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 듣고 삼겹살에 소주… ‘한국풍’에 지갑여는 일본MZ들
2022.05.08 17:48
수정 : 2022.05.09 17:42기사원문
【파이낸셜뉴스 도쿄=조은효 특파원】 지난 6일 '일본 속 한류 성지' 일본 도쿄 신주쿠구 신오쿠보. 해가 지기 시작하자 인파가 더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 거리의 '주객'인 일본 1020대 여성들의 고음의 유쾌한 목소리, 빠른 발걸음들이 활력을 더했다. 닭갈비, 삼겹살, 양념치킨, 김밥 등 한국 음식을 파는 식당들은 대부분 만석이었고 한국 화장품 판매점, 한국 슈퍼마켓 앞은 발 디딜 틈 없이 인파로 북적였다.
하라주쿠뿐만이 아니다. 일본 내 '한국 앓이'는 한국 스타일 헤어와 메이크업, 한국 스타일의 인테리어, 한국음식, 한국 문학, 한국 웹툰 등 전방위적으로 확산되는 양상이다. 이미 긴자, 신주쿠, 시부야 도심부는 물론이고 도쿄의 대표적 고급 주거지인 세타가야구의 슈퍼마켓부터 규슈와 홋카이도의 슈퍼마켓과 편의점까지 한국제품들이 속속 입점했다. '전후 최악'으로 일컬어지는 한일 양국 간 정치갈등, 코로나 확산으로 인한 2년여간의 관광·왕래 중단에도 되레 '한국풍'이니 '한국스타일'에 대한 일본 사회의 갈증은 더욱 커진 모습이다. 더불어 한층 견고해졌으며, 저변도 확대된 양상이다. 이른바 '4차 한류 붐'이다. 현지 한류 전문가들은 일본의 입국규제 등 왕래규제가 해제되면 일본 내 제4차 한류의 폭발력은 전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력할 것이란 전망을 내놓고 있다.
■"한국에 가고 싶다" 도한놀이에 빠진 日 젊은 여성들
신오쿠보는 최근 일본 여성들의 사이에서 확산되고 있는 '도한놀이(渡韓ごっこ, 도칸곳코)'의 주무대다. 도한놀이는 코로나19로 지난 2년여간 한일 양국 간 관광방문이 중단되자 한국여행에 대한 갈증을 달래고자 호텔에서 한국음식, 한국풍 생활양식을 즐기면서 마치 한국여행을 하고 있는 듯 기분을 내는 놀이문화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일본 2030대 여성들 사이에서 급속히 확산됐다.
도한놀이에는 일종의 공식이 있다. 유튜브에 올려진 영상 하나를 소개하자면 신오쿠보를 찾아 K팝 스타들의 사진 등 '굿즈'를 둘러본 뒤 호텔에 투숙하고, 호텔방에서 도쿄의 하늘을 보며 이렇게 말한다. "아~! 한국이다." 쇼핑해 온 허니버터칩 등 한국 과자, 양념치킨 등을 침대 위에 잔뜩 늘어놓는다. 와인잔에 한국 음료 '봉봉'과 '갈아만든 배'를 담아 건배를 하며 다시 외친다. "한국에 왔으니까, 짠~!" 한국으로 여행온 듯, 연출하는 20대 여성 유튜버들의 '한국 여행 놀이' 장면이다. 도쿄레이호텔, 신주쿠 프린스 호텔 등은 물론이고 후쿠오카 등 지역의 호텔들도 도한놀이 숙박상품을 출시했다. "일본에 있으면서 마치 한국을 여행하는 것 같은 하루를 선사하겠다"며 한복 착용 체험, 호텔 내 한국 식품 판매 특설부스 설치, 한국 K팝 영상 감상회 등을 프로모션으로 내걸었다. 이른 바 '도칸스'다. 도한놀이와 호캉스(호텔+바캉스)의 조어다. 당초엔 봄방학을 맞아 1020대 여성들을 겨냥한 것인데, 3040대 여성들에게도 인기가 확산됐다.
■편의점·동네마트로 '골목골목' 한국식품 진격
한류 확산으로 성장기를 맞이하고 있는 분야 중 하나가 식품산업이다. 최근 도쿄 현지 식품업계는 일본 최대 라면업체인 니신이 최근 매운맛 컵라면을 출시한 것을 매우 흥미로운 현상으로 보고 있다. 과거 일본에서 좀처럼 선호되지 않았던 매운맛 시장을 한국 농심 신라면 등이 점유하자 이에 질세라 반격에 나선 것이다. 매대 경쟁에 불이 붙은 것이다. 이미 만두, 김밥, 잡채, 닭강정 등 한국의 가정식간편식(HMR)들은 일본 전역 마트에 속속 입점했으며 대형마트의 경우 별도의 한국 식품 전용매대까지 구성하고 있다.
한국 식품기업 대상은 지난달부터 홍초 소다를 일본 편의점 세븐일레븐에 납품을 시작했으며, 하이트 진로의 참이슬 소주 역시 지난해 하반기부터 편의점에 진입을 뚫었다. 하이트진로의 지난해 일본 소주 수출은 30% 가까이 증가했다.
일본 소비자의 한국 음식에 대한 기호가 변하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현지화된 한국 음식이 아닌, 한국 본토의 본연의 맛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김치, 라면이 그 예다. 역대 최고를 기록한 지난해 김치 수출액(전년 대비 10.7% 증가, 1억5992만달러)중 절반인 50.1%(8012만달러, 한국 관세청)가 일본으로 수출됐다. 대상 재팬 관계자는 "일식, 중식, 이탈리아식처럼 한식이란 새로운 카테코리가 시장에서 만들어지고 있다"면서 "한국 본연의 맛을 찾는 소비자들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대상의 경우 일본 시장 매출액이 2019년 대비 현재 약 2.5배 증가했다. CJ제일제당은 일본 현지시장에서, 교자(餃子)로 불리는 만두를 모두 한국식 발음 그대로 '만두'로 붙이고, 배우 박서준을 기용해 공격적으로 일본 식품 시장에서 점유율 확대에 나섰다.
■日여중·여고생들의 유행어 트렌드는 '한국'
일본 마케팅 업체 AMF가 발표한 '2021년 하반기 전국 여중·여고생의 유행어 대상'의 총 20개 키워드 가운데 7개가 '한국과 관련된 것'이었으며, 모두 상위권에 랭크됐다. 한국 오디션 프로그램 퓨로듀스101의 일본판에서 데뷔, 광의의 K팝으로 불리는 아이돌그룹 'INI', 한국 음악전문채널 엠넷(Mnet)의 한중일 걸그룹 프로젝트인 '걸스 플래닛999', 넷플릭스 화제작 오징어 게임, 도한놀이, 한국·아시아 중심의 온라인 쇼핑몰인 '큐텐' 등이다. 닛케이기초연구소의 히로세 료 연구원은 최근 보고서를 통해 "(일본) 젊은이들의 소비 문화를 얘기하는 데 있어 한국이 필수적인 단어가 됐다"고 진단했다. 한류 붐을 탄 한국 기업들의 자신감 있는 진출도 한몫했다. 웹툰의 경우 다음카카오의 '픽코마'와 네이버 '라인 망가'가 현재 일본 웹툰 플랫폼의 1·2위를 달리면서 '대세 플랫폼'이 됐다. 픽코마의 지난해 앱 다운로드 건수는 3000만건을 돌파했으며, 누적 거래액은 10억달러(약 1조원)를 넘어섰다.
1020대는 현재 일본 내에서 한국에 대한 '인식 변화 주도층'이다. 올해 1월 일본 내각부가 발표한 외교관계 여론조사에서 '한국에 대해 친밀감을 느낀다'는 응답은 18~29세가 전 연령층에서 가장 많은 61.4%로 나타났다. 30대(30~39세)만 해도 이 비율이 42.8%로 내려가고, 무려 60대(30.5%)의 2배다. 다만 '사랑의 불시착'과 같은 한국 드라마를 통해 중장년층의 한국에 대한 관심도 최근 부쩍 커지고는 있다.
■'K팝 오프라인' 재시동
최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파견한 한일정책협의단의 방일로 한일 양국 정부 간 '김포~하네다 노선', 관광비자 면제, 격리 면제 등 왕래재개를 위한 논의가 속도를 낼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 기업, 한류 스타들의 일본 방문이 더 자유로워지면 일본 내 한류 분위기가 더욱 고조될 것으로 보인다.
이미 CJ ENM은 이달 14일과 15일 3년 만에 일본 도쿄 인근 지바현 대형 컨벤션센터인 마쿠하리메세에서 '케이콘(KCON)2022 프리미어' 행사를 개최하기로 했다. 올해 10월 도쿄에서 열 '케이본 2022' 본행사의 예비행사 격으로 일간 2명 정도가 참여하는 규모로 계획했는데, 이미 전석 매진이다. CJ ENM 관계자는 "콘서트와 더불어 컨벤션 행사까지 약 3만명이 방문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ehcho@fnnews.com 조은효 기자