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휘말리지만 않았다면…" 산산조각 난 '광주 최고 재단사' 꿈
2022.05.07 10:00
수정 : 2022.05.07 10:00기사원문
[편집자주]'80년 5월'은 현재 진행형이다. 40여년이 흘렀으나 피해자들은 그날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원인 모를 질병과 트라우마, 우울증 등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정신병원에 입원하거나 자살한 피해자들도 많다. 최근 이들에 대한 정신적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뉴스1광주전남본부는 5·18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정신적 손해 배상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점검한다.
(광주=뉴스1) 박준배 기자,이수민 기자 = "양복점 하나 좋은 거 차려서 광주에서 제일가는 재단사가 되고 싶었는데…."
'그날'이 아니었다면, '그 자리'에 없었다면, '그'의 인생은 달라졌을까. 40여년간 되새김질하며 끊임없이 던진 질문. 아직도 답을 모르겠다고 했다.
6일 광주 남구 서동의 한 주택에서 만난 김일모씨(66). 광주 최고 재단사의 꿈을 키우던 그는 1980년 5월 계엄군에게 폭행당한 후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김씨는 "5·18에 휘말리지 않았으면 재단사로 돈도 벌고 외삼촌에게서 독립해 양복점도 차렸을 텐데 그 모든 꿈이 산산조각났다"며 억울한 삶을 한탄했다.
한편으론 간이화장실 '똥통'을 떠올리며 살아있음에 고맙다고 했다. 그는 "지금도 똥통에서 깨어나는 악몽을 꾼다"면서도 "똥통에 숨었다는 게 우스울지 모르지만 그게 없었다면 죽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남 함평이 고향인 김씨는 열다섯 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광주로 상경했다. 어머니는 김씨와 동생 두 명을 데리고 동구 학동에 터를 잡았다. 학업은 포기해야 했다. 김씨는 외삼촌이 운영하는 충장로 상가의 '보라매양복점'에서 일을 배우며 가장 역할을 했다.
80년 5월, 10년 가까이 재단 일을 배운 김씨는 '꼬마 재단사'로 불릴 정도로 실력이 늘었다. 금남로에 있다 보니 시위하는 모습을 자주 봤지만 김씨는 '배운 사람들'의 일, '남의 일'로만 생각했다.
"정치하는 사람도 '배운 사람', 데모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대학생'이잖아요. 나는 배우고 싶어도 못 배웠는데, 배운 사람들끼리 알아서들 나라를 잘 만들면 되지 왜 서로 욕하고 싸우는가 싶고 이해를 못하겠더라고요."
5월19일 오후 1시쯤, 김씨는 동구 동명동의 한 집에 양복을 배달하고 되돌아가던 길이었다. 당시 양복점은 주문한 옷이 완성되면 직접 집으로 배달을 해줬다. 충금지하상가 공사 현장을 지날 때였다.
골목 앞에서 군인들이 넝마주이를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있었다. 김씨는 자신보다도 못 배운 것 같은 넝마꾼을 왜 때리는가 싶어 그 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그 중 한 군인과 눈이 마주쳤다.
군인이 김씨를 향해 곤봉을 까딱이며 "학생, 이리 와봐"라고 말했다. 김씨는 놀라 "전 학생 아닙니다"라고 손사래를 치며 자리를 뜨려 했다.
군인이 뛰어와 "어딜 가"라며 김씨의 팔을 잡았다. 김씨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묻더니 조그만 수첩에 기록했다.
김씨는 그때까지만 해도 '신원확인' 후 문제가 없으니 순순히 보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순진한 생각이었다.
"갑자기 이유도, 설명도 없이 곤봉질을 시작한 거예요. '난 학생이 아니에요', '재단사예요' 계속 외쳐도 '반항하지 마'라며 폭행이 이어졌어요. 머리를 막 곤봉으로 때렸죠. 군홧발로 차고, 대검으로 팔뚝을 쑤셨어요."
대검에 찔린 팔에서 붉은 피가 쏟아졌다. 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선명했다.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이 몽롱해지고 의식을 잃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 캄캄한 곳에 갇혀있는 듯했다. 퀘퀘한 냄새가 났다. 몸은 습하고, 온도는 뜨거웠다. 끈적한 것들이 잔뜩 묻어 있었다.
"고갤 들어보니 빛이 보이길래 '살려주세요'라고 외쳤죠. 겨우 일어나 빛을 향해 나가 보니 공사장 간이 화장실 '똥통' 안이더라고요."
공사장에서 일하는 아주머니가 황급히 수건을 가지고 김씨에게 달려오며 "아이고, 안 죽었고먼"이라며 김씨의 몸을 닦아줬다.
당시 시위하던 목포대 학생들과 공사장 인부들이 의식을 잃고 쓰러진 김씨를 현장 간이 화장실에 숨겼다고 했다.
군인들이 공사장까지 찾아와 숨은 시위대를 찾으니 '미안하지만' 들키지 않게 하려면 '똥통'에 숨기는 방법밖에 없었다고 덧붙였다.
잠시 뒤 시위를 마치고 돌아온 학생들이 김씨를 찾았다. 이대로는 집까지 혼자 갈 수 없으니 연락을 해주겠다며 보호자 연락처를 대라고 했다.
'22-3433'. 김씨는 외삼촌이 있는 양복점 번호를 댔다. 잠시 뒤 외삼촌이 그를 데리러 왔고 두 사람은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
황금동에 있는 '한양섭외과'에 도착했다. 한양섭 원장은 전남대병원 신경외과 과장 출신으로 나름 유명했다. 양복점 고객으로 평소 김씨와도 안면이 있었다. 한 원장은 김씨를 보더니 "당장 머리 수술을 해야 한다. 뼈가 으스러졌다"며 수술 준비를 했다.
몇 시간의 대수술이 끝난 후 김씨는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수술이 끝나고 입원 치료를 받아야 했지만 '군인들이 다친 사람들을 잡아 삼청교육대로 보낸다'는 소문이 있어 입원할 수 없었다.
항생제와 진통제 등 주사를 맞지 못한 김씨는 수술의 고통을 스스로 이겨내야만 했다. 자고 일어나면 수술한 자리가 퉁퉁 부었다. 머리를 수술해 매일 밤 엎드려 자야 했다.
10일간의 항쟁은 끝이 났다. 거리는 피비린내와 어머니들의 울음소리로 가득했다. 광주는 진압됐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듯했다. 하지만 김씨는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후유증이 괴롭혔다. 기립성 빈혈과 두통, 현기증 때문에 양복점에 나가지 못했다.
급격한 우울증이 찾아왔다. '재단 가위'로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기도 했다. 우울증에 김씨는 점점 쇠약해졌다. 1984년 봄쯤, 보다 못한 어머니가 기분 전환 겸 김씨에게 여행을 가자고 제안했다.
어머니의 친구 부부들과 '부부 동반'으로 여행을 가기로 했다. 남해로 가는 버스에 탔다. 가는 길에 검문소가 있었다. 검문소 앞에서 경찰이 버스를 세우고 올라탔다.
"젊은 사람이 나 하나가 유일하니까, 갑자기 내 이름이랑 생년월일을 묻더라고요. 이후에 어디론가 전화를 하더니…. 갑자기 '빨갱이' 잡았다면서 저를 때렸어요."
80년 그때 처음 군인에게 맞을 때 불러준 신원 정보가 기관 어디엔가 기록된 모양이었다.
경찰에게 폭행당하는 김씨를 보며 어머니는 버스 바닥에 주저앉았다. 함께 관광을 떠났던 어머니의 친구들도 "왜 이래요"라며 말렸다.
다행히 주변 사람들의 증언으로 연행은 면했지만 그날의 기억은 김씨에게 너무도 끔찍하게 남았다.
그날 이후 김씨의 우울증세는 더욱 심해졌다. 그는 세상과 단절한 채 입을 꾹 다물었다.
1988년에는 어지러움이 계속돼 병원을 찾았다. 외상후자극장애, 뇌진탕, 두부 열창, 복부타박상, 머리와 복부근의 마비증상 등 다수의 진단을 받았다.
이후에는 정신착란 때문에 나주에 있는 정신병원에도 여러 차례 입원하기도 했다.
1990년 국가로부터 5·18 유공자에 대한 보상금 지급이 시작됐다. 김씨는 그동안 치료받은 기록을 토대로 '장애 9급' 판정을 받았다. 보상금은 7900만원이 나왔다. 당시로선 큰 금액이지만 벌이가 없어 전부 생활비로 쓰게 됐다.
"40여 년 살면서 약 없이 지낸 날이 하루도 없어요. 머리 통증이 주기적으로 찾아와 바깥에도 잘 못 나가고, 특히 날이 더워지면 눈이 충혈되고 그대로 쓰러진 적도 있어요."
김씨는 5·18 정신적 손해배상금을 받으면 가족들을 위해 쓰고 싶다고 했다.
그는 혹시나 하는 손가락질이 무서워 아내에게도 5·18 유공자 임을 숨기고 결혼했다. 보상금 서류를 발급 받을 때 처음으로 아내에게 사실을 털어놨고 아내는 그의 상처를 따뜻하게 감싸줬다 .
"처자식을 제대로 봉양하지도 못하고, 돈 한 푼 벌어서 학비나 용돈을 준 적도 없어요. 집사람이 뒷바라지를 다했죠. '광주'라는 우리 공동체, 가족을 위해서 국가의 일에 휘말렸다가 내 가족을 고생시켰어요. 보상금을 받으면 남은 삶은 우리 가족을 위해 쓰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