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기아·전염병도 받아들인 그녀, 유일한 거부는 ‘비관’이었다
2021.10.19 17:40
수정 : 2021.10.19 17:40기사원문
'이게 왜 이렇게 힘들지?'
코로나19 전에는 즐겁게 기다리던 통화였다. 할머니를 보살피는 데 도움이 되는 일 중 내몫은 통화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할머니와 얘기하려고 생각한 목록을 재빨리 훑어보았다. 세 살 딸 아멜리아가 최근에 몰두하는 놀이는 동물 인형을 위한 케이크 만들기와 남동생을 데리고 '아기 상어'에 맞춰 춤추기였다. 이제 두 살인 잭이 말하는 단어 조합은 '멍멍이, 왈왈, 아빠, 안녕'이었다. 할머니가 들으면 즐거워할 우스운 얘기들이었다.
할머니는 내게 할머니 이상이었다. 부모님이 갈라서서 할머니랑 같이 살려고 이사했을 때 나는 열두살이었다. 할머니는 공군이 되겠다는 내 꿈과 그 외 많은 것을 지지해 주었다. 단지 전화상이라고 해도 할머니를 위해 자리를 지키고 싶었다. 평소라면 찾아갈 시간을 냈겠지만, 할머니가 계신 양로원은 봉쇄 상태였다. 그런 제약은 할머니가 안전할 거라는 확신을 주어야 했다. 하지만 그보다는 할머니가 달나라에 계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할머니가 이런 고독 속에서 무엇을 겪어야 하는지 그려지지 않았다. 할머니는 아흔여덟살이었다. 황반변성(안쪽 망막에 있는 황반이 노화 등에 의해 기능이 떨어지면서 시력이 감소하고 심할 경우 시력을 완전히 잃기도 하는 질환)으로 독서나 TV 시청도 불가능했다. 격리의 필요성은 이해했지만, 단절 그 자체가 건강상 위험을 불러왔다.
어쩌면 내가 문제인지도 모른다. 아이들의 일상적인 근황 외에 더 깊은 얘기를 꺼내려고 하면 말문이 막혔다. 다른 사람들처럼 성경 구절을 청산유수로 늘어놓지도 못했다. 하나님을 대신해서 말하는 게 편하지 않았다. 그게 다였다. 내 감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저 툭 터놓고 이야기하거나 희망, 안도, 위안을 줄 수 있을 만큼 감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다. 군에 있을 때는 "최선을 바라되 최악에 대비하자"고 말하곤 했다. 요즘 나는 주로 후자였다. 나는 기업이 변화를 감당하게끔 돕는 컨설턴트였다. 나는 이미 너무 많은 걸 깨달아버렸고, 모든 일이 결국에는 잘 풀릴 거라고 믿는 것처럼 연기할 수는 없었다.
'시간 끌기는 충분히 했어.'
마지막으로 통화하고 2주가 지났다. 번호를 눌렀다. 내가 전화했다고 밝히기 위해 할머니의 자동응답기가 답하기를 기다렸다.
"안녕, 존! 네 전화를 받아서 정말 기쁘구나!"
할머니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와, 할머니, 잘 지내시는 거 같네요. 그곳 상황은 어때요?"
할머니는 한순간도 주저하지 않고 가족의 대소사를 세세히 일러주기 시작했다.
"네 엄마가 어제 전화해서 마당을 손질하고 교회 바자회에 내놓을 물건을 정리하는 중이라고 했어. 크리스 삼촌은 마운트 길리어드 풋볼팀 코치 일을 도우려고 은퇴 생활을 정리했고."
할머니는 말하는 내내 다채로운 논평을 곁들여 자식 넷, 손주 아홉, 증손주 열 명을 포함한 모두의 근황을 가뿐하게 해치웠다. 대부분 나는 처음 듣는 얘기였다. 하지만 할머니는 봉쇄 상태의 생활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할머니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걸까?
"그런데… 할머니는 어떠세요?"
"잘 지내지. 가야 할 곳도 없고 일정도 없어. 유일한 불만은 요리사야."
"오, 이런. 거기 음식이 별론가요?"
"지나치게 좋아. 우리를 죄다 뚱뚱하게 만들려고 해."
할머니가 웃으며 말했고 나도 같이 웃었다. 벌어지고 있는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할머니의 유머 감각과 남과 다른 면이 명민하게 살아 있어서 다행이었다. 할머니가 잘 지내신다는 데 안도했다.
"제가 얼마나 할머니를 사랑하는지 아셨으면 싶었어요. 잘 지내시고 곧 또 얘기해요."
전화를 끊었다. 할머니를 위해 내가 뭔가 '하기는 했는지' 확신할 수 없지만,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며칠 후 우려하던 소식을 들었다. 양로원에서 코로나19 양성 판정을 받은 사람이 나왔다고 엄마가 전해주었다. 시한폭탄처럼 시설 구석구석에 바이러스가 퍼지는 건 단지 시간문제일 듯싶었다. 할머니에게 전화할까 싶었지만, 할머니를 생각하면 겁이 난다고 말하는 것 말고 무엇을 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까. 실제 소식은 하나도 들은 게 없었다. 할머니를 불안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기다렸는데 할머니와 통화하지 않는 동안 내 공포심은 매일 자라났다.
할머니는 목적에 뿌리내린 삶을 사셨다. 할머니가 대공황 시기에 보낸 성장기를 이야기해 준 게 기억난다. 할머니에게 자전거를 사 줄 수 없었던 증조부모님이 경제적으로 훨씬 더 어려운 이를 도울 방법은 어떻게든 찾았다고 했다. 할머니는 간호학교에 등록했지만, 병든 어머니를 돌보느라 휴학해야 했다. 학장이 할머니의 경력을 먼저 쌓으라고 강하게 설득했을 때 할머니는 "우리 가족이에요. 제 모든 것은 가족 덕분이에요"라고 답했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간호학 과정에 지원서가 급증했다. 할머니는 등록하기 위해 한 학기 더 기다려야 했고, 몇 달 동안 잠수함 중계기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했다. 마침내 할머니는 부상병을 간호하는 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할머니의 헌신은 내가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할 마음을 먹게 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테러리스트들이 9·11 테러로 미국을 공격한 이후였다. 사관학교는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기초과정조차 통과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할머니는 꾸준히 계속하라고 나를 독려했다.
"이것도 지나갈 거야. 하나님께 의지하렴. 그분께서 널 끝까지 도와주실 거야."
할머니의 평생이 신앙의 증거였다. 이제는 분명 신앙이 할머니를 도와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게끔 할 터였다.
하지만 그다음에 전화했을 때 할머니의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여기 사람이 양성 반응이라는 소식은 들었을 것 같구나. 점점 나빠지고 있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심하다가 반사적으로 가족 얘기를 물었다. 할머니는 거의 끼어들지 않았다.
"틀림없이 할머니는 간호사로서 어려운 일들을 겪으셨을 거예요."
언제나 할머니에게서 볼 수 있던 강인함을 불러일으키길 소망하며 말했다.
아주 오랫동안 전화는 침묵을 지켰다. 이런 안 돼. 내가 옳지 않은 얘기를 꺼냈을까. 그냥 잡담을 해야 했나. 마침내 할머니가 말했다.
"전쟁 후에 소아마비 유행이 있었어."
할머니는 기억을 그러모으며 천천히 이야기했다.
"병원에는 고통스러워하는 아이들이 누워 있는 침대가 벽에서 벽까지 이어졌지. 절망적이었어."
할머니가 잠시 말을 멈췄다. 할머니의 얘기가 이렇게 무력하게 들린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거 아니? 우리는 기도하고 또 기도하면서 아이들을 돌봤어. 그러다 백신이 나왔고 그건 기적이었지.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일을 하실 수 있단다."
말을 잇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분께서는 물론 그러실 수 있죠.'
우리는 좀 더 이야기를 나눴고 마지막으로 작별 인사를 할 시간이 됐다.
"나는 흡족한 삶을 살았으니 하나님께서 집으로 돌아오라고 부르신다면 준비가 됐을 거다."
"할머니가 가까이에 좀 더 계시면 좋겠어요. 적어도 백살까지는요."
할머니와 대화를 나눈 후에는 늘 그랬듯이 긍정적이고 편안해진 기분으로 전화를 끊었다. 내가 할머니에게 도움이 되었을까?
얼마 안 있어 염려했던 또 다른 전화를 받았는데, 이번에는 삼촌이었다.
"할머니에게 경미한 뇌졸중이 나타났어. 시력이 훨씬 더 나빠져서 의사 얘기로는 법적으로 시각장애인이라고 하는구나. 지금 당장은 같은 시설에 계시지만 도움이 좀 더 필요하게 될 거야."
참기 어려운 소식이었다.
'하나님, 할머니가 얼마나 더 견딜 수 있을까요?'
이번에는 즉시 전화했다.
"안녕, 존! 네가 전화해서 정말 기쁘구나!"
전화를 받는 할머니의 목소리에는 활력이 넘쳤다. 할머니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인지 다시 의심스러웠다.
"할머니에게 약한 뇌졸중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런데 기분 좋으신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어떻게 그러시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존, 나는 대공황기에 자랐어. 우리 부모님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언제나 더 노력하고, 더 기도할 수 있다고 가르치셨지. 무슨 일이 있어도 긍정적으로 지내려고 애쓴단다. 그리고 가장 힘이 되는 건 너 같은 자손들과 이야기하는 거야. 내게 정말 중요한 일이지. 소중히 여겨진다는 기분이 들거든. 너희가 모두 아주 자랑스럽단다. 시설에서 꼼짝 못하지만 그래도 감사할 일이 아주 많아. 너희가 하는 모든 일을 들으면 삶이 더 풍성해지는 기분이란다. 계속 전화가 오게 해다오! 기도에 대한 응답이니까."
갑자기 내 손에 쥔 전화가 생명줄 같았다. 양방향으로 뻗은 구명 밧줄 같았다. 코로나19의 모든 소요와 불확실성 속에서도 나는 할머니가 긍정적으로 지내도록 돕고 있었고 할머니는 날 돕고 있었다.
할머니가 받아들이지 않은 딱 한 가지는 비관적 성향이었다. 나도 그런 방식으로 지낼 수 있다. 최선을 바라고 '그리고' 기도하는 거다. 그리고 할머니에게 전화하는 걸 잊지 않는 거다.
글·사진=가이드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