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엄마, 좋은 며느리… 그보다 더 중요한건 나를 돌보는 것

      2021.10.05 17:43   수정 : 2021.10.05 17:43기사원문
새벽 1시. 잠이 오질 않았다. 노트북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이런저런 웹사이트를 목적 없이 돌아다녔다. 내가 이러는 건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여든넷의 편찮으신 시어머니, 스물두 살의 딸과 사위. 어떤 방식으로든 내 손길이 필요한 이들과 한집에 살면서 받는 스트레스. 나는 녹초가 되었고 심히 낙심한 터였다. 오래된 안락의자에 몸을 묻었다.


'세상에, 은퇴 후 삶에 너무 큰 기대를 한 게 잘못이었을까?'

교단을 떠난 지도 2년이 되었다. 영어 교사로 32년을 일하면서 공립학교의 학사일정에 매여 살아온 나는 내 스케줄을 내 맘대로 통제할 수 있다는 사실에 무척 신이 났다. 여가생활과 모험으로 가득 찬 미래를 상상했다.

"알래스카 크루즈는 어때요?" 내가 활짝 웃는 얼굴로 물었다. "아니면 1월에 바하마를 가는 것도 좋지요." 남편이 맞장구를 쳤다.

우리는 가족을 부양하는 동안 미뤄왔던 버킷 리스트의 목록을 하나씩 지워나가는 꿈을 꿨다. 이기적인가? 아니, 자아실현이라고 말하고 싶다.

'조용한 시간도 가질 거야.' 나는 생각했다. 글도 쓰고 수년간 먼지를 뒤집어쓴 채 책장에 꽂혀 있는 책도 꺼내 읽을 것이다. 소파에서 빈둥거리며 신작 소설에 완전히 몰두한 내 모습을 상상했다.

환상이 깨지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6월에 은퇴를 하고 다섯달이 지났을 무렵 남편과 함께 올랜도에 살고 있는 딸 앨리슨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엄마, 브런즈윅으로 돌아가서 학위를 끝내고 싶어요. 브랜든과 여기 살면서 제 학비까지 감당하기가 힘들어요. 그래서 그러는데 엄마 아빠 집으로 다시 들어가도 돼요?"

딸아이 부부가 처음 올랜도로 갔을 때 우리는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돌아와도 된다고 말해 둔 터였다. 남편과 나는 빈 둥지에 남은 부모로서 삶을 즐기고 있었지만 딸 내외의 문제를 해결할 최선의 방안은 우리집으로 들어와 사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흔쾌히 수락했다.

딸 내외는 크리스마스 직전에 우리집으로 들어왔다. 방 하나가 그들의 물건들로 발 디딜 틈도 없이 꽉 채워졌다.

'짐을 줄일 생각은 못 한 거니?' 크기가 큰 물건들을 차고에 대충 밀어넣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다른 방 하나는 거실 겸 침실로 만들었다. 우리 집은 딸 내외가 기르는 2마리에 우리가 기르는 3마리까지, 총 5마리의 고양이로 북적대는 집이 되었다.

'괜찮을 거야. 계속 살 것도 아닌데.' 이렇게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그로부터 한 달 뒤, 남편이 어두운 얼굴로 퇴근했다. "여보, 어머니 몸 상태가 좋지 않아요." 시어머니는 우리집에서 한 시간 떨어진 곳에 살고 계셨다. 시어머니는 허리 통증으로 고생하고 계셨는데, 다니는 병원 모두 규모가 더 큰 우리 동네에 있었다. 상태가 호전되어 혼자 생활하실 수 있을 때까지 우리와 함께 사는 것이 합리적인 결론이었다.

"짐이 되기는 싫은데 미안하구나." 시어머니가 말했다.

"괜찮아요, 어머님. 어머님이 오셔서 저희도 좋아요." 나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그랬다. 시어머니와 나는 항상 사이가 좋았고, 그녀가 독립적인 생활을 중시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3대가 모여 사는 대가족의 혼돈은 어쩔 수 없이 여가생활과 모험을 향한 내 꿈을 깨뜨렸다. 남편과 나는 어느새 집안의 모든 일과 모든 사람을 안정되게 유지하는 접착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샌드위치 세대'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피부로 느끼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어느 날 저녁, 남편이 어머니를 부축해 욕실로 가는 길에 어머니가 쓰러지셨다. 나는 넋이 나간 채 911에 전화했다. 어머니는 병원에 입원하셨고, 클로스트리듐 디피실리균에 감염되었다는 진단을 받았다. 전염성이 매우 강한 세균성 감염병이었다. 어머니도, 남은 가족도 모두 겁에 질렸다.

남편, 딸 내외와 함께 어머니의 침실, 욕실, 침구, 옷을 소독했다. 우리에게도 증상이 나타나는지 계속 확인했다. 나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온 가족이 병에 걸리는 건 아닐까. 그러면 내가 가족들을 모두 돌볼 수 있을까.

아무도 병에 걸리지 않았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어머니도 퇴원해 집으로 돌아오셨다. 그러다 대상포진에 걸리셨고 이 때문에 허리와 다리에 만성 통증이 생기고 말았다. 직장에 있는 남편이 시간을 내지 못할 땐 병원과 물리치료에 어머니를 모시고 다니는 일을 내가 도맡았다.

무엇보다 나는 딸과 사위에게 좋은 엄마, 장모가 되고 싶었다. 사위는 정규 직장에 다니고 있었고, 앨리슨은 수업을 들으면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었다. 내가 시간이 더 많았기 때문에 집안일이나 시어머니를 돌보는 일을 도와달라고 부탁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인생의 이 시기에는 결국 내가 도맡아야 할 역할 아닐까. 이를 악물고 버티다 보면 이 시기를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학교에 있을 때는 하루가 정신없이 갔지만, 일정에 따라 움직이고 모든 일이 예측 가능한 범위 내에 있다는 것이 나를 잡아 주었다. 교실에서는 살아 있음을 느꼈다. 주어진 일을 완수하고 다른 이들을, 특히 10대 아이들을 도와주는 일이 좋았다.

이제 나의 낮과 밤은 스트레스와 불면과 상충하는 감정들로 뒤죽박죽이 되었다. 바라던 대로 상황이 풀리지 않은 것에 대한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30년 넘는 세월 동안 공익을 위해 일했으니 이제 휴식 시간을 가지면서 즐겁게 살 자격이 충분하지 않은가. 그러다가도 조금 더 인내하지 못하고 품위 있게 행동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죄책감이 들었다. 하나님께서 내가 감당하지 못할 거라 여기셨으면 가족을 위해 이렇게 희생하라고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렇지 않을까? 하지만 거의 매일 밤, 내가 하는 유일한 기도는 "도와주세요"라고 속삭이는 것이었다.

나의 불규칙한 수면 시간을 알게 된 앨리슨이 나에게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지 물었다. "엄마, 저와 브랜든은 엄마를 사랑해요. 엄마 곁에는 저희가 있어요. 그런데 엄마가 조금 걱정돼요. 밖에 잘 나가지도 않고 사람들도 안 만나시잖아요. 우울증이 아닐까 생각해요.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보시는 게 좋겠어요. 저하고 같이 상담사를 알아봐요."

딸에게 어떻게 내 진심을 말할 수 있을까. 전부 다 이 집에서 나가고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괜찮아지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그 대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앨리슨. 생각해 볼게."

이후로 변한 것은 없었다. 새벽 1시, 다시 여기 있다. 안락의자에 앉아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면서.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아 불면에 시달리고 진이 빠져 생산적인 일을 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이 화면에서 저 화면으로 클릭을 하다가 e메일을 열어 보게 되었다. 저건 옛 상사가 보낸 메일인데 확인을 하지 않은 건가? 저걸 어쩌다 놓쳤지?

'로리, 잘 지내고 있나요? 은퇴 생활 잘하고 있기를 바라요. 학교로 돌아올 준비는 되었어요? 주(州) 학력고사를 대비해 2학년 학생들을 가르칠 선생님을 구하고 있어요. 생각 있으면 연락줘요.'

안락의자의 등받이를 세웠다. 이전의 나였다면 학교로 돌아오라는 제안에 콧방귀를 뀌며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쉬느라 바쁘다고요!"

그런데 지금은 흥분이 온몸을 휘감았다. 집에서 벗어날 수 있고, 온 가족을 이어 주는 접착제 역할도 그만둘 수 있고,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곳으로 돌아갈 수 있다.

'네! 돌아갈게요.' 이렇게 답장을 보냈다.

가르치는 일은 돌보는 일만큼 힘들다. 하지만 돌봄과 달리 가르치는 일은 내 안의 무언가를 활성화시켰다. 많은 교사가 학생을 가르치는 일은 그저 평범한 재미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나는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우선 더 이상의 도움을 요청할 수 없다는 생각을 버릴 필요가 있었다. 앨리슨과 브랜든에게 학교로 돌아가 시간제로 일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엄마가 학교에 있는 동안 할머니를 돌봐 드리겠니?" 나는 앨리슨에게 부탁했다.

"그럴게요. 당연하죠."

학교로 돌아간 첫날부터 나는 활력에 넘쳤다. 2학년 학생들과 브레인스토밍을 통해 에세이 주제를 정했다.

"주제문은 에세이의 주제를 명료하게 담고 있어야 해요. 그리고 나중에 전달할 핵심도 포함해야 하고요."

'교복은 입어야 하는가? 그 이유는?' '이국적인 동물을 애완용으로 기르는 것은 인도적인가?' '담배는 금지되어야 하는가?' 학생들은 아이디어로 넘쳐났다. 나는 몇 달 만에 가장 즐거운 기분으로 집에 돌아왔다.

"학생 하나가 뭐라고 말했는지 아니?"

나는 웃으며 가족들에게 말하곤 했다. 물론 피곤하기는 했다. 하지만 진이 빠진 기분은 아니었다.

사실 힘이 더 솟았다. 앨리슨에게 듣고 있는 강의에 관해 물어볼 힘이, 시어머니를 더 잘 돌보아드릴 힘이, 심지어 책장에 방치된 책을 몇 권 읽을 정도의 힘도 생겼다. 딸이 옳았다. 나는 우울증에 '걸렸던' 것이다. 집을 벗어나 내가 사랑하는 일을 하면서 내 삶을 되찾은 것 같았다.

내가 학교로 돌아간 지 1년, 아이들이 우리집으로 온 지 1년 반이 지났을 때 앨리슨은 학사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딸 내외는 기쁜 마음으로 올랜도로 돌아갔고, 그곳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해 살고 있다. 시어머니도 건강을 회복해 당신의 집으로 돌아가셨다. 남편과 나는 빈 둥지의 평화로움을 만끽하고 있다. 몇 군데 짧게 여행을 다녀왔고, 새로운 곳으로 여행을 꿈꾸고 있다.

가족들이 전부 우리 집으로 들어오지 않았다면 어땠을지 잘 모르겠다. 집에서 혼자 지루해했을까? 답답함을 견디지 못했을까? 다시 학교로 돌아갈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그렇게 빨리는 아니었겠지만.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내 가족을 위해 바윗돌처럼 든든한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셨다. 하지만 내 모든 욕구를 포기하라는 뜻은 아니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나 자신 또한 잘 돌봐야 한다는 뜻이었다.

글·사진=가이드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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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sm64@fnnews.com 정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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