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취한 아내가 불냈다"…119녹취록에 담긴 진실 '달랐다'
2022.04.02 08:00
수정 : 2022.08.17 15:46기사원문
(서울=뉴스1) 김도엽 기자 = 1994년 결혼해 20년 넘게 부부로 지내온 남편 A씨는 2020년 1월30일 부인을 숨지게 한 방화치사범으로 홀로 법정에 섰다.
부부로 지낸 시간은 길지만 사이는 좋지 못했다. 평소 A씨의 불륜, 지속적인 폭행, 이사 문제로 부인 B씨와 다투는 일이 많았다.
2018년 3월8일 늦은 오후에도 이사 문제로 A씨와 B씨는 말다툼을 벌였다. 당시 추궁받던 A씨는 화가 나 리모컨으로 B씨의 손·뺨·귀를 때리기 시작했고, B씨는 폭행에 대항했다. 순간 격분한 A씨가 아파트 지하에 보관 중이던 휘발유 통 1개를 가지고와 침대에 누워있던 B씨에게 뿌리기 시작했고, 이내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B씨는 전신에 화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결국 패혈증성 쇼크로 사망했다.
현주건조물방화치사, 폭행 혐의로 기소돼 재판에 넘겨진 A씨는 당시 휘발유 통을 가져오긴 했으나 휘발유를 뿌리거나 라이터를 켜 방화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했다.
오히려 술에 취한 아내가 침대에 걸터앉아 라이터를 켜 휘발유 유증기가 폭발하며 화재가 났다고 주장했다. 휘발유 통을 두고 B씨와 실랑이해 휘발유가 뿌려진 것으로 고의로 휘발유를 뿌리지 않았다고 항변했다.
재판에서도 A씨 혹은 B씨가 고의로 휘발유를 뿌린 것인지, 누가 라이터를 켰는지가 쟁점이었다.
자칫 미궁에 빠질 뻔했지만 A씨는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덜미가 잡혔다. 사건 당일 A씨가 119상황실 대원에게 "제가 저, 부부싸움을 해갖고, 아파트 내가 그만 불 질렀습니다"고 신고한 것이다. 대원이 다시 불을 질렀냐고 묻자 A씨는 "예, 지르고 있습니다. 좀 따지지 마시고, 그렇게 아시고 좀 계십시오. 미안합니다"라고 답했다.
사고 이틀 뒤인 2018년 3월10일엔 B씨의 사망 소식을 듣곤 A씨가 아파트 경비원에게 전화해 휘발유 통을 치워달라고 말한 것으로도 파악됐다.
더욱이 휘발유 통에 대한 DNA 감식 결과, 실랑이를 했다는 A씨의 주장과 달리 B씨의 DNA는 검출되지 않았다. 부검감정서상 B씨의 등 부분에는 화재의 영향을 적게 받은 것으로 확인돼 화재 당시 의식이 거의 없는 상태로 침대에 누워있었던 것으로 재판부는 판단했다.
또 B씨는 사건 발생 직전 1시간 동안 A씨와 대화한 내용을 휴대전화로 녹음 중이었는데, 이 녹음파일엔 A씨가 "오늘 끝을 내 볼까" 등의 말을 반복적으로 한 음성과 휘발유 통을 가지러 가려던 A씨를 만류하는 B씨의 목소리도 담겼다.
재판부는 "A씨가 자신의 잘못을 진지하게 반성하지 않고, 유족들은 강력한 처벌은 원한다"며 "죄책에 상응하는 엄중한 처벌이 불가피하다"며 징역 15년형을 선고했다.
다만 A씨가 벌금형 초과 범죄전력이 없고, 부부싸움 중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지르게 된 것으로 보이는 점, 범행 직후 소화기로 화재를 진압해 B씨를 구출하는 노력을 했던 점을 유리한 양형으로 참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