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 벌어 한국에 투자 "고국에 보탬된다면 그 가치 환산할 수 없다"
2021.11.02 18:15
수정 : 2021.11.02 18:43기사원문
특히 반일감정이 불거지면 난데없이 롯데제품에 대한 불매운동이 벌어지기도 한다.
조국에 대한 그리움이 투자 원동력
신 명예회장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가족들도 조국에 대한 그의 애정이 남달랐다고 말한다. 올해 1월 신 명예회장의 1주기에서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아버지는 조국에 대한 깊은 사랑을 가지고 끊임없는 도전과 남다른 열정으로 사회와 국가에 기여하고 싶어하셨다"고 회고했다.
장녀인 신영자 전 롯데복지재단 이사장도 "어린 시절 낯선 타국에서 힘들게 사업을 하시면서도 늘 고국과 고향을 생각하고 그리워하셨다"며 "그런 마음이 롯데라는 그룹을 일구고, 한국 경제에 이바지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신 명예회장은 20세인 지난 1941년 일본으로 건너가 낮에는 우유배달, 밤에는 와세다고등공학교를 다니며 '주경야독'을 실천했다. 그의 성실함을 높게 산 일본인 자산가 하나미쓰(花光)가 6만엔을 빌려주며 군수용 커팅오일(기계를 갈고 자르는 선반용 기름) 공장을 해보라고 권유해 사업을 시작했으나 두 차례나 미군의 폭격으로 전소됐다.
어려움을 딛고 다시 일어나 이번엔 커팅오일뿐 아니라 비누나 화장품, 포마드 크림을 만드는 공장을 차렸고, 때마침 물자가 부족했던 시기와 맞물려 그가 판매하는 화장품이 불티나게 팔렸다. 덕분에 그는 빌린 돈을 모두 다 갚고, 집도 한 채 선물할 수 있었다.
이후 신 명예회장은 미군부대에서 나온 껌을 처음 접한 후 껌 사업의 문을 열었다. 그가 만든 껌이 품질이 좋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주문이 밀려들었다.
결국 그는 1946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속 여주인공 샤로테의 이름을 딴 '롯데'라는 이름으로 껌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후 롯데는 1960년대 초 일본에서 껌으로 업계 1위를 차지했다. 신 명예회장이 맨주먹으로 시작한 지 15년 만이었다.
'국민의 더 나은 생활, 행복'에 투자
일본에서 크게 성공한 신 명예회장은 시간이 지나면서 고국에 투자하고 싶었다. 일본에서의 사업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기에 고국의 발전에 기여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는 당시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6·25전쟁 직후에는 한국은행 도쿄지점에 거액의 예금을 예치하기도 했다. 당시 한국은행 도쿄지점장으로 근무했던 유창순 전 국무총리는 그를 추억하며 "전쟁 중인 나라의 해외 지점에 무슨 수신고가 있었겠나. 그런 와중에 신 명예회장이 5000만~6000만엔을 선뜻 예금했다"며 "당시로서는 상당한 거금"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신 회장은 당시 '도쿄 일대에 거부 소리를 듣던 재일동포가 있었는데 갑자기 죽어버렸다. 그후 그렇게나 많던 재산이 일본 땅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전부 사라진 것을 봤다. 고국에 투자를 하면 영원히 남는다'고 말했다"며 "신 명예회장은 일찍부터 조국에 투자할 마음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시절엔 아직 한일 국교가 정상화되기 전이어서 국내로 재산 반입이 어려웠을 뿐"이라고 회상했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는 신 명예회장에게 남다른 기회로 여겨졌다. 일단 일본에서 성공한 제과업을 먼저 시작하기로 하고, 1967년 한국에 롯데제과를 세웠다. 한국롯데의 시작이었다. 이후 호텔롯데, 롯데쇼핑, 호남석유화학(현 롯데케미칼) 등을 잇달아 창업하거나 인수하면서 롯데그룹을 재계 5위의 대기업으로 만들었다.
무엇보다 신 명예회장은 국내 투자를 통해 얻게 된 수익은 해외로 송금을 하지 않고 국내에 재투자했다. 1979년과 1980년에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으로 인해 한국 경제가 어려움을 겪던 시기에도 신 명예회장은 한국에 대한 투자를 이어갔다.
신 명예회장은 '국민의 더 나은 생활과 행복을 위한 투자'에 집중했다. 특히 "가족이 함께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철학으로 건물을 지었다. 실내 테마파크 서울 잠실의 롯데월드, 서울의 랜드마크가 된 롯데월드타워가 대표적인 예다.
남다른 셈법으로 관광사업 개척
신 명예회장은 관광 산업 불모지나 다름없던 우리나라에 '관광보국(觀光報國)'의 신념으로 투자비 회수율이 낮으며, 막대한 자본이 투입돼야 하는 관광산업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진행했다. '관광을 통해 국력을 키우고 자원을 개발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국내 최초의 독자적 브랜드의 호텔을 건설하고, 세계 최대의 실내 테마파크를 조성하는 일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신 명예회장은 "외국 관광객들에게 언제까지나 고궁만 보여 줄 수는 없다"고 판단, 세계 최고층 빌딩을 지어 새로운 한국의 랜드마크로 만들겠다는 꿈을 꿨다. 롯데월드타워를 세계적인 관광 명물로 만드는 것이 일생의 소원이었고, 2017년 마침내 롯데월드타워가 완공되며 꿈을 이뤘다.
평생 한국인, 그리고 애국자
신 명예회장에 대한 또 다른 안타까운 루머는 일본으로 귀화했다는 설이다. 그는 주위에서 요청과 회유를 했지만 끝내 귀화하지 않았다. 평생 '한국인'으로만 살았고, 울산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 선영에 잠들었다. "일본에서 기업을 경영하고 있기 때문에 귀화하면 훨씬 유리했겠지만 한국 국적을 고집했다"는 것이 주변의 설명이다.
다만, 신 명예회장의 일본 이름은 따로 있다. 시게미쓰 다케오(重光武雄)다. 그는 2000년대 초 한 인터뷰에서 "귀화라니. 나는 일본인으로 귀화한 적이 없다. 일제강점기에 창씨 개명한 것을 그대로 쓰고 있을 뿐이다. 언제나 한국인이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왜 해명하지 않느냐'는 물음에는 "그런데 일일이 신경을 쓰면 뭣하오. 자연히 바로잡혀질 텐데"라고 답했다. 그가 일본 유학을 갔을 당시에는 창씨개명은 필수였다. 이는 시인 윤동주나 이상도 마찬가지였다.
장남인 신동주 전 일본롯데홀딩스 부회장과 차남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경우 각각 1993년, 1996년에 한국 국적을 선택해 지금은 두 사람 모두 단일 한국 국적이다.
뿐만 아니라 1997년 외환위기 때 외자를 유치해 온 사건도 신 명예회장의 애국심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달러 부족으로 인해 외환위기를 맞고 IMF의 관리를 받게 되자 신 명예회장은 재계 인사로서는 처음으로 1000만달러의 개인재산을 출자하고, 5억달러의 외자를 도입했다.
신 명예회장이 맨손으로 시작해 20여국에 200여개 계열사, 연매출 100조원의 롯데를 일굴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조국과 국민에 봉사하려는 마음이 있었다. 실제로 그는 1983년 한 칼럼을 통해 당시 사훈이던 '정열, 정직, 봉사'를 강조하기도 했다.
"고객인 국민에게 조금이라도 편리를 주고자 하는 마음에서 기업이 이뤄지고, 그 봉사의 대가로 이익이 생기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봉사하려는 마음에서 정열을 가지고 일을 하면 불량품이 나올 수 없고 불친절이 있을 수 없다. 나는 나와 한 배를 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정직하고 봉사하며 그리고 정열을 가져주기를 늘 염원하고 있다."
nvcess@fnnews.com 이정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