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16 소총 3발 맞고도 살았으니 운 좋다고 생각했는데…"
2022.03.19 10:01
수정 : 2022.03.19 13:51기사원문
[편집자주]'80년 5월'은 현재 진행형이다. 40여년이 흘렀으나 피해자들은 그날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원인 모를 질병과 트라우마, 우울증 등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정신병원에 입원하거나 자살한 피해자들도 많다. 최근 이들에 대한 정신적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뉴스1광주전남본부는 5·18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정신적 손해 배상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점검한다.
(광주=뉴스1) 박준배 기자,이수민 기자 = "운이 좋다고 생각했죠. 총을 3발이나 맞고도 살았으니까…. 그런데 잘못된 생각이었어요."
18일 오후 광주 광산구 신창동의 한 아파트에서 만난 조시형씨(70). 자신의 오른쪽 가슴과 겨드랑이 사이를 왼손으로 꾹꾹 누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죽지 않고 살아난 건 말 그대로 '기적'이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지옥 같은 날이 시작됐다. 매일 가위눌림을 당했다.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흥분하고 숨이 차 말하기도 힘들었다.
수년간 정신과 약을 먹었다. 약을 먹으면 그나마 헤롱헤롱하지만 그날의 얘기를 조금이라도 말할 수 있었다.
"40년이 지났지만 그날의 악몽은 사라지지 않아요. 여전히 5월만 되면 피가 끓고 흥분해요. 특히 동이 터 오르는 새벽에는 더욱 심해지죠."
1980년 5월 당시 조씨는 가족과 함께 서구 화정동에 살며 모 건설사 사무직으로 일하는 평범한 청년이었다.
그해 봄 군인들이 시민을 연행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봤지만 조씨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인 데다 대학생들이 불법 데모를 하다 잡혀가는 것으로만 생각했다.
5월20일, 우연히 금남로에 나온 조씨는 갑자기 터지는 최루탄과 사람들의 고함 소리에 깜짝 놀라 카톨릭 센터 건너편 옥상으로 피했다.
옥상에서 금남로를 내려다보니 군인들이 시민을 무차별 폭행하고 있었다. 군인들은 허리춤에서 대검을 뽑아 닥치는 대로 휘둘렀다. 그 중엔 연로한 할아버지와 배가 부른 임신부 여성도 있었다.
"시민들이 대검에 찔려 픽픽 쓰러지는 걸 보고 완전히 뒤집어진 거죠. 끔찍하고 징그럽고 무섭고 이런 건 둘째고, 그냥 열이 확 받더라고요. 내가 속았구나, 일반 시민들한테 저러는구나. 저걸 가만 놔둬선 안되겠다…."
마침 가족들은 가족 모임이 있어 며칠간 대구의 친척 집에 간 상황이었다. 말릴 사람도 없었다. 조씨는 그날 밤 자진해서 전남도청으로 들어갔다.
도청에선 박남선씨가 당시 시민군 상황실장을 맡고 있었다. 박씨는 조씨와 몇 차례 술자리를 가진 적 있는 '사회 후배'였다.
저간의 사정을 말하자 박씨는 조씨에게 함께 상황실에서 일하자고 제안했다. 그때부터 조씨는 헌혈이 필요한 환자를 병원에 실어 보내고, 약국에서 약품을 얻어오는 의료 업무를 전담했다.
23~24일 이틀간은 미국 AP통신 외신기자를 안내하는 일도 했다. '푸른 눈의 목격자'들을 지프차에 태워 적십자병원과 시신이 안치된 상무관 등을 오갔다.
26일 늦은 저녁이었다. 도청에 있던 시민군이 전부 1층 현관 앞으로 모였다. 계엄군이 밤사이 도청으로 진격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도청에서 최후 항전을 할 것이냐, 철수할 것이냐 기로였다.
옥상에서 정찰을 담당했던 한 나이 든 시민군이 10대, 20대 어린 친구들에게 "나갈 사람은 나가라"고 했다. 그는 "우리가 전부 여기서 죽으면 누가 진실을 알리겠느냐. 젊은 친구들은 나가서 살아남아야 한다"고 간곡하게 말했다.
그러나 스물여덟, 젊은 조씨에겐 더이상 두려움이 없었다. 도청에 남기로 했다.
"같이 죽자, 끝까지 함께 우리의 광주를 지켜야 한다, 이 마음이 컸죠."
27일 오전 3시30분쯤, '타다 탕탕' '두두두두' 총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조씨는 함께 상황실에서 근무하던 김형곤씨와 총을 들고 도청 정문으로 나와 콘크리트 구축물 뒤에 몸을 숨겼다. 여차하면 계엄군에게 총을 쏠 생각이었다.
"정말이에요, 나도 총을 쏘려고 나간 거예요. 근데 이상하게 멀리서 군인 놈들 형체가 보이는데 방아쇠가 당겨지질 않았어요. 막상 보면 못 쏘겠더라고요. 사람을 안 죽여봤으니 감히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겠더라고요."
조씨보다 나이가 어린 김형곤씨도 마찬가지였다. 김씨는 조씨의 옷깃을 잡고 울먹이다시피 했다.
"형, 어떡해요. 쏴요? 말아요? 저 못 하겠어요."
계엄군이 도청 근처를 에워쌌다. 계속 숨어있을 수도 없었다.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에도 늦었다.
조씨는 도청 뒤편에 숨겨놓은 차량을 향해 뛰기로 했다. 차를 타고 빠져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조씨가 김씨에게 속삭였다. "하나, 둘, 셋 하면 뛰는 거야. 하나, 둘, 셋!"
'다다다닥 다다다닥'
조씨와 김씨가 달리는 사이로 M16 소총 총알이 쏟아졌다. 도청 우측에 심어진 큰 나무를 지날 때였다. 조씨의 오른쪽 가슴과 겨드랑이 사이로 총알이 관통했다.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차량 앞에 도착했을 땐 이미 오른쪽 다리에도 두 발의 총을 맞은 상태였다. 두 사람은 재빠르게 차량에 올라탔다. 조씨가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고 액셀을 힘껏 밟았다.
"그 차가 기아 브리사 K303 모델이었어요. 20일부턴가 계속 도청에 세워져 있던 검은 차였는데, 우리가 혹시 몰라서 주워놨던 경찰 방패를 문짝 사이사이에 다 박아 놨어요."
핸들을 잡고 도청 바깥쪽으로 고정했다. 총을 맞을까 두려워 머리를 숙였다. 김형곤에겐 조수석 밑 틈으로 숨으라고 했다.
두 사람이 탄 차가 도청 밖으로 튀어나오자 길 양쪽에서 총알이 쏟아졌다. '타다다닥' '파바바박' 쏟아지는 총알에 차량 바깥에 불꽃이 튀었다. 문짝이 날아가고 차가 흔들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잠시 후 군인들이 멀어진 것인지 총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고개를 들자 금남로 2가까지 내려와 있었다. 유동 삼거리 부근까지 내려와 갓길에 차를 세웠다.
얼마나 총을 맞았는지 차에서 연기가 폴폴 올라왔고 문은 찌그러져 열리지 않았다. 팔꿈치로 옆 유리를 깨고 창문으로 빠져나와 골목으로 달렸다.
"그 바로 앞이 대인동 창녀촌이었어요. 그 골목에 조명이 켜진 여인숙이 보이길래 뛰어 들어갔어요. 주인 부부가 저는 침대 밑으로 숨고 김형곤은 뒷집으로 숨으라고 했죠."
침대 밑으로 들어가 총을 들고 누웠다. 주인 부부는 틈새에 이불을 개어 조씨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감춰줬다.
그제야 총 맞은 자리가 아파왔다. 옷을 찢어 묶은 뒤 지혈을 했지만 몸통과 다리에서 계속 피가 새어 나왔다. 어지럽고 심장이 두근댔다.
1시간쯤 지났을까. 군인들이 '우르르' 방 안으로 뛰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 여기 들어온 사람 있어, 없어!"
주인아줌마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도 없어요, 여기 온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아줌마의 목소리를 끝으로 조씨의 정신이 흐릿해졌다. 몇 번 정신을 잡으려고 했지만 아득해졌다. 여기서 그의 기억이 끊겼다.
"그 순간에 너무 무서우니까 가위에 눌린 거예요. 몸이 딱 굳고 '살려 주세요' 말을 하는데 목소리가 안 나와요. 피를 잔뜩 쏟은 채로 공기도 안 통하는 침대 밑에 숨어있으니 제정신이었겠어요. 그대로 기절했죠."
정신을 차리니 오전 10시쯤이었다. 주인집 부부가 조씨를 깨웠다. 동생인 김형곤은 총알을 맞지 않아 날이 밝자마자 어디론가 피했다고 했다.
방 안에 앉아서 식은땀을 닦았다. 총상을 입었으니 치료를 해야 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여인숙에 있던 전화로 집에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는 "대구에서 돌아와 보니 네가 없어 놀랐다"며 "아이고, 아이고" 통곡했다.
총알을 맞았다곤 차마 얘기하지 못했다. 몸이 좋지 않으니 얼른 오셔야겠다고 하고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어머니는 당시 기자로 일했던 고모부인 배재창씨와 함께 30분도 되지 않아 여인숙으로 달려왔다.
어머니와 고모부는 조씨 몸에 박힌 총알을 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고모부는 거리 골목마다 군인들이 있어 이대로 나가 치료를 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고민 끝에 조씨는 결단했다. 언제까지 여인숙에 숨어만 있을 수는 없었다.
가지고 있던 총을 분해해 보자기에 쌌다. 그는 보자기를 고모부에게 건네며 "고모부는 기자니까 취재하다가 주웠다고 하세요"라고 했다.
이어 "오시면서 선하게 생긴 지휘관 하나 있으면 모셔와 달라"고 했다. 고모부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여인숙 밖으로 나섰다.
잠시 뒤 여인숙 방 안으로 7명의 군인들이 들어왔다. 가장 중앙에는 대위 계급장을 단 남성이 섰다. 군인들은 어머니와 조씨에게 총을 겨누고 무슨 일이냐 물었다.
"어제 통행 금지에 걸려서 어쩔 수 없이 어머니와 여인숙에서 잤소. 새벽 서너 시쯤 바깥이 너무 시끄러워 나가봤는데 새카만 차가 지난 뒤 총알이 날아왔소. 나도 거기에 맞은 것이오."
군인은 아무 말 없이 5분간 조씨와 어머니를 번갈아 쳐다봤다. '이 새끼가 차에 탔던 그놈이 아닌가' 하는 표정이었다. 조씨는 군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좋소. 나도 당신 말을 믿겠소, 치료하러 갑시다. 단, 큰 병원 가지 말고 작은 병원 가서 일반 환자로 치료를 받으시오. 총상으로 왔다면 시선이 곱지 않을 테니."
조씨는 정말로 속은 것인지 기자인 고모부를 보고 봐준 것인지 아직도 헷갈린다고 했다. 그는 군인들의 부축을 받아 금남로 3가에 있는 김두헌 신경외과에 도착했다.
3일간의 입원 치료를 받은 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병원을 옮겼다. 언제 군인들이 와 잡아갈지 몰랐기 때문이다.
인근에 있는 노광철 의원으로 가 3개월간 진통제 치료를 받았다. 조그만 의원인 데다 당시 의술로 총알을 빼기 어려워 진통제로 버텼다.
"천운을 탔다고 생각했죠, 그때는. 총 맞고 안 죽었고 마침 고모부 덕분에 잡혀가지도 않았고, 치료도 받았으니….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그냥 그날 그곳에 있었던 것 자체가 운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죠."
조씨는 그날부터 7년 동안 가위에 눌렸다. 눈을 감으면 침대 밑에 숨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갔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고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계속해서 정신병원에 스스로 들어가야 했다.
"그때 먹은 약이 엄청 많아요. 정신병자로 살았어요. 7년 동안 약을 맨날 먹으니까 헤롱헤롱 해지죠. 멍해지니 사람 같지 않잖아요? 정신과 약을 끊었더니 그때부턴 당뇨, 고혈압 등이 괴롭혔죠."
5·18 이후 성격도 완전히 바뀌었다. 조씨는 자신을 '난폭한 놈'이라고 설명했다. 80년 5월 전에는 의리도 있고 다정한 사람이었는데 이후로는 매일 싸움만 해댔다고 한다.
직장 역시 그날 후로 제대로 다닌 적이 없다. 일하다가도 갑자기 가위에 눌리니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봤다.
특히 그의 정신착란은 늦은 봄이 되면 더욱 심해졌다.
"5월만 되면 몸이 이상해져요. 피가 끓고 흥분해요, 과호흡이 와서 말도 잘 못하고. 잠도 잘 안 오니까 새벽 동트는 모습을 보죠? 창밖을 보면 그냥 뛰어내리고 싶고…."
정신뿐 아니라 신체에도 문제가 많았다. 당뇨와 고혈압, 심근경색, 디스크, 통풍까지. 며칠 뒤에는 신장 투석이 예정돼 있다고 했다.
조씨는 1990년대 국가로부터 장애 12등급을 판정받고 4000만원의 보상금을 받았다. 당시 구금되지 않았기 때문에 보상금이 턱없이 부족했다. 지난 40여 년간 신체와 정신적 치료를 모두 사비로 충당해야 했다.
당뇨 판정 후에는 100m를 채 못 걷는 삶을 살고 있다. 총알을 빼지 못한 데다가 발목 밑으로 신경이 다 죽어 감각조차 없다.
현재 조씨는 아내의 경제권에 기대서 살고 있다. 마음이 따뜻하고 신앙심이 깊다는 아내는 아이들 돌봐주는 일로 월 60만원을 번다. 조씨 명의로 기초연금이 30만원 나오지만 모든 걸 합해도 두 사람의 수입은 월 100만원이 채 되지 않는다.
살고있는 집은 보증금 2000만원에 월 22만원의 월셋집이다. 월세를 내고 나면 병원 다니기조차 빠듯하다.
"정신적 피해보상금을 받으면 조그만 집이라도 사고 싶어요. 넓진 않아도 돼요. 침대는 싫고, 뜨끈한 온돌방에서 우리 아기 엄마랑 둘이 오손도손 지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