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그날 만난 대동단 총재 김가진

      2022.02.19 10:00   수정 : 2022.02.21 12:37기사원문


[파이낸셜뉴스] 100년 전 대동단 총재 김가진을 만나야 했다. 항일 지하조직을 이끌던 사람이 왜 서훈을 받지 못했을까. 온전할 리 없는 시대상황에서 자칫 놓친 것은 없는지. 궁금증에 궁금증을 더했다. 특히 책 저자인 장명국 내일신문 대표의 생을 잘 알기에, 더욱 호기심을 자극했다.



구한말 고위 공직자가 말년에 독립투사로 변신해 그 과정에서 오류는 없는지 짚어봐야 했다.

공직자부터 되돌아보자. 그는 40세에 과거에 급제했다. 청일전쟁 과정에서 경복궁이 포위되었을 때 단신으로 고종을 구출해 갑오개혁의 중심이 되었던 인물이다.

고종의 최측근 외교관 이었다. 다시 말하면, 고종의 가장 중요한 ‘대일창구’였던 셈이다.


당시 일본의 저항과 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직업(외교관)의 역할을 보면, 고종 의중에 움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마음속에 일본을 반대한다 해도, 내색할 수 없는 자리에 있던 셈이다. 국익에 도움이 되는 길을 선택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종이 하사한 서울 경복궁 근처 청운동 1만평 부지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빼앗기는 곤경에 처했던 것을 보아도, 친일 프레임은 맞지 않다.

1919년 1월 고종의 승하와 함께 그는 새로운 세계관이 필요했다. 자신의 주군이 없어. 그 당시 시대상황에 맞는 역할을 찾았을 것이다. 그게 대동단이다.

그렇게 대동단을 조직하고, 총재가 되고 강령에 독립·평화·사회주의를 내세웠다.

3·1 운동과 함께 항일 투사가 된다. 공직에 있을 때는 그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공직에 물러난 뒤에도 조국을 위해 역할을 찾았다.

대한제국에서 더 이상 항일 투쟁을 할 수 없어 망명하고 임시정부고문,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고문으로 생을 마감했다.


■공직자로서 김가진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검서관으로 시작해서(지금의 9급에 해당하는 직급) 40세에 과거 급제한 후 60대 초 제학으로 은퇴했다.

공조판서 법부대신 농상공부대신 중추원의장 등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 시대 중요 요직을 역임했다. 고종은 30여년 그를 중하게 여겼다. 가까이에 둔 것이다.

당시 미·중·일·러를 포함한 제국주의 세력이 각축을 벌이던 격변의 시대였다. 그 난세에서 외교적 균형을 통해 공존을 택하려 했던 고종의 곁을 지킨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는 주청국 천진주재 종사관, 주일본 판사대신과 같은 경력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어 일본어 영어 등 여러 외국어에 능통하여 각국의 주요 인물들과 교섭했다. 당시의 국제 정세를 일견하여 고종에게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국제정세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으며. 이를 고종에게 상세히 보고했을 것이다. 고종이 곁을 내줄 수밖에 없는 시대 배경이다.

그는 1882년 제물포 개항에서 1892년 오스트리아와 통상조약에 이르기까지 외교관계에서 실질적 역할을 했다. 조약체결의 내용은 조선이 독립국임을 증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고 카이로선언에서 대한민국의 독립이 인정되는 핵심적 근거로써 작용한 바 있다.

일본대사 시절에는 훗날 조선통감이 된 이토 히로부미와도 교분을 쌓았고 4년간의 경험을 통해 나라의 근간이 경제력과 군사력에 있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했다. 이후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이 주도한 독립협회 위원이 되고 상무회의소를 설립하여 직접 양잠회사를 차리는 등 독립을 위해서 산업화가 필요하다는 행보를 보였다.

1897년 대한제국의 설립과 함께 그가 핵심이 되어 추진한 광무개혁은 나라를 내주지 않은 채 근대적 개혁을 달성하고자 한 고종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이미 대한제국은 그 기운이 기울었고 을사늑약 이후 헤이그밀사 파견이 빌미가 되어 강제 퇴위된 고종과 함께 그 역시 역사의 무대에서 내려왔다.



■대한제국 대신 가운데 독립운동위해 망명한 유일한 인물
2022년 7월 4일은 조선민족대동단 총재 동농 김가진 서거 100주년이다. 그는 대한제국 대신 가운데 독립운동을 위해 망명까지 결행한 유일한 사람이다. 74세에 조선민족대동단을 결성했고,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거기서 영양실조와 병고에 시달리다 끝내 눈을 감았다.

김가진은 1919년 고종 승하 이후 조선민족대동단을 결성하면서 신분·계급·성별·나이·이념의 차이를 극복하고자 했다. 그래서 일본 제국주의를 몰아내려 했다. 그는 과거의 시공간을 탈피해 미래를 향해 전진하는 시대를 상징할 만한 위인이었다.

민간인이 된 그의 마지막 선택은 독립운동이었다. 그는 대일 독립 포고문과 선전물을 제작하여 활동하다가 일제에 의해 발각되어 부하 단원인 전 협, 최익환, 정두화 등이 구속되자 1919년 10월 상해로 망명, 1920년 초 조선민족대동단 상해본부를 설치했다. 이후 동농은 안창호와 연계해 의친왕 이 강을 임시정부에 참여시켜 일본의 실체를 전 세계에 알리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노령의 그는 결국 가난과 지병으로 1922년 7월 이국의 땅에서 77세로 운명했고, 안창호, 신규식, 김 구 등은 그를 상해 서가회 만국공묘에 안장하여 영면에 들게 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고문에 대한 예를 갖춘 것이었다.



■김가진 서훈, 이제 국가가 나서야 한다
우선 저자는 내일신문 발행인 겸 대표이사 장명국(74) 사장이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와 1970~80년대 ‘노동법 해설’ 저술과 강의 등 노동운동가로 활약했다. 그는 1993년 주간 ‘내일신문’ 창간에 이어 2000년 일간지로 전환한 뒤 지금껏 무차입 흑자경영을 실현하고 있다.

이미 그는 노동법해설, 세계사 편력, 밥일꿈, 셋이 모여 삶이된다, 장명국의 세상읽기, 혼돈과 창조의 역사 등을 펴낸 바 있다.

‘대동단 총재 김가진’은 사료 중심의 담백하고 흥미진진한 필체로 대동단 총재로서 김가진의 독립운동에 초점을 맞추어 이 책을 서술했다.

친고종 개화파 외교관에서 독립운동가로 활약한 김가진도 고종의 곁을 지킨 고위 공직자로서 일제의 작위를 받은 책임을 묻는 것도 역사의 책무다. 그러나 공직으로 고종을 지켜야 할 위치에서의 그의 처세가 하나의 숙명이었다면 공직을 떠나 보여준 자유의지의 행보를 보다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가 보여준 구국의 항일투쟁은 뚜렷하다. 역사는 실증과 해석으로 이루어진다. 대동단 활동 서훈자가 이미 80여명에 이르렀고 그의 아들과 며느리까지도 서훈을 받았는데 그의 서훈을 외면하는 것은 국가의 직무유기다.
이제 국가가 나서야 한다.

장명국 대표는 “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런 분은 25년전에 이미 서훈을 받아야 했다”며 “일부 기능주의적 단순한 관점에서 외교관이나 고종의 대일창구로서의 표현이나 글들을 문제 삼아 서훈이 보류 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고종의 신하, 공무원 관료로 한 것일 뿐인데, 서훈 거부의 주요 이유가 되고 있다”며 “지금 관점과 개화기(조선말기) 관점에서 보는 김가진은 많은 차이가 있다”고 덧붙였다.

964425@fnnews.com 김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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