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시대 경제가 어땠길래

      2021.12.14 08:37   수정 : 2021.12.14 18:35기사원문
성장률 두자릿 수 고공 행진
3저등 외부여건 덕이 크지만
전문가 중용 스타일도 한몫

이재명 "공과 공존한다"고 하자
내로남불, 이중성격 비판 쏟아져

"흑백·진영논리 심각한 병폐"라는
이 후보 주장에도 귀기울였으면


[파이낸셜뉴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전두환 발언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심상정 정의당 대선 후보는 "희대의 내로남불에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이라고 비난했다. "이 후보가 양심이 있다면 똑같이 하시라"고 했다.

석고대죄를 하라는 말이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전 전 대통령이 '정치는 잘했다"는 취지로 말했을 때 이 후보가 '석고대죄하라'고 말한 것을 비꼰 것이다.
대선판에 재등장한 윤희숙 전 의원(국힘)은 페이스북에서 "정말 기억상실증이라도 있는 것인지, 세간의 말처럼 정말 이중성격인 건지 걱정"이라고 직격했다.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쫓는 격이라고나 할까. 전 전 대통령은 지난달 23일 별세했다. 그가 살아 있을 때 이 후보는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 입구 땅에 박힌 '전두환 기념비'를 보란듯이 두번이나 밟았다. "전두환씨는 내란범죄의 수괴이고 집단학살범"이라고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물론 조문도 가지 않았다. 이번에도 이 후보는 "국민이 맡긴 총칼로 국민 생명을 해치는 행위는 어떤 이유로도 용서될 수 없는, 결코 다시는 반복돼서는 안 될 중대범죄"라며 "그래서 그는 결코 존경받을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그러다 한마디 덧붙인 게 동티가 났다. 그는 "전두환도 공과가 공존한다"며 "3저호황(저달러·저유가·저금리)을 잘 활용해서 경제가 망가지지 않도록, 경제가 제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한 건 성과인 게 맞다"고 말했다. 왜 그랬을까? 보수의 아성인 대구·경북 유권자를 의식했을 수도 있고, 지론인 실용주의가 발동했을 수도 있다. 이 후보는 10월 후보수락 연설에서 "경제에, 민생에 파란색, 빨간색이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유용하고 효율적이면 진보·보수, 좌파·우파, 박정희정책·김대중정책이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이번 논란에 대해서도 그는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병폐가 흑백논리, 진영논리"라고 반박했다.

◇전두환 시대 경제가 어땠길래

전두환 대통령 시절(1980~1988년) 한국 경제는 아주 잘 굴러갔다.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란 말이 그때도 나왔다. 출발은 바닥을 쳤다. 1979년 10·26 사태와 12·12 쿠데타, 1980년엔 광주 민주화 운동이 터졌다.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혼란 속에서 1980년 성장률은 마이너스(-1.6%)로 고꾸라졌다. 하지만 성장률은 이내 두자릿수로 올라섰다. 83년 13.4%, 86년 11.3%, 87년 12.7%, 88년 12%다. 지금 보면 꿈같은 숫자다.



물가도 금방 안정세를 찾았다. 1970년대 내내 한국 경제는 고공 인플레이션으로 고통을 받았다. 전 전 대통령은 이걸 5% 아래로 낮췄다. 군부독재자 스타일로 물가를 세게 조인 덕도 있지만, 서민들은 오랜만에 찾아온 저물가를 반겼다.

전두환 시대는 또한 무역수지가 흑자 기조로 돌아서는 전환점이 됐다. 그 전까지 한국 경제는 늘 만성적자에 시달렸다. 특히 대일 적자가 고질이었다. 지금은 무역흑자를 당연시 여기지만, 그땐 무역적자가 당연했다. 이 기조가 제5 공화국 시절에 바뀐 것이다.

◇경제가 잘 나간 게 누구 덕인가

먼저 대외여건이 한국에 유리하게 굴러갔다. 이른바 3저 호황이 펼쳐쳤다. 먼저 저달러를 보자. 1980년대 미국은 무역·재정 쌍둥이 적자로 골치를 앓았다. 반면 일본과 독일 경제는 승승장구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행정부는 대미 무역에서 막대한 흑자를 올리던 일본의 팔을 비틀어 플라자합의를 강제했다. 엔화 가치는 즉각 두 배로 올랐다(엔고). 독일 마르크화도 비싸졌다. 반대로 달러화 가치는 뚝 떨어졌다.



원화 가치도 달러 대비 오르긴 했지만 엔·마르크만큼 오르진 않았다. 사실 미국의 신경은 온통 엔화에 가 있었다. 이 틈을 타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의 가격경쟁력이 높아졌고, 해외시장을 뚫고 들어갈 여지가 커졌다. 요컨대 플라자합의은 한국에 감춰진 축복이었다.

저유가도 거들었다. 1979년 이란에서 혁명이 발생하자 국제 원유시장이 2차 오일쇼크라는 카오스에 빠졌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서자 점차 충격이 가라앉았다. 기름값은 빨리 오른 만큼 빨리 떨어졌다. 예나 지금이나 유가 하락은 물가안정의 일등공신이다.

저금리 시대도 막을 올렸다. 2차 오일쇼크의 영향으로 물가가 뛰자 당시 폴 볼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은 인플레이션 파이터답게 연방기금 금리(한국은행 기준금리 격)를 두자릿수까지 올렸다. 그 덕에 물가가 하향 안정세로 돌아섰다. 1985년 미국 금리는 다시 한자릿수로 낮아졌다. 1987년엔 볼커의 후임으로 비둘기파 앨런 그린스펀이 취임했다. 그린스펀은 이후 장기 저금리 기조를 주도했다.

◇전두환이 경제에 기여한 몫은 없나


윤석열 후보는 지난 10월 "전두환 대통령이 군사 쿠데타와 5·18만 빼면 그야말로 정치를 잘했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다"고 말했다. "왜 그러냐면 (전문가에게) 맡긴 거다. 군에 있으면서 조직 관리를 해봤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붙였다. 윤 후보의 전두환 옹호 발언은 만약 대통령이 되면 세부적인 건 전문가에 맡기고 자신은 시스템 관리나 하면 되는 것 아니냐는 취지에서 나왔다. 이 가운데 '정치를 잘했다'는 대목만 부각되면서 정치 아마추어 윤 후보는 서둘러 광주를 찾아 머리를 숙였다.

전 전 대통령이 경제를 전문가에게 맡기고 자신은 큰 틀만 챙겼다는 평가는 널리 인정되는 분위기다. 이때 늘 등장하는 인물이 김재익 경제수석이다. 전두환은 그를 경제 가정교사로 삼았다. 김재익은 한국은행·경제기획원 출신으로 미 스탠퍼드대에서 경제학 박사를 받은 인재다.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는 유명한 말을 탄생시킨 당사자다. 김 수석은 1983년 미얀마(버마) 아웅산 테러로 순직했으나 저물가·고성장이라는 '전두환 경제'의 밑그림을 그렸다는 평가를 받기엔 부족함이 없다.

◇이재명이 욕을 먹는 게 맞나

다시 이 후보의 말로 돌아가자. 그는 "전두환도 공과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머리는 수긍하는데, 가슴이 쉽게 용납하지 않는다. 그럴수록 생전에 전두환이 보인 행태가 안타깝다. 그는 저 세상으로 가는 순간까지 1980년 광주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단 한번도 사죄하지 않았다. 이러니 사람들은 전두환이란 이름 석자만 들으면 다짜고짜 이부터 간다. 자업자득이니 누굴 탓하랴.


그렇다고 이 후보가 과연 석고대죄(席藁待罪)를 할 만큼 큰 잘못을 저지른 걸까. 석고대죄는 거적을 깔고 벌을 기다린다는 뜻이다.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병폐가 흑백논리, 진영논리"라는 이 후보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고 싶다.

전두환의 공과를 퍼센트로 나누면 과(過)가 90%가 넘고, 공(功)은 10%도 채 안 될 거다. 이 후보가 비록 공을 언급했지만 이 선을 넘은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렇다고 전두환의 공이 제로는 아니다. 한국 정치에서 가장 부족한 게 통합의 정신이다. 매사 소통하자고 하면서 아예 입을 닥치라고 하는 건 올바른 처사가 아니다.
대선 후보마저 진영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현실이 서글프다. 적과 동지의 구별이 정치의 본질이라고 하지만, 오로지 그것만이 정치라면 너무 삭막하다.
전두환의 잘못을 엄히 꾸짖는 것과 별개로, 우리에겐 함께 꾸려가야 할 공동체가 있다.


paulk@fnnews.com 곽인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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