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맞은 동료 업고 병원으로 달렸지만…결국 죽어 '죄책감'만
2022.04.09 07:44
수정 : 2022.04.09 07:44기사원문
[편집자주]'80년 5월'은 현재 진행형이다.
(광주=뉴스1) 박준배 기자,이수민 기자 = "창밖을 바라보던 직원 두 명이 머리에 총을 맞고 쓰러졌어요."
8일 오후 광주 동구 지원동의 한 가정집에서 만난 최종환씨(71)의 미간이 고통스럽게 찌그러졌다.
방바닥에 놓인 담배를 손으로 더듬거리며 찾았다. '그날'을 떠올리려면 담배가 필요하다고 했다. 눈을 지그시 감더니 담배 두 대를 연달아 피웠다.
"맞은편 건물에서 조준 사격을 한 거예요. 저격한 거죠."
거의 필터만 남은 담배 한 모금을 더 빨고선 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긴 한숨이 이어졌다.
"진짜 기억하기 싫은 날인데, 또 눈 감으면 엄청 선명하게 떠올라요. 그래서 화가 나요."
1980년 5월 최씨는 동구 충장로1가 무등극장 옆에 있는 광주통신공사에서 운전기사로 일했다. 광주통신공사는 전화 선로를 가설하고 관리하는 회사였다.
최씨는 당시 결혼을 앞두고 있어 매일 들뜬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결혼식 초대를 하느라 회사 동료들과 술자리도 잦았다.
통신공사가 옛 전남도청 근처라 계엄군과 시위대가 자주 충돌하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최씨는 별 관심이 없었다.
"결혼을 앞두고 있어서 다른 데는 신경을 쓰지 않았어요. 분위기가 뒤숭숭하고 출퇴근길에 차가 막히는 것이 짜증날 뿐이었죠."
21일 오후 2시쯤이었다. 그날은 바깥 일정이 없어 간만에 사무실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금남로 거리에서는 온종일 '탕, 탕!'하는 총소리와 시민들의 구호 소리, 비명이 반복해서 들렸다.
"사무실 사람들 다 시끄러워서 정신이 없었어요. 궁금하니까 업무에 집중도 안 되죠. '펑!' 소리 한번 나면 다들 '뭐야?'하면서 웅성대고…. 일을 하는 건지, 어디 피난 온 건지 싶었다니까요."
계속되는 총소리에 전화 설치부 현장 소장으로 일하던 조남신씨가 창가로 다가갔다.
잠시 뒤엔 군대에서 갓 전역하고 입사한 기술부 막내 윤성호씨가 조 소장 옆으로 섰다. 두 사람은 창밖을 내다 보며 "군인들이 몽둥이를 들고 있다", "총을 든 사람이 보인다"며 바깥 상황을 설명했다.
"통신공사 사무실이 시내 한복판 건물 5층에 있었어요. 바깥 상황이 싹 보이는 위치니까 두 사람이 대표로 그걸 알려준 거죠."
최씨는 가만히 자리에 앉아 두 사람이 전하는 바깥 상황을 듣고 있었다.
그때였다. '탕!'
갑자기 총소리가 크게 울리더니 조 소장과 윤씨의 머리가 뒤로 꺾였다. 창문과 책상 곳곳으로 시뻘건 핏방울이 튀었다. 총알이 조 소장의 머리를 관통하고 뒤에 있던 윤씨의 얼굴에 박혔다.
사무실은 아수라장이 됐다. 이 모습을 바로 앞에서 목격한 총무과 여직원은 날선 비명을 질렀다. 또 다른 여직원들은 창백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아 울부짖었다. 모두가 혼비백산했다.
군 간부 출신인 한 부장급 직원이 "우리들이 정신을 차려야 두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며 "아마 맞은편 건물에서 조준사격을 한 것 같다. 두 사람을 빨리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고 직원들을 다그쳤다.
다른 직원 한 명이 조남신 소장을 업었다. 최씨가 뛰어가 윤성호씨를 들쳐 업고 주차장을 향해 달렸다. 최씨의 등 뒤로 뜨뜻한 액체가 흘러내렸고 그의 옷은 검붉은 피로 물들었다.
"윤씨를 업고 회사 주차장까지 가는데 10여분 걸렸는데, 마치 1시간 같았어요.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무게도 느껴지지 않았고요. 차 뒷좌석에 조 소장과 윤씨를 태우고 병원으로 급하게 이동했죠."
기독병원에 도착했지만 다친 사람이 워낙 많아 바로 진료가 어렵다고 했다. 기독병원에서 나와 전남대병원 응급실로 갔지만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남광주역 앞에 있는 대우병원까지 세 번이나 병원을 옮긴 뒤에야 치료를 받게 할 수 있었다. 오후 4시, 총을 맞은 지 2시간이 지난 뒤였다.
최씨는 총에 맞은 동료 두 명을 병원으로 이송한 뒤 다시 회사로 향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회사 쪽을 향해 걷고 있는데 시청 앞 사거리(현 구 시청)에서 군인들이 최씨를 잡아 세웠다. 그리곤 막무가내로 곤봉질을 했다. 잔뜩 피 묻은 옷을 보고 시위대인 줄 알고 폭행한 것이었다.
"갑자기 맞으니 머리가 '띵'한데 여기서 멈추면 죽겠다 싶었죠. 무조건 집으로 가자,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해서 막 뛰었어요. 죽음의 숨바꼭질이었죠. 몸에서 피비린내가 철철 나고 곤봉에 맞은 머리에서도 피가 흘렀어요."
겨우 군인들 추격을 따돌리고 집에 도착했다. 머리가 찢어지고 피가 흘렀지만 무서워 병원에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어머니가 '빨간약'과 '반창고'를 붙여줬고 최씨는 머리를 다친 통증과 후유증으로 다음날 회사에 나가지 못했다.
이튿날인 23일, 가까스로 몸을 추스린 최씨는 회사로 향했다. 하루 지나 출근한 회사는 '초상집' 분위기였다. 조 소장과 윤씨는 모두 대우병원에서 응급 수술을 받았지만 결국 죽었다고 했다.
사무실엔 윤씨의 어머니가 찾아와 성호씨의 짐을 챙기고 있었다. 윤씨의 어머니는 성호가 총에 맞은 창문 앞에 앉아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최씨는 자책했다. 최선을 다해 병원 이송을 도왔지만 '내 잘못' 같다는 죄책감이 엄습했다.
"왜 대우병원으로 곧장 가지 않았을까, 더 빨리 뛰거나 운전할 수는 없었을까, 조금만 더 빨랐으면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죄책감…. 그 죄책감이 계속 밀려왔죠."
일주일 전 윤씨와 함께 식사하며 들었던 가족 얘기도 떠올랐다.
"성호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산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늘 의젓했구나 싶었는데, 성호 어머니가 사무실로 찾아와 우시는 모습을 보니…. 억장이 무너지더라구요."
곤봉에 맞아 찢어진 머리가 아파왔지만 내색도 못했다. 성호 어머니의 눈물을 본 뒤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더 아플까' 싶어서 참고 또 참았다고 했다.
그날 이후 당당하고 밝았던 최씨의 성격은 무디고, 무뚝뚝하게 변했다.
5월 마지막 주 주말에 예정됐던 결혼식도 8월로 미뤘다. 도저히 경사를 치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
성호씨와 조 소장 외에도 최씨 아버지의 친구, 예비 아내의 동창 등 결혼식에 초대하려던 많은 이들이 세상을 떴다. 주례를 맡기로 했던 변호사는 시위에 참여한 혐의로 구금됐다.
시간이 흐를수록 삶이 허해졌다. 사무실에 출근하면 유난히 성호씨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견디기 힘든 날이 계속됐고 죽을 것만 같았다. 결국 최씨는 생각을 바꿔 먹었다.
'더 친해질 걸,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걸' 후회하다가도 '더 친해지지 않아서 다행이고, 더 가까이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추억이 많지 않아서 다행이다'라고 스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슬픔을 감내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라고 최씨는 설명했다.
"죄책감으로도 죽을 것 같은데 슬픔까지 있었다면요? 그러면 여태까지 못 살았을 거예요. 왜 5·18 피해자들이 힘들게 살아남아 놓고도 자살을 하겠어요."
최씨는 86년까지 6년간 통신공사를 더 다녔다. 회사 직원들은 매년 5월마다 죽은 두 사람을 함께 추모했다.
회사를 그만둔 뒤에는 택시 운전을 했다. 일하면서 여러 사람을 만나고 많은 곳을 다녔지만 금남로와 충장로를 지날 때면 그날이 떠올랐다.
머리에 난 흉터는 시간이 흘러 옅어졌지만 죄책감과 그리움 같은 후유증은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았다.
자연스레 가족들과도 멀어졌다. 몇 년 뒤 우울증 판정을 받았다. 아내와의 관계가 소홀해졌고 결국 이혼했다.
1990년 국가로부터 5·18 유공사실을 인정받았다. 장애 14급으로 분류돼 총 3700만원의 보상금을 받았다. 홀로 월셋방 살이를 하던 최씨는 그 돈으로 작은 집을 얻었다.
최씨는 여전히 택시 운전 일을 하고 있다. 일을 하며 80년 5월 당시 차량 시위를 했던 운전기사들을 만나게 됐고 지금은 그들이 최씨의 유일한 친구다.
"동지들 만나서 정신적으로 많이 나아졌죠. 똑같은 사람들끼리 어울리면서, 정신과 치료도 받고 우습지만 같이 데모도 하러 다니고…."
일반인은 이해할 수 없지만 '그들끼리' 모이면 닮은 구석에 서로 공감하고 아픔을 치유할 수 있다고 했다. 가까운 사람을 떠나보낸 허전함, 살아남은 죄책감에 술을 진탕 마셨던 이야기,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봤던 트라우마 등을 함께 나눴다.
최씨는 정신적 손해배상금을 받으면 쓸 곳이 두 곳 있다고 했다.
하나는 자신의 노후자금이다. 아무리 택시 운전 일을 해도 돈을 많이 모으지 못했고, 혹시나 크게 아플 것을 대비해 노후 자금을 모아야 한다고 했다.
또 다른 한 곳은 동료들을 위한 일이다. 오월 동지들을 만나 친구가 되니 과거 동료였던 조남신 소장과 윤성호씨가 많이 떠오른다는 이유다. 두 사람을 위한 선물을 보내고 싶다고 했다.
"가끔 5·18묘지를 일부러 찾아가요. 두 사람 묘 앞에 가서 말이라도 붙이고…. '잘 지내냐', '거긴 어떠냐' 묻죠. 동료란 게 그런 거 아니겠어요. 성호가 웃는 모습이 아직도 생생해요. 이제 그만 죄책감에서 벗어나려고요. 꽃도 놓아주고, 선물을 사가서 마음도 전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