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바는 어쩌다 행동주의 펀드 꼭두각시가 됐나
2021.11.21 17:49
수정 : 2021.11.22 11:34기사원문
핵심은 회사를 3분할로 쪼개겠다는 것이다.
올 여름까지만 해도 스핀오프(분할)는 도시바 재건 방안에 있지도 않았는데, 지난 4월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건이 있었다. 48년 만에 외부에서 영입한 사장으로 이목을 끌었던 금융맨 출신 구루마타니 노부아키가 도시바를 영국계 펀드에 통째로 매각한 뒤 비상장화하는 시나리오를 추진했다가 최대 주주그룹을 형성하고 있는 행동주의 펀드들의 반발과 압박으로 사임하게 된 것이다. 행동주의 펀드 주주들의 승인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다.
지난 2017년 상장 폐지의 막다른 골목에서 행동주의 투자 펀드 등으로부터 긴급 수혈을 받아, 구사일생했으나 도시바가 치르고 있는 그 대가가 만만치 않다.
미래 첨단 사업 발굴에 전력투구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지난 5년간 '주주 환원 극대화'를 요구하는 최대 주주그룹, 행동주의 투자가들과의 일전을 벌이느라 우왕좌왕 경영 자원을 소진한 것이다. 이 싸움에 가담한 일본 경제산업성조차 "반시장적"이라며 몰아세우는 행동주의 투자가들의 공세에 체면을 구기고, 현재는 관망세다. 이번 분할안의 칼 자루를 쥐고 있는 것 역시 해외 투자 펀드들이다. 행동주의 주주들의 손아귀에 놓인 도시바, 경영 재건의 길은 아직 험난하기만 하다.
■'거함 도시바'…쪼갠다고 달라질까
구루마타니가 사실상 쫓겨난 뒤 소방수로 긴급 투입된 쓰나가와 사토시 회장 겸 사장(66)은 도시바 분할안을 발표하며 "해체가 아닌, 진화"라고 강조했다. 쓰나가와 회장은 이어 "주주가치를 극대화하는 방안"이라며 자세를 바짝 낮췄다. 그는 총 11분 30초의 발언 중 무려 15차례나 '주주 가치'를 강조했다.
분할안은 내년 3월 주주총회 때 최종 가부가 확정된다. '해체냐, 진화냐.' 그 어느쪽이라도 해도, 일본 제1호 세탁기와 냉장고 출시(1930년)로 일본 가전을 선도했으며 세계 2위 반도체 기업의 위용을 자랑하고, 미국의 원전 명가 웨스팅하우스를 손에 넣으며 자신만만했던 '거함 도시바'를 다시 꿈꾸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이미 매출은 과거 7조엔대에서 3조엔대로 축소됐다.
현재 도시바가 내놓은 분할안은 이 회사가 거느리고 있는 △인프라서비스 사업 △디바이스 사업을 분리해, 2023년 하반기 각각 상장하고, 존속법인이 되는 도시바는 메모리 반도체 기업 키오시아(옛 도시바 메모리)등의 지분을 보유한 채 전체 경영관리에 집중한다는 게 골자다.
인프라 서비스 사업(올해 예상 매출 2조1000억엔, 22조원)은 원전·신재생 에너지, 인프라 시스템, 빌딩 솔루션, 디지털 솔루션, 전지사업으로 구성되며, 디바이스 사업(8700억엔, 9조원)은 전력 반도체, 광반도체, 반도체 제조설비 등이다.
도시바 측은 각각의 사업가치에 비해 시가총액이 제 값을 인정받지 못하는 '복합기업 디스카운트'가 발생, 도시바 주가가 눌린 상태이며, 주주들로선 복잡한 사업 구조로 인해 기업이 뭘 하는 지 알기 어려울 수 있다고 설명했다. 고로, 분할을 통해 전체 의사결정이 신속하게 이뤄지고, 주주와의 소통이 강화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격적으로 기업 분할안이 발표됐으나 시장의 반응은 탐탁지 않다. 분할안이 처음 새어 나온 지난 8일 이후 도시바 주가는 우하향이다. 국제신용평가사인 S&P는 지난 16일, 투기적 수준(BB+)인 도시바의 신용등급을 향후 더 내릴 수 있음을 의미하는 '관찰대상(크레디트 워치)'로 지정했다.
도쿄 증권가나 도시바 내부에서는 이번 분할안에 대해 도시바가 이른바 '말하는 주주'로 불리는 행동주의 펀드 투자가들에게 끌려다닌 결과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실제 이날 도시바 경영진은 '마지막 황금알'인 메모리 반도체 기업 키오시아 상장 후 지분 매각에 따른 이익의 '전액'을 주주에게 환원하겠다고 발표했다. 3월에 발표한 경영계획에서는 '절반'이었다. 행동주의 주주들의 요구에 물러선 것이다. '배당 인상', '자사주 매입' 등의 요구는 연중 이어지고 있으며, 5년 치 영업이익 전액을 주주에게 환원하도록 정관변경까지 요구받고 있는 마당이다.
라쿠텐 증권 경제연구소의 도시다 마사유키 시니어 애널리스트는 "경영진은 '진화'라고 말하고 있지만, 분사해서 어떻게 성장하려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꼬집었다. 게이오대 오바타 세키 교수는 일본 니혼TV에 "행동주의 주주들이 하라는 대로 한 것일 뿐"이라며 "이번 분할안은 그들의 이익에 맞아떨어진다"고 지적했다. 이런 상황에서, 3분할로 한들, 과연 무엇이 바뀌겠느냐는 것이다. 오히려 직원들의 고용만 불안해진다는 지적도 있다.
일본 정부도 분할안을 예의주시하는 모습이다. 마쓰노 히로카즈 일본 정부 관방장관은 도시바 분할안에 대해 "도시바는 원전, 반도체 등 주요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면서 "향후 동향을 예의주시하겠다"고 밝혔다. 분할 시에는 몸집이 작아지면서, 해외투자사, 해외 기업에 팔릴 가능성이 높아진다. 경제안보를 강조하고 있는 마당에 통째로 해외로 팔려나가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 행동주의 펀드들은 누구…'원죄'는 경영진
'원죄'가 도시바 경영진에게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일본의 저널리스트 오시카 야스아키는 도시바 경영위기가 극에 달했던 2017년 저서 '도시바의 비극'에서 도시바 사태의 원인을 성공에 도취해 책임을 망각했던 무능한 경영진에게 비롯된 것이라고 적었다.
도시바는 지난 2015년 분식회계 발각에 이어 이듬해 무려 3배나 비싸게 주고 샀다는 미국 웨스팅하우스의 대규모 적자와 파산으로 2017년 3월 결산 당시 일본 제조업 사상 최대였던 9660억엔(10조1000억원)의 순손실을 기록했다. 상장폐지 기로에 섰고, 막다른 골목에서 영업이익의 90%가 나왔던 키오시아(옛 도시바 메모리) 지분 약 50%를 눈물을 머금고, SK하이닉스 등을 포함한 한미일 컨소시엄에 매각했다. 현재도 여전히 도시바가 40%의 지분을 들고 있으나, 경제안보와 직결되는 반도체를 해외 세력들에게 내어준 것은 일본 정부로서는 큰 타격이 아닐 수 없다.
이와 더불어 실시한 게 6000억엔(약 6조2600억원) 제3자 증자다. 당시 골드만삭스는 약 200억엔(약 2090억원)이란 거액의 수수료를 받고, 3주 만에 6000억엔 어치의 주식을 '완판'했는데, 문제는 60개가 넘는 투자사 리스트에 하버드대 기금운용펀드 등과 함께 미국 투자사인 팰러론, 행동주의 펀드인 엘리엇과 에피시모 캐피탈 등의 공격적 투자자들이 대거 포함됐던 것이다. 당시 급한 불을 끄기에 바빴던 도시바 경영진들은 이들이 차익을 실현하면 "곧 떠날 것"으로 오판했다고 한다. 그들은 여전히 도시바에서 더 크게 실현할 이익이 있다고 보고 있다. 다른 글로벌 큰 손들이 도시바로 접근을 꺼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현재 도시바의 외국법인 지분은 50.44%이며, 이 가운데 에피시모 캐피탈(최대 주주, 9.91%) 3D인베스트먼트(7.20%), 팰러론(5.37%)가 도시바 경영진과 긴장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들 약 22.48%가 대표적인 '말하는 주주'들이다.
최대 주주인 에피시모 캐피탈은 1990년대 말, 주주 운동을 벌였던 무라카미 펀드를 본류로 하고 있다.
무라카미 펀드란, 경제산업성 관료 출신 무라카미 요시아키가 만든 투자사로, 그는 한 때 일본 증권시장에서 '신의 손'으로 불릴 정도의 투자 귀재였으나 호리에 다카후미 전 라이브도어 사장과 결탁해 주식을 매매, 내부자 거래 혐의로 구속됐다. 이후 무라카미 펀드 세력들은 싱가포르에 에피시모를 설립, 이를 기반을 두고 공격적으로 투자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들은 주주제안으로 이사회를 자기 사람들로 채우고 있으며, 이를 막아서려는 일본 정부의 압박도 여론전으로 뒤집을 정도로 과감하다. 도시바 경영진과 회동을 한 당시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에게까지 불똥이 튀기도 했다. 그들이 선임한 변호사들로 구성된 도시바 거버넌스 강화위원회는 최근 도시바가 일본 경제산업성과 연계해 주주권한을 침해했다고 발표했다. 도시바 경영진은 "위법한 내용은 없었으나, 시장이 요구하는 윤리에 반한다"며 결국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한국 삼성전자, SK, 현대차 등도 해외 행동주의 펀드들과 긴장을 고조시킨 바 있어 도시바 사태는 한국 기업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다고 할 수 없다.
도시바를 에워싼 행동주의 펀드들이 자진해서 떠나지 않는 한, 이들을 쫓아낼 힘도 명분도, 도시바에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ehcho@fnnews.com 조은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