팔을 붙잡고 끌고 다니거나 왕세자에게 칼을 휘둘렀다. 일개 타국 낭인들의 극악무도한 행위에 의해 힘없는 한 나라의 군왕과 조정은 철저하게 유린당했다.
이런 가운데 마침내 일본 낭인들은 건청궁 동쪽 곤녕합에서 민비를 발견했다. 그런데 일본 낭인들이 정확히 어떻게 민비를 찾아냈는지는 여러 설(說)들이 존재한다. 민비가 초상화 및 사진 찍기를 싫어했기 때문에 그녀의 얼굴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었고, 일본 낭인들도 민비의 얼굴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우선 궁내부대신 이경직이 민비 앞을 가로막자 자연스레 일본 낭인들이 민비를 찾게 됐다는 설이 있다. 또한 일본인 무수리 한 명이 민비의 정체를 알려줬다는 설도 있다. 가장 결정적인 설은 일본 낭인들이 아이를 낳은 민비와 그렇지 않은 궁녀들의 옷을 모두 벗긴 후 가슴 및 음부를 일일이 대조해가며 민비를 찾아냈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일본 낭인들 중 한 명이었던 에조가 일본 정부에 올린 보고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민비를 찾아낸 일본 낭인들은 제대로 된 설명이 어려울 정도로 민비를 처참하게 능욕하고 난도질했다. 드라마와 달리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민비에게 일본 낭인 여러 명이 달려들어 칼을 휘두르고 짓밟았으며, 심지어 겁탈(劫奪)하기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살해한 후에는 칼자국 등의 증거를 없애기 위해 민비의 시신을 토막 내고 건청궁 동쪽 녹원 숲 속에서 불태워버렸다. 일본 공사 미우라는 민비가 시해당한 직후 건청궁으로 들어와 민비의 시신을 최종적으로 확인했다. 이로써 일본의 천인공노할 작전명 '여우사냥', 을미사변은 일본 입장에서 매우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사건 왜곡, 은폐
을미사변 이후 일본은 사건을 왜곡하고 은폐하는데 만전을 기했다. 을미사변과 관련해 일본이 내세운 최초의 공식적인 입장은 흥선대원군과 조선인 훈련대가 자행한 쿠데타이며, 고종의 요청에 의해 일본군이 파견돼 이를 진압했고 민비 시해는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일본은 친러파를 몰아내고 친일 성향의 4차 김홍집 내각을 출범시켰고, 이를 배후에서 조종하며 민비 폐위조칙을 발표하게 했다.
하지만 사건 현장에 있었던 다이 장군의 증언 등으로 인해 민비 시해가 일본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사실이 점차 알려지게 됐다. 이에 러시아와 미국 등은 분노했고, 각각 병사들을 동원해 일본을 겨냥한 무력 시위를 하는 한편 친일 성향의 4차 김홍집 내각을 인정하지 않았다. 더 나아가 다른 나라의 공사관과도 연합해 대일 공동 전선을 꾸리는 모습도 보였다.
국제적으로 여론이 악화되자 일본은 미우라 공사가 사건에 연루됐음을 시인했고, 미우라를 포함한 일본인 가담자들을 본국으로 송환해 수감했다. 또한 전임 공사였던 이노우에를 왕실 위문사(慰問使)로 파견했고, 일본군 철수 및 대한불간섭 성명도 발표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조치에 불과했다. 얼마 안 가 친러·친미 성향의 정동파들이 친일 내각을 쫓아내려 한 '춘생문(春生門)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은 표변(豹變)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혼란스러운 사건에 자신들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들이 개입됐다고 역공을 가함과 동시에 을미사변 책임에서도 교묘히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에 따라 앞서 본국으로 송환, 수감됐던 미우라 및 낭인들을 증거 불충분의 명목으로 전원 무죄 석방시켰다.
한편, 마땅히 을미사변에 분노해 일본에 강력히 대응했어야 할 고종과 조정은 의외로 소극적인 모습을 나타냈다. 고종은 민비의 죽음을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공식 발표했는데, 여기서 일본의 만행 등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되레 흥선대원군을 물러나게 하고 일본에 비해 사건과 연관성이 적은 일부 사람들을 처형하는 선에서 사건을 덮으려고 했다. 결과적으로 을미사변은 고종과 조정으로 하여금 일본에 대한 두려움을 크게 갖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후 조선의 친일 내각은 을미사변에 따른 민중들의 반감을 무마하기 위해 단발령(斷髮令), 군제 개편, 소학교 설치 등 급진적인 내정 개혁을 추진한다.
kschoi@fnnews.com 최경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